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내다보는 지혜가 간절하다

1970년대에 한 초등학생이 이런 시를 썼다.

···아주 공갈 사회책, 따지기만 하는 산수책, 외우기만 하는 자연책, 부를 게 없는 음악책, 꿈이 없는 국어책···

필자는 87민중항쟁 덕분에 뒤늦게 학교 교사로 발령 난 뒤에야 이 시를 접했다. 여러 해가 지난 뒤에는 심호택 시인의 시 <도적놈 소굴>도 읽게 됐다.

···눈 있거든 보아라 국정교과서라는 물건! 바둑아 이리 와, 나하고 놀자. 이게 공부더냐···

바둑이 이야기는 정부수립 이후에 나온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 실린 첫 대목이다.

그런데 아무리 ‘꿈이 없는 국어책’이라 해도 일반 교사들은 그것 갖고 수업을 안 할 수 없다. 꾀를 내서 딴 얘기도 섞긴 하지만 대부분 시간은 그것에 매인다. 지겨운 교과서에 대해 언젠가 선배한테 불평을 늘어놓았더니 선배가 필자에게 훈수를 두었다.

뭘 그렇게 가르치려고 그래? 그냥 애들하고 놀아!

교직 말년이 가까운 어느 날 그 말이 문득 떠올랐다. 말년 고참이 남들 눈치 볼 거, 무어 있겠는가. ‘그 충고를 문자 그대로 실천해 봐?’ 수업시간 100%를 그렇게 할 수는 없어도(그랬다가는 뻐걱거리는 일들이 생긴다), 그 상당 부분을!

이를테면 학생들을 운동장 구석이나 학교 담벼락 밑 같은 곳으로 불러낸다. 물론 수업시간에(체육선생들이 싫어하니 여러 차례 그러기는 어렵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건물 현관을 뛰쳐나온다. 시 한 편을 지으라고 애들한테 분부한다.

개나리꽃

제목은 “대한민국 서울시 OO중학교 담벼락 한 귀퉁이 그 모서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개나리꽃에게”다. 애들을 불러낸 때는 꽃구경하기 좋은 봄철이다. “시 다 쓰면 놀아도 좋다!”는 필자의 말에 또 환호성이 울려 퍼진다. 날라리노·날라리아들은 1분 안에 후루룩 써 재끼고는 번개처럼 공책을 덮지만 범생이들은 그래도 한참 공을 들여 끄적거린다(학생들한테 필자가 나중에 제시한 본보기 시는 이 글 끄트머리에).

대안교과서 만들기, 마냥 미뤄 둘 일이 아니다

‘꿈이 있는, 꿈을 품게 하는 교과서’는 어떤 것일까. 교직에 있을 때는 그 생각을 별로 안 해봤다. 꿈꿔 봤자 그걸 펼칠 멍석이 없는데 무슨 신명이 나겠는가. 눈앞의 수업시간을 어찌 운영할지에 매달리다 보면 공상의 나래가 축 늘어지기 마련이다. 교직을 마치고 나서야 그 생각을 좀 해봤다.

필자가 이태 전까지 ‘적’을 두었던 전국교직원노조는 (많이 알려졌다시피) 30년 전 결성 때부터 입시 개혁을 부르짖었다. “성적으로 줄 세우기는 이제 그만!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 좀 해봅시다!” 14년 전부터는 ‘공교육 새판 짜기’라 해 공공성에 입각한 공교육 개편방안을 마련해 우리 사회에 알려 왔다.

(초중고) 완전무상교육과 대학서열체제 극복방안뿐만 아니라 중등통합학교 설립(중고교 통합), 사회적 교육과정위원회를 통한 교육과정 전면개편까지 두루 제시했다. 하지만 대안교과서의 상(vision)과 관련해서는 현행(7차) 교육과정에 대한 반대, 교사의 교육과정 편성권 강화 같은 방향 제시 정도를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

물론 그 과업이야 사회적 교육과정위원회가 제대로 힘을 받고(정부 관료집단이 저희끼리 판을 짜오던 데서 손을 떼고), 학계 상당 부분이 거기 목소리와 힘을 실어야 구체화할 수 있는 것이지 교사들끼리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는 도무지 벅찬 일이다.

현실은 어떠한가. 30년 해묵은 입시개혁 과제조차 매듭을 풀지 못하고 있는데 (김상곤 전 교육부장관이 ‘정책숙의제’까지 들여와서 입시개혁을 꾀했다가 흐지부지됐다. ‘사회적 타협’을 모색하지 못한 그의 근시안을 나무라는 여론이 일었는데 경청할 대목이다. 한 세대가 다 늙어가도록 입시현실에 변화를 이뤄내지 못한 것, 진보교육감들의 진출과 탄핵국면도 살리지 못한 것은 진보세력 전체의 실력 부족을 돌아볼 일이겠다) ‘공교육 새판 짜기’에 담긴 여러 가지 내용과 대안교과서의 실현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렇다고 손 놓고 지낼 수는 없다. 대안교과서는 지금 당장 이곳의 학생들한테 읽혀야 한다. 꿈 깨라고? 대안교과서를 정부당국이 받아 안을 날은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라고? 안타깝기는 해도 간디학교 같은 사립 대안학교에서라도 받아 안으면 흐뭇하지.

