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위병’ 이끄는 ‘강청’이 되고픈 ‘상실의 세대’ 2

[기획]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의 문화대혁명

[글 싣는 순서]

  1. 페미니즘 광풍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
  2. 주체성 부르짖는 비주체적인 ‘상실의 세대’
  3. 박근혜 정권의 판 뒤집기와 ‘상실의 세대’의 위기의식
  4. ‘상실의 세대’와 ‘페미피아’, 영혼의 단짝으로 만나다 1
  5. ‘상실의 세대’와 ‘페미피아’, 영혼의 단짝으로 만나다 2
  6. 홍위병 이끄는 ‘강청’이 되고픈 ‘상실의 세대’ 1
  7. 홍위병 이끄는 ‘강청’이 되고픈 ‘상실의 세대’ 2
  8. ‘상실의 세대’, ‘승리의 세대’를 검열하다 1
  9. ‘상실의 세대’, ‘승리의 세대’를 검열하다 2
  10. 모택동 자임하는 ‘유신·386 세대 운동권 세력’
  11. ‘80년대 가치’의 맹종이 아닌 필터링과 극복을 요구하며 1
  12. ‘80년대 가치’의 맹종이 아닌 필터링과 극복을 요구하며 2

문제는 ‘여성’이라는 존재가 ‘계급성’을 가진다는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과 ‘페미피아’의 주장이 처음부터 성립되기 어렵다는데 있었다. 소위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며 그 안에서 차별을 받는다고 여겨지는 집단들은, 적어도 두 가지의 특성 중 하나 이상을 보인다.

첫 번째는 ‘유사계급성’이다.

이들은 사회적·경제적 위상과 이를 보장해주는 기회 확보 양상이 (주로 최대치가) 대략적으로 다른 집단들보다 낮아 마치 ‘하부 집단’처럼 인식되곤 한다.

이러한 모습은 인종·민족·지역 등의 문제에서 두드러지곤 하는데, 외부 구성원이라고 해서 그들보다 우월한 사회적·경제적 위치를 전적으로 보장받지는 않으며 똑같거나 낮은 경우도 존재하기에 ‘계급’이 아닌 ‘유사계급’으로 정의된다.

두 번째는 ‘배제가능성’이다.

이들은 사회 전체 안에서 그 수적·사회적 비중이 적기에 (실제로 그러한지의 여부를 떠나서) 그 안에서 배제된다 해도 사회 운영에 특별한 지장이 없다고 인식된다.

이같은 ‘배제가능성’은 여기에 해당한다고 믿어지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폭력을 심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들에 대한 차별을 주장하는 목소리에서 등장하는 박멸·절멸 같은 극단적인 표현들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일베’의 자극적인 호남 비하·차별 주장은 해당 지역을 배제해도 한국 사회가 움직이는데 특별한 지장이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장애인·동성애자 등은 ‘유사계급성’은 적으나, ‘배제가능성’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차별이 정당화되거나 심화되는 경우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여성’의 경우 이 두 가지 특성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는다. 우선 여성의 ‘유사계급성’은 ‘배제가능성’으로 인해 성립되지 않는다. 여성은 한 사회에 절반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경제적 위상과 상관없이 각 계층·집단마다 전체적으로 고르게 분포한다(심지어 절반가량의 비중을 각각 유지할 때가 많다).

더군다나 남성과 여성은 서로 관계를 맺고 생산을 하는 과정을 통해 그 사회를 기초적으로 유지하기에, 상호 밀접하게 연결된 이같은 두 집단 중 한쪽에 대한 일방적인 배제가 불가능하다.

‘페미피아’들은 남성과 여성의 소득격차 등을 운운하면서 ‘계급성’을 주장하지만, 가장 기초가 되는 ‘가정’을 비롯한 여러 사회 공간들을 통해 남성과 여성은 서로의 사회적·경제적 위상을 공유하므로 그 의미는 대폭 축소될 수밖에 없다.

