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세대’와 ‘페미피아’, 영혼의 단짝으로 만나다 1

[기획]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의 문화대혁명

[글 싣는 순서]

  1. 페미니즘 광풍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
  2. 주체성 부르짖는 비주체적인 ‘상실의 세대’
  3. 박근혜 정권의 판 뒤집기와 ‘상실의 세대’의 위기의식
  4. ‘상실의 세대’와 ‘페미피아’, 영혼의 단짝으로 만나다 1
  5. ‘상실의 세대’와 ‘페미피아’, 영혼의 단짝으로 만나다 2
  6. 홍위병 이끄는 ‘강청’이 되고픈 ‘상실의 세대’ 1
  7. 홍위병 이끄는 ‘강청’이 되고픈 ‘상실의 세대’ 2
  8. ‘상실의 세대’, ‘승리의 세대’를 검열하다 1
  9. ‘상실의 세대’, ‘승리의 세대’를 검열하다 2
  10. 모택동 자임하는 ‘유신·386 세대 운동권 세력’
  11. ‘80년대 가치’의 맹종이 아닌 필터링과 극복을 요구하며 1
  12. ‘80년대 가치’의 맹종이 아닌 필터링과 극복을 요구하며 2

진보 담론의 빈곤과 ‘미시의 거시화’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들이 주도하기 시작한 진보 세력들은 왜 ‘페미니즘’을 강력하게 지지할까. 우선 ‘서구 복지국가 논의’ 이후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미칠만한 새로운 거시 담론을 진보 세력이 마련하지 못했다는 점을 꼽아볼 수 있겠다.

물론 이러한 모습은 비단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사회 담론을 주도했던 서구의 경우에도 소련 붕괴 이후 보수 진영은 ‘신자유주의’ 등에, 진보 진영은 다른 다양한 사회적 대안들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한계를 인식하고 ‘복지국가’라는 틀로 회귀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신 서구에서는 68혁명을 계기로 확산된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거시 담론에서 벗어나 사회 내 미시적인 영역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1968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된 68운동

한국 역시 서구를 배우면서 이같은 미시적인 부분의 담론들을 접한 바 있었으나, 거시적인 영역의 사회적 과제들이 먼저 해결돼야 한다는 입장이 강했기 때문에 그동안 논의 순위에서 밀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것이 이제 내세울 만한 거시 담론을 사실상 상실했다고 판단하면서, 후순위에 존재하긴 했으나 그나마 내부적으로 논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바 있던 미시 담론이 진보 세력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문제는 진보 세력이 사회 전반에 주도권을 쥐며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산시키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진보 세력에게 있어서 미시 담론은 곧 사회 전반에 확산시켜야 할 논의 대상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사회 내 특정한 한 부분에 중점을 두며 이를 강조하는 담론이 다양한 성격과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이 공존하는 현대 사회 전반에 받아들여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 세력은 그러한 작업이 가능한 듯이 보이는 미시 담론을 발견하게 됐다.

바로 ‘페미니즘’이었다.

‘페미니즘’이 중시한다고 내세우는 ‘여성’은 사회 내 미시적인 영역 중에서 가장 범위가 넓은 편에 속했다. 세상의 절반이 여성이며 그들은 여러 사회 영역에 포진해있으니, 어떻게 보면 거시적인 부분처럼 보일 수도 있는 대상이다. 진보 세력으로서는 이들 ‘여성’을 포섭한다면,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사회 절반 이상을 장악하는 일이 가능하리라는 구상을 해볼 수 있었다.

계급만능론 → 약자의 절대 신성화·나르시시즘 → 청교도·엘리트주의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을 각각 ‘지배자·기득권자’와 ‘피지배자·사회적 약자’로 나누며, 전자가 후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며 자신들의 권력 우위를 도모한다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사회에 적용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는 모든 사회 현상을 ‘부르주아’로 규정되는 상부 집단과 ‘프롤레타리아’로 인식되는 하부 집단으로 나누어 치환한 후, 전자가 후자를 억압·착취해 권력 우위를 도모하기에 발생한다는 식으로 설명하려 드는 ‘계급만능론’에 익숙한 진보 세력에게 쉽게 수용될 수 있는 사고방식이었다.

진보 세력에 만연한 ‘계급만능론’은 하부 집단의 모든 행위에는 그들 자신의 주체성을 획득하려는 원동력이 수반되기에 정당하고 발전적인 성격이 내재한다는 ‘과잉해석’을 동반한 ‘약자의 절대 신성화’와 ‘약자 나르시시즘’을 출현시킨다.