거기도 저희 나름의 소견이 있어 저희 것을 쓴다고? 그럼 나 혼자라도 내가 마련한 내용을 바탕으로 가르치면 되지 뭘! 대학입시에 도움 되는 것이라야 아이들이 공부하러 찾아온다고? ‘학교 밖 공부’에 눈뜬 몇 안 되는 아이들한테라도 쓰이면 되네. ‘일당백’이란 말이 있네. 그 몇 안 되는 아이들이 세상을 구할 것이네. 그러니 대안교과서 입방아를 좀 더 찧어 보세.

대안 커리큘럼은 ‘역사교과 중심’이어야

대안교과서의 방향과 관련하여 천문학자 이명현이 어디서 말한 것을 읽었다. 그는 과학책에 대해서만 말했다. 그 분량을 10분의 1로 줄여야 쓰것단다. 천문학과 관련해서는 허블망원경이 찍은 아름다운 별 사진들만 실어도 족하단다.

A maelstrom of glowing gas and dark dust within one of the Milky Way satellite galaxies, the Large Magellanic Cloud (LMC), Elements of this image are furnished by NASA.

무엇만 뽑아내라는 말인가? 아이들한테 지적 호기심을 불어넣을 내용만! 지금 책으로 중고교 6년을 거치다 보면 아이들이 주워듣는 지식은 몇 개 될지 몰라도 그들의 지적 호기심이 점점 말라붙을 거란다. 대안교과서를 준별해줄 중요한 잣대 하나를 그가 짚었다(교과(서) 개편이 쉽지 않은 것이 자기들 교과(전공)의 밥그릇을 따지는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다).

필자가 생각해본 것은 우선 ‘교과 간의 비중’에 관해서다. 문학과 수학, 과학과 사회교과와 역사 교과, 도덕·윤리와 언어(외국어) 가운데 어느 교과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해야 할까. 옛 동아시아에서는 문사철(文史哲)을 꼽았는데 그중에 ‘역사’가 으뜸이다. 역사 과목이 기본이요, 문학과 철학도, 정치학과 경제학도 그 곁가지로 배치돼야 한다.

물론 그 역사는 여태의 역사교과서 같은 왕조사 중심이 아니다. 또, 민족사를 포함한 세계사다(후자의 비중이 훨씬 크다). 민중의 생활상과 문화의 흐름이 자세히 담겨야 한다. 옛 그리스인들은 ‘일리아드·오디세이’, 중세 유럽인은 성경 하나로 기본공부를 다 마친 것처럼 21세기의 우리는 ‘역사책’ 하나로 기본 공부를 끝내야 한다. 이를테면 ‘중세’를 다룬 역사 교과서에는 그 시절의 인문지리와 정치·경제적 변화, 문화와 학문의 발달 양상까지 다 담아야 한다.

역사를 책 네 권에 나누어 담는 것을 생각해 봤다. 2년에 걸쳐 배울 것으로(‘역사 1’과 ‘역사 3’이 분량이 많다. 토막 지식의 나열이 아니어야 하니 1급의 학자가 서술해야 한다). ‘역사1’은 선사시대부터 고대 사회까지를, ‘역사2’는 중세를, ‘역사3’은 근대를, ‘역사4’는 근대를 넘어서려 했던 실패한 사회주의 경험과 인류의 앞날에 대한 전망을 담아낸다. 사회·정치·경제·(인문)지리 4권은 역사 교과를 보완하는 내용으로 설정한다. 이를테면 ’보완‘은 이런 것이다. ’역사 3‘은 자본주의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자세히 서술한다.

“산업자본이 커나가던 19세기 자본주의는 그런대로 진취성이 있었다.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 이론은 그 시대를 반영한다. 20세기 들어 자본의 모순이 깊어지자 국가의 개입이 더 강화됐고(케인즈주의의 출현), 한편으로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부패한 자본주의로 옮아갔다. 20세기 중후반 한때 세계경제는 뚜렷한 불평등 개선을 이뤄내기도 했으나 1800~2000년의 2세기를 통틀어 보자면 자본주의는 사회 불평등을 악화시켜 사회의 불안정성을 높이는 뚜렷한 경향을 보였다. ‘자본주의 너머’를 모색할 때다”

근대 서술의 또 다른 축은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략의 역사다. ‘역사3’은 단순히 침략사만 간추릴 것이 아니라 그것이 피압박 민중의 삶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자상하게 서술하여 학생들이 뚜렷한 교훈을 얻게 한다(프란츠 파농 참고).

