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화해, 구원의 이야기 ‘어톤먼트’

[리뷰] 영화 <어톤먼트>

안녕하세요. 글 쓰는 ‘서연’입니다.

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인 친구 집에 오랜만에 놀러 간 일이 있었습니다. 훌쩍 자란 두 딸 아이들이 눈앞에서 장난치며 웃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다가 우리도 어릴 때 별일 아닌 일에 저렇게 까르르 넘어가곤 하지 않았느냐며 회상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웃다가도 금세 토라져 한동안 얼굴도 안 보지 않았느냐며 그 시절의 미성숙한 유치함, 어리숙하고 어린 이기성도 떠올라 아이들과 함께 한바탕 크게 웃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꼭 그때의 우리처럼 아이들도 어느샌가 싸우고 있더라고요.

똑같이 닮은 그 상황이 우스우면서도 꽤 심각해 보여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들여다보니 먼저 잘못한 큰 애가 쭈뼛쭈뼛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더라고요.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언니가 던진 물건에 몸을 맞은 둘째 아이는 엄마 품에 안겨 우는 시늉을 하며 고자질을 해대고요.

엄마가 추궁하자 큰 애는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외려 더 당당해지려고 애쓰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엄마 친구인 내가 없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사과해 상황이 금방 가라앉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누군가의 앞에서 잘못을 시인하는 일이란 예나 지금이나, 어른이나 아이나 어렵고 수치스러운 일이니까요. 큰 애가 어떻게 상황을 풀어갈까 싶어 안보는 척하면서 마음을 두고 있었어요. 큰 애는 큰 애대로 억울함을 하소연하며 화를 내더니 방문을 쾅 닫고는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때의 우리도 그랬습니다. 마음 한 켠에서는 미안함이 올라오는데 다른 친구들의 시선과 입에 오르내릴 말들이 더 두려워 사과 대신 자존심을 선택했던 거죠. 잘못된 선택은 다시 같은 반이 될 때까지 2년이란 시간을 어색하고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다 다시 같은 반이 되지 않았더라면, 다시 같은 중학교에 배정받고 어른이 돼 다시 만나게 된 계기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아마 크게 갈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아찔해지기까지 합니다. 그 친구는 제 생에 아주 소중한 연이자 정말로 고마운 은혜를 입은, 몇 안 되는 내 사람이거든요.

영화 <어톤먼트> 포스터

영화 <어톤먼트>를 보게 된 계기는 영상미나 스토리, 배우와 감독, 잘 알려진 원작 소설에 대한 기대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습니다. 그쯤 속죄를 의미하는 ‘Atonement’의 어원과 관련한 작은 원고 하나를 작성하고 있었거든요. ‘At’+‘One’+‘Ment’의 합성어로 속죄의 또 다른 의미는 화해이자 하나 됨이라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의 영국을 배경으로 합니다. 부유한 가문의 딸 세실리아와 브라이오니는 가정부의 아들인 로비에게 꽤 친밀한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신분 차이로 인한 거리를 유지합니다. 특히 세실리아와 로비는 특별히 서로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브라이오니가 멀리 떠나게 되는 날의 밤, 잘못 전해진 그의 편지로 인해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세실리아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합니다.

네가 멀리 떠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내가 얼마나 나 자신에 무지했는지. 얼마나 바보였는지.

그러나 마침내 확인한 그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브라이오니는 어린 판단이었는지, 묘한 질투심이었는지 친척인 롤라를 탐한 사람이 바로 로비라는 잘못된 증언을 섣불리 해버립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전쟁터에 끌려가게 되고 둘의 사랑, 운명은 그렇게 갈립니다.

세실리아는 로비가 전쟁터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간호사로 일하게 됩니다. 그들 사이에 놓인 시대적 환경과 가문의 차이와 운명적 사건은 넘기 높은 벽이었지만 잠깐의 재회와 서로를 향한 약속, 그 모든 기억으로 전쟁의 시간을 버티죠.

이야기는 계속될 수 있어. 우리 이야기는 (중략) 돌아가서 너를 찾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부끄럼 없이 살겠어.

