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먼로의 ‘누군가의 장난도 멋진 운명이 되게 하는 삶의 마법’

[리뷰] 앨리스 먼로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안녕하세요. 글 쓰는 ‘서연’입니다.

최근 낮 산책을 잠깐 즐겼습니다. 작가로 살면서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하늘을 봐야 하지 아닐까, 자연의 신호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작은 삶에도 크게 감동하는 자세를 잃지 않도록 더 애써야 하지 아닐까 하는 마음에 밤마다 산책을 즐겨왔는데요, 아무래도 한낮의 하늘은 바라보기엔 너무 눈부셨기 때문이에요.

환하고 분주한 삶의 한복판에서 오롯한 자아를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해서 밤 산책만 즐기다 보니 높고 푸른 하늘도, 노란빛 낙엽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 같아서 작정하고 조금 멀리 돌았습니다. 나뭇잎 새로 비춰오는 햇살이 살짝 찡그린 얼굴 위에 떨어져 내릴 때의 따뜻함이 좋아 잠깐 나무 밑에 서 있기도 해보았습니다.

잔잔한 바람결에 흔들린 나뭇잎이 하늘에서 춤을 추듯 내려와 신발코에 ‘톡’ 앉는 순간, 마음도 ‘쿵’ 함께 내려앉더라고요. 떨어져 앉은 노란 낙엽이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거창하게 말하면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것 같았거든요. 허리를 굽혀 신발코에 내려앉은 작은 낙엽을 주워 두 손가락 사이에 끼고 돌려봤어요. 낙하하는 나뭇잎의 무거운 의미에도 불구하고 날개처럼 핑그르르 돌아가는 몸짓이 앙증맞아 빙그레 웃고 말았습니다.

영화로도 제작됐던 앨리스 먼로의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은 작가 특유의 정제된 언어와 차분한 감성으로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가장 운명적인 사건을 묘사한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앨리스 앤 먼로(1931년 7월 10일~)는 캐나다의 영어권 소설가다. 2009년 맨부커 국제상, 201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먼로 소설의 주요 모티브는 그녀가 나고 자란 온타리오주 서남부 휴론 시골지역의 생활상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떠남>,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등이다. 편집자주

앨리스 먼로의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주인공 조해너는 아주 불운한 삶을 거쳐온, 지금은 맥컬리씨네 가정부입니다. 맥컬리씨는 죽은 딸인 마르셀에 대한 상처를 안고 있는 노인으로 손녀인 새비서마저 이모가 있는 토론토로 떠나보내야 하는데 이번에는 조해너가 그의 심기를 건드립니다.

조해너가 그의 집을 떠나겠다는 메모를 남긴 것이 죽은 딸의 남편, 즉 사위인 켄부드로의 꼬임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조해너는 딸, 마르셀이 당시 공군 장교였던 켄부드로와 눈이 맞아 도망가며 결혼할 당시 샀던 가구를 죄 들고 또 한 번 도망이라는 형태로 그를 배반한 셈인 거죠.

게다가 사위는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마다 그에게 돈을 빌려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가구를 담보로 돈을 빌려달라는 편지를 보내놓고는 가정부와 내통해 뒤로 가구를 빼돌린 것을 알게 됐습니다.

새비서의 조숙한 친구 이디스가 조해너의 소식을 듣게 됐을 때, 그녀는 섬뜩해지는 기분을 느낍니다. 조해너의 떠남과 그 후 남은 운명이 바로 영특한 이디스의 작은 장난으로 시작됐던 것이었으니까요. 아빠와 새비서가 주고받는 편지 속에 조해너의 편지도 들어있다는 것을 발견한 게 시작이었어요.

조해너가 편지 속에 적은 글들이 켄부드로를 향한 사랑의 속삭임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두 소녀는 아빠의 반응을 기다려보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아무 답장도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가짜 편지를 작성해 조해너에게 배달합니다.

조해너가 아빠에게 쓴 편지는 찢어 버리고 아빠의 답장을 가짜로 작성하고 그렇게 몇 차례 계속되는 동안 결국 일이 터져버린 것이죠. 상황이 극도로 안 좋았던 켄부드로는 받아야 하는 빚 대신에 호텔을 인수하게 됐다는 소식을 마지막 편지에 적었고 조해너는 그곳으로 떠나버렸습니다. 가짜 편지에 적힌 그의 사랑을 확신하고서요.

영화로 제작된 <미워하고 사랑하고>

그녀가 도착한 마을은 막막할 정도로 정비되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의 호텔을 어렵게 찾아 들어가 보니 그는 잠들어 있었습니다. 곧 들려온 심상치 않은 기침 소리와 뱉은 가래 색으로 그가 아프다는 것을 알게 된 조해너는 정성껏 간호합니다. 열을 내리고 약을 먹이고 음식을 만듭니다.