한편 경제학 교과서는 단순히 수요공급 곡선을 긋고, ‘합리적 소비 어쩌고···’ 무익한 토막 지식을 늘어놓는 공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주류(신고전파) 경제학의 공적도 헤아려 주되, 사회경제적 위기를 ‘나 몰라라’ 하는 그들의 큰 허물도 예리하게 들춰낼 일이다.

Windsor/England: June 22, 2017: Her Majesty Queen Elizabeth heads to Royal Ascot in a landau carriage as part of the daily procession for the popular horse-racing event.

2008년금융공황이 터지자 영국 여왕이 경제학자들을 나무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런 사태가 터질 때까지 당신들이 경고 보내고 대안을 제시하고 한 것, 하나라도 있습니까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관념은 형이상학적 신념이지 과학이 아니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2008년세계대공황을 전혀 내다보지 못했고, 지금도 자본체제에 그저 안주할 뿐이다.

인간은 정신을 지닌 덕분에 자유를 추구한다

‘역사1’도 잠깐 살피자. 선사(prehistory)와 역사 시대는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리고 선사 부분을 가벼이 볼 일이 아니다. 인류학의 성과를 잘 흡수해서 구성진 이야기로 읊어야 한다. 4000년 전에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생겨난 ‘길가메시 이야기’가 보여주는 사람 됨됨이가 현대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린 선사 부분을 너무 모른다’고 누가 그랬다. 인문학에서 공백으로 있는 이 부분에 무턱대고 ‘사회진화론’ 설명을 들이대서 문제란다. 그는 진화론 갖고 세상을 다 설명하려는 학문제국주의를 ‘다윈염(다윈 전염병)’이라는 신조어로 꼬집었다(마르쿠스 가브리엘의 <나는 뇌가 아니다> 참고).

인류학의 성과는 ‘자본주의 이후’를 찾는 상상력을 북돋는 데에도 요긴하다. “사람은 어떤 특성을 갖는 존재인가(인간학)” 그리고 “고대 사회가 보여주는 인류 사회의 원형은 무엇인가(인류학)”를 역사책 첫머리에 자상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철학’은 무엇을 담아야 하는가.

우선 기존의 ‘윤리’ 교과서가 짐을 싸서 ‘철학’ 동네로 옮겨 와야 한다. 스토아학파가 어떻고, 스콜라철학이 저떻고··· 온갖 철학사를 거기 늘어놓으면 안 된다. 그거, 천문학자 이명현 말마따나 학생 대중의 학문적 호기심을 죽이는 짓이라서다.

몇 가지 근본명제를 중심으로 이를 차분히 성찰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이를테면 “진리는 있는가 없는가?” 학생들이 플라톤의 이야기에서 간추릴 것은 그가 “진리는 있다”고 갈파한 대목이다. “진리는 없다”고 떠드는 학자들이 많았던 20세기 후반에 인류 사회가 얼마나 갈피를 못 잡고 죽을 쒔는지 자상히 알려줘야 우리가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지 학생들이 실감을 얻을 것이다.

또 철학책의 주된 내용은 (칸트에서 헤겔, 마르크스와 사르트르에 이르는) 근대 유럽철학이 탐구해낸 것들이 돼야 한다. “사람은 그 유적(類的) 본질로서 ‘정신’을 품고 사는 생물이다. 그래서 자유를 추구하는 끈덕진 역사를 일구어 왔다”는 메시지가 그것이다(‘유럽’이라 함은 경험주의 흐름의 ‘영미’ 철학과 견주는 얘기다. 그쪽 철학에서도 배울 것이 있지만, 철학의 주된 마루는 유럽(독일+프랑스) 쪽에 있다).

이 메시지를 무심히 읽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 것은 물질(두뇌)뿐, 정신(나) 따위는 없다”고 떠드는 얼치기 과학주의자들이 적지 않아서다. 대다수 민중이 그런 생각에 휘둘리다가는 물질(자본과 인공지능)을 장악한 자들한테 놀아나기에 십상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해서든, 과학에 대해서든 거기 난무하는 뻥구라, 곧 이데올로기를 척결하(고 그 둘의 합리적 핵심을 북돋)는 것이 철학의 주된 임무다(어느 고교생한테 ‘이데올로기’라는 낱말을 아냐고 물었더니 처음 듣는댔다. 비판적 정치의식이 싹튼 학생인데도 그랬다. 한국의 인문사회 교과서가 참으로 한가롭게 서술돼 있다).

