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른에게, 언제나 무한의 ‘0’

[리뷰] 영화 <나의 서른에게>

안녕하세요. 글 쓰는 ‘서연’입니다.

다른 어떤 나이대의 시작점보다 소리만 들어도 가슴 한 켠이 뭉클하게 젖어오는 것이 서른입니다. 아직 어린 싹을 닮은 연둣빛의 십대도, 어떤 색을 빌려와도 하트를 닮은 핑크빛이 되는 이십대의 스물도 새로운 문을 여는 시작인데 삼십대는 하루만큼 멀어지는 젊음, 설렘보다는 체념이 짙어지는 감정을 매일 몸과 마음으로 부딪혀 견뎌내야 하므로 이전의 문을 닫는 끝인 것처럼 여겨지는 까닭인 것 같습니다.

국민 명곡이 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라는 노랫말 속에도 멀어지고, 사라지는 청춘을 아쉬워하는 감정이 들어있고요. 이 시대의 여자들에겐 결혼, 점차 줄어드는 가능성과 기회의 문제가, 남자들에게 역시 결혼과 더불어 부과되는 책임감과 부담감의 문제가 있을 겁니다.

이런 공감 때문에 멀리서 관조하듯 바라볼 십대들에게도, 목전에서 각오 단단히 하고 있을 이십대들에게도, 지나온 시절을 무심하게, 또는 애잔하게 돌아볼 삼·사십대들에게도 서른은 그래서 주목받는 나이이기도 합니다. 이번 주는 서른이라는 나이에 대해서 영화 <나의 서른에게>를 통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영화 <나의 서른에게> 포스터

원작은 <29+1>이라는 제목의 연극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서른이라는 나이를 코앞에 두고 있는 두 여성, 임약군과 황천락의 모습은 판이합니다. 영화는 이 두 사람을 비교하면서 서른이라는 나이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고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먼저, 임약군은 빡빡하지만 번듯한 직장, 시들하지만 안정적 연애, 이제 곧 꺾이겠지만 꽤 예쁜 외모를 갖춘 커리어 우먼이에요. 열심히 잘 해왔고 앞으로도 열심히 잘 해나갈 테지만 서른이라는 나이가 주는 무언의 압박은 그녀에게 크게 다가옵니다. 수면 아래 바쁘게 발을 놀리는 백조처럼 서른을 여자 나이의 끝으로 여기며 조급해하죠.

반대로 황천락은 소박하지만 좋아하는 음반이 가득한 레코드 가게가 일터이고, 짝사랑의 기억만 가진 솔로이고, 뚱뚱하고 평범한 외모의, 뭐 하나 이룬 것이 없는 여성입니다. 게다가 서른을 앞둔 지금,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요.

이렇게 삶에서 이룬 성취가 다르고 그에 대한 태도 역시 예상과 또 한 번 다른 두 여성을 확연하게 대비시켜 놓은 영화의 스토리는 아주 쉽게 읽힙니다.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시시한 느낌이 들게 할 수도 있지만 말했듯 공감이라는 요소는 모두의 마음을 울리는 것 같습니다.

늘 열심히 살아왔던 임약군은 잠시 휴식기를 갖게 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자 친구와 이별하고, 잠시 거처할 곳이 없어진 때에 황천락의 집에 들어가 살게 돼요. 황천락이 암 소식을 듣고선 꿈에 그려왔던 프랑스 파리로 여행을 간 사이였습니다.

황천락의 집엔 소소한 일상을 기록하는 일기장, 매일의 풍경을 찍은 사진들, 좋아하는 음반과 책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녀에게 행복은 멀리서 날아오길 기대하는 대단한 보석이 아니라 곁에서 찾아 모을 수 있는 작은 풀잎과 같은 것이었던 거죠. 그래서 같은 시기에 같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황천락의 사랑은 비로소 시작됩니다. 암을 알게 되고 베스트 프렌드에게 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매일 죽음을 향해 걸어가니까 남은 기간이 얼마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면 되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행복했던 모든 순간을 기억하는 거지.

삶은 다 살아야 그 가치를 말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불행으로만 보이는 상자가 훗날엔 희망이 되는 내용을 감싸고 있을지는 그 상자를 열어봐야만 아는 것이겠지만 순간순간의 총합이 인생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오늘 없는 내일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황천락의 선택은 옳아 보입니다. 그녀의 태도는 예뻐 보이고요.

모든 꿈의 시작은 ‘0’이다

10살의 0은 무엇도 말할 수 없는 ‘0’, 가장 0다운 ‘0’일 것이고, 20살의 0은 확신할 수 없는 ‘0’, 흔들리며 가는 ‘0’일 것이고, 30살의 0은 한 세계가 닫히는 ‘0’, 흔들리면서도 아닌 척해야 하는, 차라리 주저앉아 체념해야 하는 ‘0’일지도 모르지만 삶은 그 어떤 나이에도 ‘0’, 언제나 무한의 ‘0’일 것입니다. 끝은 끝 이후의 시작과 같은 말이고 그러므로 40의 0도, 50의 0도, 60의 0도 꿈꾸는 ‘0’, 새로운 ‘0’입니다.

영화의 내용보다 무엇을 보고 어떻게 느꼈느냐가 중요하듯이 서른에 대한 통념보다 그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고 어떻게 대할 것인지가 중요할 것입니다. 거대한 행복의 관념 대신 소소한 기쁨의 실체들을 모으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으며, 오늘도 에펠탑만큼 높은 꿈의 조각들을 영화 속에서, 책 속에서, 풍경 속에서, 글 속에서 모으고 모아 무한의 ‘0’을 사는 서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