남성의 사회 주도권과 사회적·경제적 기회 확보 양상 역시 여성의 ‘계급성’을 내세우는 데에 한계가 있다. 이들은 모두 ‘하부 집단’인 여성을 억압·착취함으로써 얻은 것이 아니라, 한 사회가 자신들이 처한 환경과 각각의 체질에 따라 맡은 성별 역할이 변화하는 환경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역할은 한 집단이 유지·발전하는 데에 어떠한 기능을 하느냐를 따져 권리와 대가(책무)를 함께 부여했으며, 그 중요성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권리와 대가(책무)의 증감을 함께 비례해 결정했다.

이처럼 남성의 사회 주도권과 사회적·경제적 기회 획득은 해당 사회 안에서 남성이 맡은 역할의 성격을 따진 결과이며, 권리 못지않게 대가(책무)를 동반하는 ‘무거운 왕관’이라고 하겠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하지만 ‘페미피아’들은 그 왕관의 화려함에 반할뿐 그 무게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으며, 남성의 일을 얼마나 많이 빼앗아 권리를 누리느냐의 여부로 여성의 지위를 규정한다.

과거 남성이 맡았던 역할을 여성이 도전하는 일에 대해 반감을 사는 것을 ‘페미피아’들은 ‘상부 집단’의 반동이라고 이해하지만, 이는 사실 여성이 그 안에 주어진 권리 외에 동반된 대가(책무)도 감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에서 발생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실제로 그 같은 의구심을 깨는 모습을 보여준 여성들은 오히려 남성 주도 사회 안에 인정을 받는 사례들이 찾아지곤 한다).

이렇게 남성과 여성의 상호 공존과 각자 맡은 역할에 따른 대가(책무)의 양상은 양자 간의 관계가 ‘계급투쟁’이 아닌 ‘상호 보완’의 측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이러한 특징은 가족과 같은 기초 사회 집단의 운영 형태가 쉽게 변하지 않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한다. 남과 관계된 여성들의 위상 변화는 원할지 몰라도 자신과 가깝기에 사회적·경제적 위상을 공유하는 여성들은 그렇게 만들기 싫다는 인식이, 그 안에서의 변화를 지속해서 막기 때문이다.

‘페미피아’들이 ‘가족’의 해체를 무엇보다도 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이 이루어질 경우 남성과의 단절을 통한 사회적·경제적 고립과 그들이 맡아온 역할 안에서 발견되는 권리의 부각이 심화될 것이며, 이는 곧 사회적·경제적 위상에 기초한 ‘계급성’을 만들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픽사베이

이같이 ‘여성’에게서 ‘유사계급성’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으니 ‘배제가능성’도 당연히 성립되기 어렵다.

‘페미피아’들은 ‘김치녀’·‘된장녀’·‘맘충’ 등의 여성 평가 단어들을 말하며 이에 대해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사례들을 들어, 여성의 ‘배제가능성’에 따른 남성의 폭력이 만연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온라인 공간에서 이 단어들은 여성 전체가 아닌, 사회 안에서 타자와의 관계 고려보다는 자신의 입장·권리·이익만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일부 여성들을 한정해 지칭하는 표현이다.

설령 해당 단어들을 여성 전체를 규정하는 데에 쓴 이들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일베’의 ‘김치녀’ 남용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들은 곧 자신 혹은 자신이 설정한 기준과 가까운 여성들에 대해 계속 예외를 적용하고 이를 확대하는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사회 기초에서부터 상호 밀접하게 연결돼 사회적 위치를 공유하는 여성이기에, 이에 대한 공격은 곧 자신에게 돌아올 수도 있다는 우려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서다.

‘일베’에서 호남 비하·차별을 내세우면서 사용하는 ‘홍어’의 경우, 호남 지역과 혈연·사고상 가깝다는 이유로 무분별하게 해당 단어 규정을 남발하면서, 자신들은 모두 ‘홍어’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웃지 못할 사회 구도를 만든다(보수 세력을 지지하는 호남 출신 인사들의 존재는 슬그머니 넘어가거나 예외를 적용한다).

한국 사회에서 ‘일부’라는 호남에 대해서조차 이럴진대, 그보다 더 많은 심지어는 세상의 절반에 해당하며 강한 상호 밀접성을 가진 ‘여성’에 대해 ‘배제가능성’이 제대로 내재할 리 없다.

무엇보다도 ‘페미피아’들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오랫동안 통용된 인류 및 사회 이해의 기본 명제를 깡그리 무시하고 논의를 전개한다.

