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해온 선택과 내가 해온 선택이 우리를 만나게 한 거야”

[리뷰]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안녕하세요. 글 쓰는 ‘서연’입니다.

오랫동안 방치해온 위장이 한 달 전부터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워낙 만성적으로 앓아왔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데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하면 찌르고 뒤틀리고 답답한 증세가 나타나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게 됐을 때야 병원을 찾았습니다.

약 먹고 며칠 쉰 후에 이제 좀 괜찮겠지 했는데 증세는 계속됐고 할 수 없이 병가를 얻었습니다. 분명 죽을 병은 아닌데 죽을 것처럼 아프고 난 후, 그 고통의 시간을 고스란히 겪은 후의 한적해진 일상은 주변의 모든 소란이 먼지처럼 가라앉은 마음과 같아요.

잊은 줄 알았지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얼굴들, 생각들이 하나둘 떠올라 여전히 똑같은 시공간 속에서 전혀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거든요. 시끄럽고 분주하고 치열했던 세상 뒤 편에 조용하고 한가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커튼 한 장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을 뿐 무엇보다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요.

호되게 아프고 나니 역시 아팠던 한 친구가 가장 떠올랐습니다. 너무 달랐던 우리는 그 다름을 이유로 가까워졌고 이내 멀어졌습니다. 그 친구의 병은 췌장암이었는데요, 무사히 수술을 받았고 다시 건강해졌지만 우리는 더는 만나지 않는 사이가 됐습니다.

늘 가슴 안에 있었는데 꾹꾹 눌러놓고 없듯이 살았지만 역시 몸과 마음은 따로일 수 없는가 봅니다. 그래서 병가 중에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보았습니다. 영화를 핑계로 그녀에 대해, 아니 우리에 대해 더 오래 생각해보고 싶었거든요.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사람들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으로 자신의 영역을 지켜 온 소년, 시가는 정반대로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늘 웃고 있는 같은 반 소녀, 사쿠라의 비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쿠라는 가족들을 제외하곤 아무도 모르는 이 비밀을 공병문고라는 노트에 적어놓았는데 이를 시가가 읽은 것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된 계기가 됩니다.

사쿠라는 일부러 도서위원을 자청하고 시가와 가까워져요. 또 일부러 도서분류를 엉망으로 해놓아 관심을 끌고 싶어 하고요. 시가의 무심한 성격은 절친 쿄코의 감상적인 성격과는 달라서 사쿠라의 병에도 불구하고 남은 날을 그저 평범한 하루로 만들어줄 수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딱 너 한 사람밖에 없어. 나에게 평범한 나날을 선사해 줄 사람.

동물의 그 부위를 먹으면 아픈 부위가 낫는다는 TV의 이야기대로 음식을 먹으러, 신께 소원을 빌고 길흉을 점치러, 죽기 전에 비싼 호텔을 이용해보러 두 사람은 여행을 떠납니다. 부쩍 친해진 어느 날, 시가는 둘의 여행이 즐거웠다고 처음으로 속내를 말해요. 사쿠라는 기뻐하며 그 대가로 자신이 죽으면 췌장을 먹게 해주겠다고 합니다.

누가 먹어주면 영혼이 그 사람 안에서 계속 살 수 있대. 나는… 살고 싶어. 소중한 사람들 속에서.

사실 영화는 제목으로 인한 논란이 많았습니다. 작가의 의도가 충분히 잘 반영됐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제목이 영화를 다 버렸다는 의견도 있었거든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든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영화는 <어린 왕자> 속 여우의 대사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로 시작합니다. 이별 인사를 하고 슬프게 만들 거면 친해지지 않는 것이 좋았다는 어린 왕자의 한탄에 대한 대답인데요. 그것은 사람은 떠나도 그의 흔적은 남고, 겉으로 보이진 않아도 안에서 느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쿠라의 바람처럼요.

사쿠라의 남은 날들이 점점 걱정되고 별 볼 일 없는 자신과 친해지게 된 것이 단지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시가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해요.

