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진짜 삶이 시작되는 순간

[리뷰] 안톤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어젯밤 엄마 심부름으로 집 앞 편의점을 가는 길, 바람이 살랑거리며 피부에 닿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아, 가을이구나, 싶었습니다. 달력에 새겨진 몇월 며칠이라는 숫자보다도 이렇게 직접 체감해야만 무엇이든 확실하게 와 닿는 것인가 봅니다.

새로운 계절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그 바람의 인사를 반갑게 맞고 싶어 일부러 길을 멀리 돌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덕분에 아이스크림은 조금 녹았고, 엄마로부터도 조금 핀잔을 들어야 했지만 새 학기가 시작되면 느끼곤 했던 설렘을 아주 오랜만에 느꼈습니다.

편의점을 가고 오는 길에 제 앞을 걸었던 한 여인과 그 여인의 손에 걸린 줄로 연결된 작은 개 한 마리가 왜인지 머릿속을 맴돌았는데요. 아마도 바람이 데려온 가을과 일상이 데려온 삶이 교묘하게 중첩되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언젠가 읽었던 소설 속의 주인공들을 연상하게 했습니다. 바로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입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안톤 체호프 지음 / 더클래식 출판)

단편 소설의 거장, 안톤 체호프의 글은 주로 소소한 일상을 다루고 있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은 인간의 감정을 아주 섬세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또 벌써 그 시대에 우리 시대에 드리운 그림자를 예감했던 듯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직면하게 되는 삶의 비속들을 잡았다는 점에서 고전에 오를 수밖에 없는 가치를 담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 속에는 어젯밤의 바람처럼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얄타라는 휴양지 바닷가에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안나 세르게예브나가 등장하는데요, 이미 그곳에 휴식을 취하러 와있던 드미트리예비치 구로프라는 중년의 남성은 그녀를 눈여겨봅니다. 그는 결혼생활에 권태를 느낀지 오래인,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하며 이중적 생활 태도를 가진 사람입니다.

물론 두 남녀의 만남은 그의 접근으로 시작되죠. 언제나 금발에 베레모를 쓰고 하얀 스피츠를 데리고 다니는 그녀와의 몇 마디의 대화를 통해 그녀 역시 결혼을 했지만 뭔가 애절한 것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합니다.

잦은 만남으로 둘은 키스를 나누고 사랑에 빠지는데요, 구로프와 달리 안나는 이 만남을 자신의 타락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진지합니다.

전 저속하고 나쁜 여자예요. (중략) 전 남편을 속인 게 아니라 저 자신을 속인 거에요. (중략) 전 정직하고 깨끗한 삶이 좋아요.

그럼에도 눈병이 난 그녀의 남편이 빨리 돌아와달라고 하기 전까지 그와의 짜릿한 만남을 계속 이어가다 두 사람은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그녀는 어떨지 몰라도 그는 분명 그녀와의 기억을 곧 잊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것이 그가 여태 살아왔던 삶의 방식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한 달이 더 지나고 한겨울이 되었는데도 바로 어제 안나 세르게예브나와 헤어진 듯 기억 속의 모든 것이 너무도 선명했다.

그는 그녀를 제외한 자신의 일상이 무의미하고 지루하다는 깨달음을 견딜 수 없어 그녀가 있는 곳, S시로 찾아갑니다. 극장에서 그녀를 보자마자 다시 한번 놀라는데요, 스스로 이제 더는 그녀를 볼 수 없으리라고 다짐했던 마지막 헤어짐의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신만만했던 자신의 감정이라고 한들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죠.

하지만 모든 일이 다 끝나기까지는 아직 얼마나 멀고도 먼 길을 가야 하는 걸까!

그녀는 자신의 얼굴 이곳저곳에 입 맞추는 그를 간신히 밀어내며 돌아가라고 설득합니다. 자신이 그가 있는 모스크바로 가겠다고요. 서로의 배우자를 속이고 몰래 만나면서 구로프는 삶은 두 개의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자기 기준으로 남들을 판단했기에 보이는 것을 믿지 않았고 모두들 마치 밤 같은 비밀의 덮개 아래 흘러가는 진짜 인생, 가장 흥미로운 인생을 숨기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하나, 여자들은 그 자신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그녀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허구의 그를 사랑했다는 사실에 기이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지난 것들은 다 사랑이 아니었다고, 그러나 지금 그녀와의 사랑은 진짜인 것 같다고 말이죠.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 난관을 어떻게 뚫고 살아갈 수 있을지. 그리고 이렇게 고민하는 장면에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아직 멀고도 먼 길이 남아 있으며,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이제 막 시작되었음을 두 사람 모두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열린 결말이므로 작가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과 찾아야 할 답을 생각해보게 되는데요. 이 소설은 그간 쉽게 만나고 헤어졌던 일회적 사랑들과 허울뿐인 결혼 관계, 진실을 감추었던 이중적 생활상에서 외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듯한 오만함과 삶을 좀 아는 듯한 자기 확신에 찬 한 남성이 불현듯 찾아온 진짜 사랑을 통해 진정한 삶의 안쪽으로 한 발자국을 들이밀게 되는 순간에의 고민을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픽사베이

그래서 그것이 비록 불륜일지언정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만큼은 진짜 삶이 시작되는 순간인 것 같습니다. 거짓으로 꽉 찬 지난 삶은 모든 것이 간단하고 쉬웠던 반면 허상일 뿐이었지만 진심을 느껴버린 지금, 이 순간의 삶은 복잡하고 어렵지만, 비로소 진짜의 삶이 시작된 것인 거죠.

책을 덮고 곱씹어보니 구로프도 처음부터 안나를 진짜 사랑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지나간 관계의 뭇 여자들처럼 자신의 실체를 알아보지 못한 그녀를 의도치는 않았으나 속여왔다는 것을 이미 의식하고 있었고 그녀를 그리워하던 순간에도 자신의 그녀를 향한 태도, 그것이 과연 사랑이었냐고 비웃듯 자문합니다. 그러다 다시 만난 순간에야 진짜 사랑임을 믿게 됩니다. 그때 그는 이미 머리가 세기 시작하는 나이였죠.

사람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 삶이라는 것은 그 무엇도 그가 살았던 방식처럼 쉽고 간단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구로프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자기 확신은 한 사람을 만나는 순간 무너졌고, 기만해왔던 사랑은 머리가 세기 시작한, 생의 후반기에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제서야 진짜 삶에 대해서 고통스럽게 고민하게 됩니다. 구로프가 살아왔던 지난 삶은 그래서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성공한 듯 여겨졌던 거짓된 삶이 허울을 벗고 비로소 진실한 삶의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에서는 진정한 승리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말을 아무도 알 수 없듯이 사람, 사랑, 삶이 주는 고통스러운 고민에도 그 고민 속에 자신만이 내린 답의 길이 있다는 사실, 그 길을 걷고 있는 순간만이 진짜 살아있는 자각이 가능하리라는 것만 잊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진짜라는 점에서 모두들 성공한 것이라 믿습니다. 피부에 스미는 바람의 감촉에, 단편 소설의 거장 안톤 체호프의 지혜에 살아있음을 느끼는, 가을의 입구에 선 서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