인간 모두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제공하는 수많은 변수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만들어나가며, 하다못해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조차도 외부에서 들어오는 생존 물품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여성’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다.

‘여성’은 사회 구성원의 절반을 차지하는 ‘하부 집단’처럼 인식되는 ‘거시’적인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종 사회 집단 안에서 제공하는 상호 밀접성에 따라 남성과 공유되는 사회적·경제적 위치로 인해 이를 둘러싼 수많은 변수에서 더욱 강력한 영향을 받는 ‘미시’적인 존재다.

따라서 여성들의 ‘계급성’은 성립되기 어려우며, ‘페미피아’들이 주장하는 ‘다양한 페미니즘의 존재’는 스스로의 ‘계급성’ 부재를 은폐하기 위한 기만 논리이자 여성의 실제 존재 양상이 ‘여성’이라는 성별보다는 다른 수많은 변수에 의해 좌우된다는 자기 고백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이 갖는 이같은 특수성은 그와 관련된 각종 평가나 지표들이 대학평가처럼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엿가락같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원인을 제공한다.

‘페미피아’들은 ‘여성’을 하나의 주체적인 대상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부르짖지만, 실제로는 ‘남성’이라는 약물만을 투여해 반응을 이끌어내는 ‘실험용 쥐’로 본다. 필자가 보기에 이들이 말하는 ‘여성 해방’과 ‘주체성 확보’는, 여성 스스로 ‘남성’ 외에 다른 변수가 작용하지 않도록 외부와의 관계를 최대한 차단하는 ‘실험용 쥐’가 되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여성의 주체성’을 위해 사회의 기초가 되는 가족 관계부터 부정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동안 사회가 어떠한 방식으로 운영됐는지 그리고 자신들의 이상을 구현할 경우 어떻게 사회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이처럼 외부와의 다양한 관계에 대한 고찰이 없다보니, 이들은 전체 사회 안에서 스스로가 어떠한 위치에 있으며 내부의 여러 집단과 어떻게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지도 당연히 관심이 없다. 다만 자신들의 주체성을 확인하고 존중받으며 생존하고 싶은 개인적 욕구만이 가득하기에, 외부에 권리와 요구 제시만을 무분별하게 늘릴 뿐 그에 따른 대가(책무)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무균실 안에 있는 ‘실험용 쥐’가 다른 외부 변수에 의해 생활이 위협받지 않도록 밖에 있는 누군가가 신경 써주어야 하듯이, 이들에게 있어 ‘여성’은 유일하게 직접적인 변수로 작용한다고 믿어지는 ‘남성’이 무조건 책임을 져야 마땅한 존재다.

그런데 최대한 사회적 대가(책무)를 지지 않으면서 권리와 요구를 최대한 받을 수 있는 ‘여성’이 현실에서 ‘표면적’으로나마 구현 가능한 경우는, 기껏해야 중산층 이상의 여성들 정도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피아’들은 ‘여성’ 모두가 이같은 중산층 이상의 ‘여성’이 될 수 있다면서 그 이상에 다다르지 못한 데에 대한 책임을 모두 ‘남성’에게 돌리고, 스스로 여성의 대표를 자처하며 최종적으로 자신들이 최대한 받을 혜택들을 ‘여성’의 권리로 포장해 요구한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그 이름처럼 ‘여성’이 아닌 ‘중산층 이상 여성’을 대표하는 사상에 불과하며, 그 이상을 살펴보면 결국 ‘프린세시즘(Princessism=Princess+-ism)’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들이 외치는 “Girls can do anything”은 실제로는 “But girls can`t do 3D(Dirty·Difficult·Dangerous)”를 전제한 구호에 불과하다.