그리고 이는 하부 집단의 어려움과 사회 충돌 양상을 부각해 사회적·도덕적 책무를 갖게끔 자극하는 방식으로 확산을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진보 세력은 하부 집단과의 거리와 사회적·도덕적 책무의 보유 정도가 상호 연관성을 지닌다는 인식 하에, 이들을 각각 진전시키고 상호 밀접하게 연계시켜 자신들의 존재·행동 정당성과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우월성·주도성을 확보하려드는 ‘청교도주의’ 및 ‘엘리트주의’적 행태를 보이곤 했다.

이런 모습들은 ‘페미피아’들에게서도 나타났기에, 진보 세력은 친연성을 느끼며 그들의 주장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됐다.

그들은 ‘하부 집단’인 여성의 모든 행위에는 그들 자신의 주체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이 담겨있기에, 이들 모두는 정당하고 위대한 사회적 전진의 성격을 지닌다는 ‘과잉해석’을 통해 ‘여성의 절대 신성화’와 ‘나르시시즘’을 창출해냈다.

그리고 여성의 ‘소외’ 현상이나 성매매·범죄·폭력 경험 등 보통 현대 사회에서도 사회적·도덕적 책무를 갖도록 촉구할만한 사안을, 도리어 자신들의 사고방식과 존재를 절대적으로 정당화하고 다른 사회 구성원들을 공격·압박하는 작업에 활용하곤 했다.

특히 보수 세력에게서 상대적으로 여성과 관계된 문제가 크게 표출된다는 점은, 진보 세력에게 스스로의 존재 가치의 우위를 점하며 장기적으로 ‘여성’들과 연계돼 그들의 지지를 확보해 나간다는 발전 도식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사회 전반에서 기본적으로 당연히 요구하곤 하는 사회적·도덕적 책무에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찾으려 든다는 점은, 그만큼 진보 세력이 사회 담론 제시 측면에서 퇴행했음을 반증해준다고 하겠다.

이론·담론의 종교화와 교조주의, 그리고 우월주의(오리엔탈리즘)

한편 진보 세력은 민중·민족·계급 등 자신들이 ‘하부 집단’으로 규정한 사회 집단들에게는 그토록 ‘주체성’을 강조하지만, 정작 스스로의 사고 방식과 활동 방향은 외부에 의존하는 행태를 보여주곤 한다.

물론 자신들과 사회 전반의 수준 향상을 위해 외부의 것들을 조사하며 배우는 모습은, 무조건 부정적으로 인식될 필요가 없는 오히려 권장할 태도라고 하겠다. 더욱이 한국처럼 사회·학문 담론을 선도하기보다 따라가는 입장에 서는 경우가 많은 곳에서는 더욱 그러한 자세가 요청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런 이유로 수용된 외부의 것이 진보 세력 내부에서는 절대 신성하며 추종 대상이 된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구자(歐子: 유럽 지식인)’와 ‘미자(美子: 미주 지식인)’ 양대 성현을 끼고 그들에 대한 주석가·계승자를 자처하며 자신들의 권위를 확립해 나간다.

간혹 두 성현의 가르침으로만 해결되지 않으면 ‘일자(日子: 일본 지식인)’나 ‘중자(中子: 중국 지식인)’가 소환되곤 한다. 아울러 이들이 자주 들먹이시는 성현은 ‘마자(馬子: Marx·사진)’다. 세계상에서 여러 방면으로 주도적인 위치에 놓여본 적이 드문 한국 사회에서, 이들의 그러한 태도는 쉽게 먹혀들어 떠받들어지곤 한다.

Karl Marx(1818~1883)

따라서 이들은 현실에서 사회 담론을 이끌어내도록 양자 간의 상호 합의를 도모하기보다는, 전자가 절대 진리인 후자의 통제 속에 그 내용을 철저하게 적용하고 구현해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

위대한 성현의 말씀이 그깟 현실에 굴복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진보 세력이 자신들의 고민을 해결하고자 최대한 찾았던 외부의 담론에 대해 이처럼 떠받드는 자세를 갖게 되면서, 그와 다른 요소들은 자연스럽게 무조건 부정적인 의미로 규정되고 더 나아가 ‘이단’시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러한 모습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부분이 많지는 않지만) 김어준과 같은 방식의 노무현-문재인 지지 활동에 대한 진보 세력의 맹목적인 공격을 통해 확인된다. 이념·정당보다는 인물 중심으로 정치적 지지 행위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수용해 그에 맞는 인물을 내세우는 처방으로 이상 구현을 도모하려는 김어준 등의 행위는, 진보 세력에게 있어서 ‘구자’와 ‘미자’의 가르침에서 한참 벗어난 ‘이단’적 행위로 비추어지기 쉬웠다.

아울러 요즈음 주목받는 진보 세력의 대통령제에 대한 부정적 태도도 제대로 된 의회정치가 작동하지 않는 현실 진단보다, 민주주의를 선도한다는 서구에서 의회내각제를 시행하기에 추진돼야 한다는 이상론에 바탕을 둔 당위성에서 기인한다.