의식이 없던 그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면서 그녀가 누군지 간신히 기억해내고 의아해하는데, 그것도 잠시 그녀가 분주한 사이 그녀 가방 안에 든 지갑과 통장의 돈을 발견하게 되면서부터는 그녀의 존재를 다르게 느낍니다. 그의 형편이 안 좋았던 만큼 하늘이 보내준 선물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녀는 너무도 불우한 삶을 살아왔기에 웬만한 역경은 헤쳐나갈 힘이 있었어요. 그를 간호할 수 있었던 것도 월레츠 부인을 간호해본 이전의 경험 덕이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그가 가진 모든 난관에 대해서도 현실적인 해결안을 가진 여자였습니다.

뭔가 새로운 변화를 내부로부터 감지할 수 있었다. 바로 이게 내게 필요한 변화였어. (중략)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

사실 아귀가 맞지 않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녀가 가져온 가구는 그녀에게 부탁한 적 없던 그의 물건이었고 심지어는 그것을 담보로 장인에게 돈을 요구하던 입장이었으니까요. 그보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에겐 의문이었죠. 이름조차 희미한, 존재감 없는, 그저 가정부에 불과한 여자였으니까요. 그러나 상황은 감정을 만들고 감정은 운명을 만듭니다.

2년 후 맥컬리 씨의 장례식에서 만난 새비녀와 이디스는 서로에게 말을 건네지 못해요. 아마 과거의 그 일 때문이었겠죠. 장례식에는 켄부드로와 그의 아내인 조해너, 그들의 어린 아들 오머도 참석했는데 이디스는 그 일에 대한 두려움은 더 이상 없더라도 다만 왜 아직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는지는 궁금해합니다. 그리고 새 생명, 오머에 대한 책임을 애써 덜어내며 일기장에 이렇게 적습니다.

알 수도 없고, 물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서늘한 만족감에 한 줄 더 적어 넣습니다.

내 앞에 그리고 너의 앞에 어떤 운명이 가로놓여 있는지를···

사실 소설은 아이들의 장난질에 불과한 편지가 한 여성의 불행한 삶을 멋진 결말로 바꿔주는 이야기입니다. 제목인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은 이름 속 모음과 자음의 획수로 서로 간의 궁합을 점치던 소녀들의 놀이인데요, 사람의 운명이라는 게 그렇다는 거죠. 장난처럼, 놀이처럼, 본인의 의지보다도 점치는 누군가의 손길로, 겨우 한 획 차이로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깊숙이 들여다보면 정답에 가까운 삶의 지혜가 숨겨져 있습니다.

영화 <미워하고 사랑하고>에서 켄부드로와 조해너

조해너의 삶은 말할 수 없이 초라하고 불행했지만, 그녀는 고통의 길을 정면으로 뚫고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차곡차곡 모은 통장의 돈처럼 고통을 통해 얻은 힘을 그녀 안에 쌓았습니다. 그런 자신을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긍정하는 본능이 있었기에 지금껏 어떻게든 살아왔던 겁니다.

삶은 그런 사람에게는 누군가의 장난도 멋진 운명이 되게 하는 마법을 펼쳐 보여 줍니다. 삶의 본질이 고통이라면 고통의 본질은 그것을 견뎌내고 남은 힘이거든요. 그 힘은 유전자처럼 어쩔 수 없이 내 안에 각인됩니다.

가벼운 한 자락 바람에도 나뭇잎은 나무에서 떨어져 내려와 낙엽으로 운명을 바꿉니다. 아이들의 장난이 조해너를 기차에 태워 켄부드로에게 보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더는 나뭇잎이 아닌 낙엽의 운명은 땅에 있습니다. 아직 내려오는 동안엔, 혹은 신발코에 붙어 있는 동안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심오한 뜻을 인간에게 보여주기도 하고요.

봄날엔 향긋한 꽃 내음을 맡고 여름엔 세찬 빗소리를 듣고 가을엔 서늘한 바람을 뚫고 겨울엔 세찬 눈보라를 맞으며 각 시기마다 삶의 본질인 고통을 살아낸 모든 인간에게 삶은, 고통은 종국에는 고통보다 더 큰 힘을 운명이란 이름으로 선물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디스의 말처럼 아직 물어서는 안 돼요. 다 살아낸 것이 아닌 이상은 내 앞에 어떤 운명이 놓여있는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두려움에 불과할 고통 앞에 망설이며 내게 올 가장 멋진 날들을 유보하지 않기를, 아무것도 아닐 고통을 다 겪어낸 후에야 보일 하늘의 선물들, 더 커다란 나를 기대하기를 오늘도 높고 푸른 하늘을, 떨어지는 나뭇잎을, 신발코에 붙은 낙엽을 가슴갈피에 고이 넣어둔 채 소원하는 서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