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여성 철학자 플라스푈러, 미투 운동 비판과 새로운 길 제시하다

[리뷰] <힘 있는 여성> 페미니즘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미투 운동과 해시태그, 페미니즘 전성시대

독일 여성 작가이자, 철학자인 스베냐 플라스푈러가 현재의 미투 운동을 비판하는 짧지만 강렬한 에세이를 출간했다. 저자는 서구에서 발생한 미투 운동과 함께 페미니즘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방향을 제시한다.

<힘 있는 여성>(스베냐 플라스푈러 지음 / 나무생각 출판)

책의 첫 장부터 필자가 그동안 써왔던 글과 생각이 너무도 흡사해서 놀라웠다. 필자의 단행본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에서도 주장했던 대로 현시기 페미니즘 비판과 방향성에 대한 부분까지 본질은 다르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인 하비 웨인스타인의 오래된 성범죄가 수면위로 드러나며 ‘나도 당했다’는 여배우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미투는 곧바로 한국에도 상륙해 유력 정치인·배우·교수 등 유명인을 대상으로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미투 캠페인의 창설자 미국의 사회운동가 타라나 버크는 “미투는 성폭력을 겪은 이들 모두를 위한 운동이지 여성운동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한국은 2015년 중순 무렵부터 시작한 래디컬 페미니즘과 결합되면서 여성 운동으로 전락한다.

어느 날 TV 뉴스에 한 여성이 등장해 ‘나도 당했다’고 주장하면 곧바로 여론 재판이 벌어졌다. JTBC 뉴스룸의 메인 진행자인 손석희씨의 유명한 멘트 “피해자의 목소리가 증거다”처럼 피해를 주장하는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주장하면 눈물도, 목소리도 전부 증거로 인정받는 세태가 됐다.

플라스푈러는 여기서 해시태그-페미니즘이란 적절한 용어를 사용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주도해 SNS에서 해시태그를 달고 공개재판이 이루어진다. ‘유죄가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라는 원칙은 SNS에서 너무도 쉽게 무너진다.

플라스푈러는 묻는다. 그렇다면 “정당하지 않은 남성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여성 스스로가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빠져있다”고 말이다. 여성은 저항할 힘이 없는가? 여성은 자주성이 없는가?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고발한다?

스베냐 플라스푈러

저자는 거듭 의문을 제기한다. 세상의 모든 남자가 하비 웨인스타인은 아니며, 모든 기업·단체가 남성 상사들의 성적 취향에 대해 여성들을 피해자로 만드는 권력 카르텔은 아니라고 한다.

웨인스타인의 성범죄를 고발한 최초 여배우 중 한 명인 아시아 아르젠토는 방송에 출연해 “웨인스타인은 최악의 연쇄 성 약탈자”라 비난하며 “연쇄 살인범 테드 번디와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르젠토 역시 17세 미성년자 소년을 성폭행했다는 사건이 불거지자, 성관계 사실은 인정했다. 미투 운동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셈이었다.

저자는 마치 중세 공개재판처럼 죄인을 기둥에 묶어두고 비방을 받게 하는 행태는 미투 운동의 퇴행적 경향이며, 진보의 탈을 썼지만 중세로의 퇴보이며 ‘도덕적 전체주의’일 수 있다고 강한 어조로 비판한다.

힘 있는 여성은 심리적으로 가부장제를 넘어섰고 법적으로도 가부장제는 끝났다

플라스푈러는 미투 운동으로 드러난 페미니즘의 피해자 서사에 대해서도 예리한 지적을 가한다. 페미니즘이 가진 기본 전제, 즉 남자가 세상을 지배하고 여성은 항상 피해자라는 규정은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여성들이 자신의 욕망을 수동적 역할로만 인정하고, 아동·환자·장애인과 동일시하는 약자화 서사는 스스로 가부장적인 여성비하이며, 굴종적인 위치에 자리한 낡은 고정관념일 뿐이라 질타한다.

플라스푈러는 ‘힘 있는 여성’ 독일어로 ‘디 포텐테 프라우’를 주창한다. 래디컬 페미니즘과 주디스 버틀러로 대표되는 해체주의(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을 넘어선 제3의 길을 제시한다.

남성을 거세할 것이 아니라 여성 스스로 힘을 얻어야 한다. 힘 있는 여성은 일과 섹스와 실존에서의 수동성이 남성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 반응이 아닌 행동을, 수동성이 아닌 능동성을, 결핍이 아닌 충만을 추구해야 한다.

피해자 담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플라스푈러가 <힘있는 여성>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필자의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에서 본질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방향성에 있어 대부분 일치한다.

언론이 페미니즘을, 미투를 소비하는 행태는 마치 빈곤 포르노를 보는 듯하다. 여성은 욕망도 없고 자주성도 없는 그저 남성들에게 종속돼 희생자화된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직업 페미니스트들의 농단이 개입됐다. 필자가 항상 페미니즘으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얻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끝으로 플라스푈러는 자신이 20대 중반 주디스 버틀러에 심취해 동성애를 갈구했으나 끝내 실패했던 기억을 되살리며 그녀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주디스 버틀러는 여성의 지위가 깔고 앉은 밑창까지 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