이 과정에서 소위 ‘한국식 민주주의’를 내걸었던 군사독재정권의 사례는 진보 세력의 현실 고려에 대한 무조건 거부를 정당화하는 만능 논거로 활용된다.

우스운 사실은 그들이 ‘학생-사회 운동’ 시절에 한때 호의적이었던 러시아·중국 등의 사회주의화 과정이나 오늘날 충실히 따라야 한다며 거룩한 태도로 주입하려 드는 서구의 사회 담론들이, 당시 현실을 냉정하게 진단하고 그에 맞는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면서 나온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이같은 ‘사대주의’ 및 ‘교조주의’적 행태는 진보 세력 스스로가 종종 모든 한국 사회 문제의 근원으로 거론하며 공격하곤 하는 조선 유학자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조선후기에 나타난다는 주자학 중심의 사상적 경직성을 현실에서 체험해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진보 진영 활동들을 적극 추천해본다.

진보 세력의 이러한 모습들은 ‘페미피아’들에서도 발견된다. 이들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여성’의 형태는 서구(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중산층 이상의’가 추가된)의 그것이다.

서구 여성들에게 나타나는 모습들은 ‘여성운동’의 선구적 행위이기에 곧 전 세계 여성들이 추종해야 하며, 그들에게 없거나 거부당하는 요소들은 ‘여성혐오’가 내재해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규정된다.

나아가 이렇게 여성들을 ‘우대’하는(‘중산층 이상’만 보니 당연히 이것들만 보일 수밖에 없다) 서구 사회는 이상적이며 추종해야 할 마땅한 대상이 된다.

서구 사회 안에서도 여성 관련 문제와 한계들이 분명 존재하며, 그들이 제시하는 여성상 또한 과연 여성 자신들과 사회 전반에 적절하게 작용할지 고민해 볼 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페미피아’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와 같은 ‘페미피아’들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정확히 말하면 ‘여성판 오리엔탈리즘’에 가깝다.

‘페미피아’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은 서구를(정확히 말하면 ‘서구 중산층 이상의 문화’를) 온전히 체득했기에 그들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며, 따라서 ‘이상적인 여성’이라는 문명을 전파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게 된 ‘명예 백인’이다.

그리고 외부 구성원들은 서구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 못해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거나 순응하는 ‘후진 사회’의 ‘야만인’이다. 정희진이 괜히 한국 남성에 대한 편협하고 부정적인 시각을 노골적으로 표출하면서 서구 백인 중산층 남성을 들먹인 게 아니다.

메갈리아에게 고마워하라는 글을 <한겨레>에 게재한 여성학자 정희진(출처 한겨레)

서구 바깥 사회에서도 그들 나름의 여성에 대한 관심과 배려·도움 등을 지니고 있으며, 적어도 근대 이전에는 서구보다도 나은 측면도 일정 부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위대한 ‘명예 백인’들이신 ‘페미피아’들에게 있어서는 ‘야만인들의 행태’일 뿐 그다지 고려 대상이 아니다.

‘페미피아’들은 여성들의 ‘주체성’을 부르짖지만, 정작 자신들이 서구로부터 배운 이상적인 여성상만을 ‘주체적 여성’으로 판정하고 그와 다른 모습을 제시하려는 여성들은 남성들의 억압·착취에 기여하는 배반자 혹은 그들에게 세뇌된 ‘우민’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아이유 같은 남성들에게 인기를 끄는 일부 여성 연예인들에 대한 ‘페미피아’들의 맹목적인 공격에서 확인된다. 남성들의 호응을 불어 일으키는 ‘여성적’인 이미지들을 자신의 매력으로 내세우면서도 오히려 이를 역이용해 나름의 목소리도 내어 지지까지 얻어내는 아이유 등의 모습은, ‘페미피아’들에게 자신들의 이론에 들어맞지 않다는 점에서 ‘이단’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아울러 기존에 여성의 역할로 인식되어 온 활동을 하면서 여기에 스스로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여성들의 사례들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려 드는 강박적인 자세 역시 그 같은 교조주의적 발상에서 기인한다.

우스운 사실은 자신들이 그토록 비난하는 모습들이 서구 여성들에게서 나타날 경우에는, 반대로 나름의 ‘주체성’과 긍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며 예찬을 늘어놓는다는 점이다.

우에노 치즈코

필자가 보기에 “주자(朱子)의 말씀은 한 자 한 획도 고칠 수 없다”고 일갈하며 그에 대한 문제 제기를 ‘사문난적’으로 규정했던 송시열이나, “천학자(千鶴子·우에노 치즈코)의 말씀은 한 자 한 획도 틀리지 않다”는 발상 하에 자신들의 남녀 인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를 ‘여성혐오’로 낙인찍으려드는 정희진이나 그 사고 구조가 별반 다르지 않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