한편 이제 숙녀로 자란 브라이오니는 자신의 잘못을 그제야 서서히 깨닫습니다. 그녀 역시 언니처럼 간호사로 근무하며 그때의 그 사건을 소재 삼아 습작을 하는데요. 동료인 다른 친구가 묻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떤 바보 같은 소녀의 이야기야. 이해하지 못하는 걸 보는데 자기는 이해한다고 생각해.

어렸다는 이유가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수도 있을 만한 증언이었으니까요. 그때 그 사건의 중심에 놓인 롤라는 그녀를 범한 사람인 폴 마샬과 결혼합니다. 1940년, 브라이오니는 언니 세실리아를 찾아가고 마침 그녀의 공간에 와 있던 로비까지 세 사람은 재회하게 됩니다.

영화 <어톤먼트> 중 로비와 세실리아

그런데 이 장면부터는 브라이오니의 소설 속 일부일 뿐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로비는 후송 작전의 마지막 날 패혈증으로, 세실리아는 지하철역 가스와 수도관에 투하된 폭탄으로 죽은 후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속죄를 이야기로 풀어 책에서나마 그들이 잃었던 것들을 되찾게 하고 싶었던 거죠. 후대들의 기억 속에 그들이 영원한 행복으로 남을 수 있도록요.

이것이 나약함이나 회피라고는 생각 안 해요. 제 마지막 친절입니다. 저는 그들에게 행복을 선사한 거에요.

이 소설은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됩니다. 실어증, 기억 상실증이 오는 혈관성 치매에 걸렸거든요. 영화 관람객들의 평을 읽는 습관이 있는데 대부분은 브라이오니의 속죄를 문제 삼고 있었습니다. 잘못을 시인조차 하지 않는 누군가를 미워하며 괴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 용서와 관련된 한 문장을 듣고서야 겨우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는데요.

용서는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말이었어요. 감정이 사는 마음이 곧 내가 사는 온 세상인데 내가 괴로우면 그것만 한 지옥은 없는 거라고요. 지금은 아프지만, 시간이 지나면 분명 둔감해지고 멀리 그림 보듯 이 상황을 보게 될 날이 올 거라고요.

그와 반대로 내 작은 실수가 누군가를 크게 힘들게 하는, 더 괴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도 있었습니다. 또 모르죠. 알게도 모르게도 내가 저지른 수많은 실수와 악행이 더 있을지도요. 그때는 용서와 관련된 또 다른 문장에서 위안을 받았습니다.

진심으로 뉘우치는 가해자의 죄의식 어린 마음을 피해자가 이해하고 용서해줄 때, 진정한 의미의 화해는 이뤄지는 거라는 말이요. 그때 처음 속죄라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그 화해는 구원이라는 깨달음도 왔습니다.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 용서라는 커다란 단어와 그에 비견할만한 무거운 상황들 앞에 감히 무엇을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는 마음, 함부로 끝맺지 않는 마음이 우리를 다시 이어주고 살게 해줄 것이라는 희망 역시 쉽게 끊어버리지는 않는 마음일 뿐입니다.

질투심에 의한 거짓 증언으로 두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 브라이오니

영화 속 브라이오니의 행동을 모두 다 이해하고 역성드는 입장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훗날 작가로서의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마도 이야기로 계속 그들을 만나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결혼하게 하는 일이었을 겁니다. 로비가 했던 말처럼 그들의 이야기가 계속될 수 있도록.

친구 집에서 돌아온 날 밤 카톡으로 물어봤어요. 큰아이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친구의 답은 이랬습니다.

뭐 뻔하지. 무슨 일 있었냐 싶게 화해하고 웃고 그러다 또 싸우고. 다만 야단은 쳤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고. 지킬런가 모르겠다. 육아하는 삶은 전쟁이야. 미스는 미스의 삶을 즐기도록 해. 오랜만에 정말 반가웠어.

아이들이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때로는 실수도 하겠지만 실수를 인정하는 용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아 더 먼 길로 돌아가지 않는 현명한 숙녀들로 자라길 바랍니다. 전쟁 같은 삶 속에서 서로를 향한 화해만이 구원이자 행복한 결말의 이야기가 되리라고 감히 믿어보는 서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