우연이 아니야. 흘러온 것도 아냐. (중략) 운명 같은 것도 아냐. 네가 해온 선택과 내가 해온 선택이 우리를 만나게 한 거야.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로 만난 거야.

실제로 사쿠라 역의 배우, 히마베 미나미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라고도 했습니다. 너무 다른 두 사람이 멀리 떨어져서 각자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했을 수많은 선택이 어느 순간, 어느 지점에서 만나진 것이 바로 오늘의 우리라는 것이죠. 이제 마지막을 예감하며 벚꽃 여행을 떠나기로 한 장면인데요.

벚꽃은 말야. (중략) 다 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싹눈을 품고 잠들어 있지. (중략) 모두를 놀라게 하려고 숨어 있을 뿐 그리고 따뜻한 계절이 오면 단숨에 확 꽃을 피우지.

영화의 전반적 풍경이었던 벚꽃은 사쿠라의 생과 같습니다. 벚꽃 여행의 약속을 이루지 못하고 그녀는 묻지마 살인의 희생자가 돼 세상과 이별하지만, 그녀가 품은 싹 눈은 시가와 절친 쿄코에게 닿아 꽃을 피우게 됩니다.

그녀는 죽기 전, 즐겨 하던 진실, 도전 게임에 대해 다들 겁쟁이라 운에 의지하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도 말해요. 이는 12년이나 지난 후, 그때의 잘못된 도서분류를 두고 말했던 보물찾기(숨겨둔 편지-유서)로 이어집니다.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그녀가 생각했던 시가는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은 나약해서 친구와 가족들을 자신의 아픔에 끌어들이는데 그는 누구와도 엮이지 않고 홀로 살아가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죠. 그 용기로 좋아하는 사람들과 성가시고 속상한 모든 일을 견디고 함께 살아가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녀가 생각했던 삶의 의미로요.

그런데 이 내용은 시가가 그녀에 대해 품었던 생각과 비슷합니다. 늘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마음을 나누며 사는 그녀야말로 진정 용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서로를 향한 서로의 마지막 고백이자 영화의 제목인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네가 되고 싶어’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내가 되고 싶어’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아주 비슷합니다. 모두 겁쟁이거든요. 나약해서 타인에게 의지하는 반면 나약해서 울타리를 치기도 합니다. 슬퍼지고 싶지 않아서 웃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슬프기 때문에 울기도 합니다. 그 다름이 서로를 동경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서로를 등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해 너머엔 이해가 이해 너머엔 화해가 있습니다. 시가와 쿄코가 사쿠리의 싹 눈으로 우정이라는 꽃을 피우게 된 것처럼 울타리 하나를 넘으면 오해의 껍질 하나를 벗고 이해에, 또 그렇게 화해에 달하는 거죠.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극장판 애니메이션

신은 우리 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소원을 빌었지만, 병이 낫는다는 길점이 나왔지만 사쿠라는 친구들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자연의 신비처럼 아직은 다 알 수 없는 일인 것도 같습니다. 벚꽃이 떨어져 내린 거리는 애처롭지만 보이지 않는 싹 눈이 다음해의 아름다움을 약속하듯이, 쉽게 찾아지지 않는 잘못된 번호 속에 숨겨진 보물이 찾아진 후에는 새로운 우정과 또 다음 세대들(제자)의 사랑을 꽃피우듯이, 신의 섭리는 인간의 지혜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쿠라가 일부러 만들어낸 사건들의 결과처럼 신의 의도 역시 세상 끝에서야 겨우 알아채게 되는 것일지도. 지금의 이 아픔이 훗날의 큰 보물일지도.

쉽게 낫지 않네요. 아직 침대 위, 조용하고 한가하고 평화로운 세상 속에 누워있는데 이 오랜 병가는 신의 의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꾸 떠오르는 한 사람, 없듯이 여겼는데 마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그 얼굴에게 연락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스쳐 지나간 일은 아무리 짧아도 인연이고 안 봐도 느껴지는 통증이니까요. 서로 돌린 등을 한 번 더 돌리는 일이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다시 만나는 일보다는 쉬울 테니까요. 서로를 동경했던 그때의 우정을 되찾는 숙제를 안은 서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