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폭력의 피해자였지만 안티페미니스트입니다”

어느 캐나다 여성의 이야기

현재 한국형 급진 페미니즘의 가장 큰 문제는 여성의 무조건적인 피해자화와 남성에게 씌우는 무조건적인 여성혐오, 가해자 프레임일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오직 이 두 개의 좁은 구멍으로만 세상을 바라본다. 이들에게 모든 갈등과 폭력은 여성에 대한 혐오로 가득한 남자들 때문이고 여자는 오직 선량한 피해자일 뿐이다.

양예원 사건과 홍대 몰카 사건, 그리고 최근에 벌어진 이수역 사건이 이들의 이런 시각을 잘 보여준다. 이 사건 속에서 여자들은 대중을 상대로 거짓말을 했고 남자들을 모함했고 불법 촬영 및 누드 사진 유포라는 범죄까지 저질렀다.

5월 19일 혜화역 시위에서 등장한 홍대 몰카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피켓

그러나 페미니즘은 여자들의 이런 비도덕적이고 개념 없는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멀쩡한 수사를 편파로 몰고, 남성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가하고, 있었는지 없었는지 따져봐야 할 폭력, 성폭력을 남자의 잘못으로 몰고 갈 뿐이다. 이들에게 여자는 무슨 짓을 해도 힘없는 피해자이고, 남자는 어떤 속사정이 있어도 폭력적인 가해자다.

페미니즘의 목표가 정말로 여성해방이라면, 이런 식의 운동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성에게 피해의식을 심는 것이 어떻게 여성해방이 될 수 있는가? 페미니즘에 동조하는 여자가 늘면 늘수록 해방되는 여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피해자라고 믿는 여자가 늘어날 뿐이다. 페미니즘은 주체적인 여성이 되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라 피해자의 대열에 동참하라고 여자들을 선동하고 있다.

더욱더 나쁜 것은 페미니즘이 여성의 행동에 대한 면죄부를 준다는데 있다. 대중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남의 벗은 몸을 불법 촬영하고, 공공장소에서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의 성기 크기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할 희롱을 한 사람에겐 그 행동에 대한 법적, 도덕적, 사회적 책임이 따라야 한다. 이것은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다. 피해자가 된다고 해서 이런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런데 페미니즘은 여자는 피해자이기 때문에 이 모든 책임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가르친다. 피해자의 틀에 숨어 자신의 모든 잘못에 대해 발뺌하라고 가르친다. 이런 식으로 책임을 부인하는 행동은 진정한 자아성찰과 성장의 기회를 방해한다. 페미니스트 개개인의 성장도 방해하지만, 페미니즘 자체의 성장도 방해한다. 어떤 잘못도 인정하지 않고 어떤 비판도 수용하지 않는 이념이 어떻게 성장할 수 있겠는가.

페미니스트들이 내미는 피해자 카드는 자신들이 저지른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고 책임에서 벗어나게 한다

아래에 한 캐나다 여성의 글을 소개한다.

로즈 마리 파라디는 끔찍한 폭력의 피해자였지만 스스로 피해자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페미니스트들이 수없이 그녀를 세뇌하려 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안티페미니스트가 됐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녀가 여자라서 피해자가 됐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접근방식은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직 스스로 자신의 어리석음과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면서부터 진정한 변화가 시작됐다. 안티페미니스트가 되면서 그녀는 여성으로서 해방됐고 인간으로서 더 지혜로워졌다.

로즈 마리 파라디의 글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남성권리 운동가로 활동해왔다. 사회운동에 참여하면서부터 사람들은 나를 페미니즘으로 세뇌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에는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그 반대편에 섰다.

그렇다고 내가 여성의 권리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자이고, 정치적으로도 보수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페미니즘 운동에 반대한다. 내가 겪은 일을 안다면 나의 이런 결정이 비논리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먼저 나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겠다.