긴 역사를 헤아리자는 외침

필자의 공상은 이쯤 멈추고 책 하나를 소개하겠다.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우울한 풍경으로 뒤덮여 있는데 모처럼 기운을 북돋아 주는 얘기가 거기 담겨 있어서다. 제목은 <역사학 선언>. 조 굴디와 데이비드 아미티지가 함께 쓴 책(한울아카데미 펴냄)인데 둘 다 미국의 역사학자다.

<역사학 선언> 조 굴디와 데이비드 아미티지 지음 / 한울아카데미 출판

두 저자는 역사학자들이 ‘짧은 역사’만 들이파서 살피는 ‘단기주의’의 역사 접근에서 벗어나자고 줄곧 부르짖는다. ‘단기주의’라 함은 한 세대(30년) 이내의 사회 변화만 집중해서 살피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자면 어느 박사과정 대학원생이 (영국의 청교도혁명을 주도한) 올리버 크롬웰(1599~1658년)의 사상과 실천 모두를 알아보려고 했다. 지도 교수가 면박을 준다.

인마, 그렇게 거창하게 살펴서야 어디 논문이 통과되겠어? 범위를 좁혀! 그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연합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느냐, 라는 좁은 주제로.

이렇게 단기간의 세상 흐름만 살피는 공부법은 미국(과 유럽)에서 1970년대부터 뚜렷해졌다고 한다. 자본주의에 근본적으로 맞서는 사회세력들이 움츠러들어 ‘거대 서사(큰 이야기)’가 시들어간 시대 흐름의 결과다.

역사학은 본디 어떤 학문인가? ‘백년지대계’를 내다보는 학문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정치인들이 ‘긴 앞날’이 궁금해지면 역사학자를 불러다 물었다. 그런데 “세상이 이제는 크게 바뀔 일이 없다”는 흰소리가 시끄럽게 세상을 뒤덮었으니 민중이나 정치인들이 누구한테 지혜를 구했겠는가? “시장경제는 무너질 리 없다”는 신앙으로 똘똘 뭉친 경제학자들이 발언권을 누렸지. “시장이 안정(균형)을 찾는 것 말고는 중요한 일이 없어!” 그러니 좁은 주제밖에 들이파지 않는 역사학자들이 무슨 권위 있는 의견을 내세울 가능성은 점점 사그라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시절인가? 생태계 파괴(지구 온난화, 물 부족···)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우리는 30년 뒤, 50년 뒤를 걱정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경제불평등이 악화해 가는 추세라면 1929년대공황과 앞날이 불투명한 지금의 세계 경제를 견주어 살펴야 한다.

인류가 쫄딱 망할지, 아니면 눈먼 자본축적의 동력에 의해 휘둘리는 지금의 사회체제를 ‘지속가능한 것’으로 바꿔낼지, 큰 갈림길에 맞닥뜨려 있다. 먼 과거를 되살펴 긴 앞날을 예비해야 할 필요가 어느 때보다도 커졌다(‘긴 흐름’ 연구가 중요한 사례. 쿠즈네츤가 하는 작자가 20세기 중후반만 똑 떼어내서 ‘자본주의는 불평등을 줄이는 체제’라고 떠들었는데 최근 피케티가 200년간의 통계를 들이파서 그 허구를 밝혔다).

전 세계 역사학자들이여, 단결하자!

저자들에 따르면 다행스럽게도 21세기 들어 옹졸한 역사학에서 벗어나려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단다. 2008년금융공황으로 세계경제도 하 수상해지고 기후변화의 미래도 심상찮아 졌으니 역사학자들의 변화가 당연히 시작됐을 게다.

두 저자는 (우리도 마찬가지이지만) 지금의 인류 사회가 놓여 있는 지평을 무척 불안스럽게 바라본다. 미래에 몰아닥칠 온갖 위험을 인류가 헤쳐나가려면 커다란 학문적 각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사명감을 책의 맨 끄트머리에 짤막하게 읊어 놨다.

세계의 역사학자들이여, 단결하라! 더 늦기 전에 거둬야 할 세계가 있다!

물론 이것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자 선언’을 본뜬 말이다. 모처럼 결기 품은 학자의 글을 만나 반갑다(‘빅데이터’가 쏟아진 덕분에 역사 연구가 더 수월해졌다는 그들의 진단은 좀 더 저울질해 봐야 한다).

보태는 말 : 필자는 두어 줄만 끄적거린 날라리노·날라리아들을 칭찬해 주고, 한참 헛수고한 범생이들을 꼬집었다. “시는 제 마음을 최대한 압축해서 나타내야 함축미를 얻지? 그런데 이 시는 제목에서 긴 얘기를 이미 해줬단다. 그럼 본문은 짤막하게 써도 괜찮겠지? 이를테면 단 한 낱말로 ‘안녕!’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