Girls can do anything

진보 세력은 그 사고방식의 유사성 때문에 ‘페미피아’들을 ‘영혼의 단짝’으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누구를 대변하느냐를 따져보면 전형적인 ‘부르주아 사상’·‘귀족주의’가 내재됐다는 점에서 ‘페미피아’들은 진보 세력의 ‘육신의 단짝’까지 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들은 이같은 ‘계급배반’적인 담론을 기꺼이 자신들의 미래를 보장할 논의로 추겨 세우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페미피아’들의 뒤에는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내 상당수가 끔뻑 죽는, ‘미자(美子)’와 ‘구자(歐子)’ 양대 성현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적당한 시기에 서구 사회 내부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우는 경향이 강화됐다는 점은, ‘페미피아’들에 대한 추종이 곧 한국의 사회 발전을 선도하는 행위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마르크시즘’ 등 ‘사회주의’ 담론이 막 정착해나가는 과정 중에 있었기에 종종 ‘하부 집단’ 관련 사회 문제들을 이론보다는 현실과의 관계 형성을 통해 해결했던 유신·386 세대와는 달리, 현실과의 폭넓은 대면보다는 선배들이 완성해놓고 물려준 이론들의 계승·구현에 주력해왔던 ‘포스트?80년대 운동권 세력’들에게 ‘페미피아’들의 주장은 현실과 부합한지 검토해보아야 할 대상이 아닌 권위를 획득했기에 실현해 나가야 할 방향으로 인식됐다.

더군다나 그들이 가진 지적 우위와 지속 상승한 사회적 지위는 외부 구성원들을 해당 방향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엘리트주의’를 강화해 스스로를 ‘귀족화’했고, 변화하는 현실과의 대화보다는 이를 ‘페미피아’들의 지시에 따라 짜맞추려드는 ‘교조주의’에 함몰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같은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과 ‘페미피아’들의 연합 활동은 사회 전반에 큰 호응을 얻어내기 어려웠다.

일단 두 집단은 사회 안에서 지위가 상승했다고 하더라도 그들 스스로의 영향력과 권위가 전반에 걸쳐 강력하게 발현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청년층 여성’들을 ‘교화’할 수 있다는 ‘학교’로 들어가 지적 우위를 점했으나, ‘학교’ 밖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신들의 가르침이 현실에서도 옳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5월 8일 이화여대 캠퍼스복합단지에서 열린 ‘페미니즘, 어디까지 읽어봤니?’ 북콘서트(출처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

또 두 집단의 영향력 강화 수단으로 활용된 ‘메갈리아’의 활동은, ‘일베’ 활동의 부작용들 이후 극단적인 온라인상의 활동과 여기에 기반을 둔 오프라인으로의 공격성 표출에 경각심을 갖게 된 일반 대중(특히 청년층)에게 있어, 또 다른 ‘일베’의 등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인식됐다.

무엇보다도 애초에 ‘여성’ 자체가 사회 안의 여러 변수와 어우러져 있는 ‘미시’적 존재인 현실에 익숙한 일반 대중에게, 그들을 거시 담론으로 설명하려 드는 두 집단의 연합 활동은 당연히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으로 현실 사회를 이해했던 ‘거시 담론’인 ‘마르크시즘’조차도 그 안에 있는 여러 변수의 존재로 일반 대중을 설득하는 데에 애를 먹는데, 하물며 그보다도 미시적인 ‘페미니즘’이 제대로 먹혀들 리가 있겠는가.

일반 대중에게 “공부하라”는 두 집단의 일갈은 도리어 ‘페미니즘’ 자체가 얼마나 현실 운영 양상과 괴리됐는지를 웅변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과 ‘페미피아’들은 이러한 현실의 반응이 자신들의 문제가 아닌 외부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상부 집단’인 남성들이 그동안 자신들의 계급적·사회적 우위 및 주도권을 지속해서 유지하게끔, ‘여성’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를 그것에 맞게 ‘세뇌’시켰다는게 이들의 결론이었다.

그들은 사회 및 환경 속에서 출현하는 여러 변수와의 관계에 따라 성별 차이가 발생한 문제들을, 모두 남성 주도의 문화가 기초 집단인 ‘가정’에서부터 주입·확산돼 운영된 결과라고 해석하고, 이를 전 방위적으로 파괴 혹은 변화시켜야 현재까지는 원칙적·제도적으로만 보장된 ‘여성’의 권리가 실질적으로 발현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같은 판단에 따라 이제 이 두 집단의 관심은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바깥 공간과 상호 관계를 맺으며 스스로의 모습을 형성해나가는 도구인 ‘문화’에 집중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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