나는 여섯 살 때부터 열일곱 살 때까지 또래 집단에서 괴롭힘을 당했다. 이로 인해 경계성 인격장애를 앓았고 폭력을 정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후로 폭력적인 남자들을 전전했다. 그중에는 나를 구타하고 심지어 갈비뼈 두 개를 부러뜨려 경찰을 불러야 했던 남자도 있었다.

첫 남자친구는 나를 강간했다. 그는 내가 아프다고 울부짖어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몇 달 동안 섹스를 할 때마다 통증을 견뎌야 했다. 세 번째 남자 친구는 한 해 동안 무려 살이 56㎏ 쪘고 내가 이성적으로 그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자 나에게 폭력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숨을 못 쉬게 했고 도망치자 다시 붙잡아 목을 졸랐다. 나에게서 돈도 빌려 갔지만 갚지 않았다. 이후로도 몇 명과 짧고 지독한 관계를 맺은 후, 최악의 남자를 만났다. 그는 폭력과 학대와 절도의 이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경찰을 피해 도시에서 도시로 도망 다니다가 내가 사는 지역에 왔다.

나도 그의 희생양이 됐다. 그는 한동안 나에게 얹혀살다가 내가 도움을 주지 않자 떠나버렸다. 내 물건도 훔쳐 갔다. 나는 대학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자살 충동까지 느꼈었다.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다른 남자를 만났지만, 그 역시 나를 때렸다. 적어도 이 남자는 법정에 서게 되었다. 만약 언젠가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면 아마 이 남자일 것이다.

이제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을 알았으니 여러분은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오히려 페미니스트들은 내 문제를 형편없이 다루었다. 오랜 학대에서 벗어나 내가 내린 결론은 아래와 같다.

1. 페미니즘은 여성을 피해자화하고 남성을 본질적인 악으로 설정한다.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생각하면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게 된다. 페미니즘은 언제나 남자의 폭력과 그들의 잔인한 남성성을 강조하면서 그들을 교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정신과 상담을 통해 배운 것은 스스로를 이런 상황에 빠뜨린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었다. 폭력이 내 책임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런 남자들에게 끌린 나에 대해, 그런 남자들을 끌어당긴 나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힘을 부여하는 운동이라고 주장하지만, 여성들이 내린 선택과 행동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물론 일부 경우에는 누구의 책임도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나처럼 반복되는 학대에는 반드시 공통분모가 있다.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런 남자들에게 끌리고 그런 남자들에게 나약했던 나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자 비로소 반복되는 사이클을 멈출 수 있었다. 지금 나는 아주 좋은 남자와 사귀고 있다.

한 여성이 페이스북에 올린 페미니즘 반대 선언문. “나는 페미니즘이 필요 없다. 왜냐하면 나의 자아존중감은 피해자 콤플렉스의 크기와 직접 연결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서양 세계의 여성으로서 나는 억압 받지 않는다. 당신도 마찬가지다!”
“나는 페미니즘이 필요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내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어른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기준으로 나 자신을 정의하고 나의 가치를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페미니즘에 의해) 힘을 부여받을 필요가 없다. 나는 남자를 존중한다. 나는 그들을 악마화하고 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 남자들을 비난하는 것을 거부한다”

2. 나의 폭력 사건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결론은 한결같았다. 내가 여자이고 그들은 남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가난하고 남들과 다르고 건강이 나빠서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에 쉽게 피해자가 된 것이다. 남자아이들 중에도 나처럼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나를 가해한 사람들이 다 남자인 이유는, 내가 사귄 사람이 다 남자였기 때문이다.

3. 페미니즘은 학대당하는 남자들에 대해서는 부정한다. 인정하더라도 가해자는 항상 남자라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의 캠페인을 보면 언제나 여성이 피해자다. 여성 가해자와 남성 피해자를 다루는 경우는 거의 볼 수 없다. 내가 다니는 대학의 사회복지학과 과정에서도 여성은 피해자고 남성은 가해자라고 가르친다. 남성을 위한 프로그램은 그들에게 가해자가 되지 말라고 교육하는 것뿐이다.

4. 페미니즘은 여성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여성이 가해자인 사건에는 아예 주목하지도 않는다. 나는 정신적 학대도 엄청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신적 학대는 더 심한 학대를 포함한다. 즉, 경제적 학대, 육체적 학대, 그리고 아무도 얘기하지 않지만, 아이들을 빼앗아가겠다는 위협까지 포함된다. 이것은 법이 주목하지 않는 학대다. 법이 주목하는 학대는 육체적 학대에 제한된다. 물론 남자들이 육체적 학대를 더 많이 행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이들을 빼앗겠다는 협박은 여자들이 더 많이 한다. 양육 분쟁의 60%에서 여자들이 독점적 양육권을 가져간다. 남자들에게 독점적 양육권이 허락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육체적 학대는 끔찍하다. 하지만 정신적 학대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실제로 더 오래 상처가 지속하는 것은 정신적 학대다. 학대에서 벗어난 지 2년이 되었고 내 몸은 이미 회복했지만 나는 아직도 정신적 학대에 대한 악몽을 꾼다.

5. 페미니즘은 폭력에 있어서 여자들이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남자들이 당하는 폭력은 알려지지도 않았고 불법도 아니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당하는 폭력에 대해서는 도움도 없고 심각하게 바라보는 전문가도 없다. 내가 사는 곳에서 남자 피해자들이 머물 수 있는 보호소는 단 1곳밖에 없다. 개인이 운영하는 곳이고 수용인원도 겨우 100명밖에 되지 않는다. 두 개 도시를 합쳐도 4개 보호소가 전부다. 반면에 여성 보호소는 지역마다 적어도 1곳씩 있고 수용인원이 1천 명이 넘는다. 내가 폭력을 당했을 때 나의 주장은 그대로 받아들여졌고 보호소와 물품 지원, 심리상담, 심지어 그룹 상담까지 많은 도움이 열려있었다. 경찰은 남자친구에게 나의 폭력 여부를 묻지도 않았다. 그냥 여자가 피해자인 것이 디폴트값이었다. 페미니스트들이 내놓는 통계에서도 가정폭력의 피해자는 남성이 30, 여성이 60으로 나온다. 그런데 공공 지원은 남성은 0, 여성은 100이다. 더 나쁜 것은 보건부 통계에서 일부 지역은 남성이 피해자인 경우가 60%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빼앗길까 봐 관계를 지속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남성 피해자들은 남성 가해자 그룹에 들어가 심리 상담을 받는다. 이것이 그들이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도움이기 때문이다. 남성 피해자도 여성 피해자와 똑같은 처지에 놓인다. 그런데 왜 똑같은 도움을 받지 못하는가? 남성 피해자의 수가 훨씬 적다 해도 한 명의 학대당한 남성은 한 명의 학대당한 여성과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남성 보호소의 필요성을 홍보하는 미국의 남성권리단체 ‘보이스 포 맨’의 포스터. 미국에 있는 92%의 보호소가 여성 전용이다. 8%는 일부 남자와 남자아이의 입장을 허용한다. 남성 전용 보호소는 0%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며, 소극적인 안티페미니스트도 아니다. 나는 아주 적극적인 안티페미니스트이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6. 나는 차별에 반대한다. 이것은 내가 그냥 무신론자가 아니라 종교에 반대하는 것과 같은 이유다. 나는 백인우월주의에 반대하며 노예주의에 반대한다. 나는 차별하는 모든 이념에 반대한다.

7. 페미니스트들은 국가가 도와주지 않는 남성 피해자들을 남성이 도와주는 것조차 훼방 놓고 있다. 도와주기 싫으면 적어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가.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보호소에 대해 아무런 권리가 없다. 그곳은 페미니스트들이 간섭할 공간이 아니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보호소가 남성 권리 이론을 가르친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들도 여성 보호소에서 페미니스트 이론을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남성들이 같은 일을 하는 것에 대해 화낼 이유가 없다. 페미니즘은 평등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완전히 반대다.

번역된 글의 원문은 ‘Women Against Feminism’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