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 탓하는 ‘탈코르셋 운동’

최근 ‘나는 예쁘지 않습니다’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이 600만 조회수를 넘어서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키 163cm에 몸무게 96kg의 유튜브 크리에이터 배리나가 올린 이 영상은 몇 달 전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탈코르셋 운동’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탈코르셋 운동은 ‘아름다움(美)’이라는 가치가 여성에게 어떠한 억압과 족쇄가 되는지를 대중에게 표출하는 노골적인 방식의 운동으로, 더 이상의 꾸밈노동에서 벗어나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응이 썩 좋지만은 않다. 혹자들은 이에 대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착취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으로 간주하고 응원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녀에 대해 “누가 화장하라고 강요한 적도 없는데 왜 혼자 유난이냐?”라는 반응을 보인다. 심지어는 “코르셋을 입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탈코르셋을 하냐?”라는 말로써 그녀의 외모를 비웃는 반응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

필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접근은 잘못됐다고 본다. 물론 여성에게 부여된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를 단순히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여성에 대한 억압기제라고 간주하기엔 아쉬움이 남지만, 그렇다고 해서 꾸며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으로 인한 억압이 생기지 않는다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탈코르셋 운동’의 메시지를 단순 행위자의 외모가 뛰어나지 않다는 이유로 틀렸다고 말하는 건 더욱더 아니다.

꾸미지 않을 자유 ‘탈 코르셋’(출처 MBC)

이 지점에서 필자는 개인적인 경험담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난 2016년 이맘때쯤 군 복무를 마치고 혼자 여행을 떠났다. 처음엔 혼자 떠난 여행이었지만 그곳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어떤 여행객들을 만났다. 원래부터 서로 친구였던 두 명의 여자들을 제외하곤 모두 초면이었다.

우리는 짧은 사이에 매우 친해져서 말까지 놓게 됐고, 다음날 함께 관광지를 돌아다니고 맛집들을 탐방했다. 고작 이틀이라는 시간이었지만 필자에게 있어 그날의 기억들은 아직도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몇 달 전, 당시 그 여자 중 한 사람의 SNS를 우연히 보게 됐다. 웬걸, 사진과 게시물들은 온갖 남성혐오 글들로 도배가 돼 있었고, “구원은 셀프”라는 문구와 함께 탈코르셋 기사의 링크가 프로필 상단에 버젓이 올라와 있었다. 그 여자는 뚱뚱하거나 못생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름 예쁘고 귀여운 얼굴에 애교까지 많았던 여자였다.

이는 “탈코르셋 운동은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논리에 대한 살아있는 반례다. 물론 이 논리에도 일리가 없진 않다.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들이 살아오면서 잠재됐을지도 모르는 어떤 피해 의식이 ‘꾸미지 않는다’는 구호로 발전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탈코르셋의 기준을 ‘예쁜 여자’와 ‘못생긴 여자’로 나누어 버리는 이런 이분법적 도식 구도는 본질로부터 한참 벗어나 있다. 이런 구도는 페미니즘을 단순 유머로만 소비하는 속 편한 이들의 값싼 정복감을 충족시키기엔 적합할지 모르나 본질에 대한 논의로 발전할 리 만무하다.

다시 말하지만, 탈코르셋 운동은 아름다움이라는 가치가 여성에게 어떠한 억압과 족쇄가 되는지를 대중들에게 표출하는 운동이다. 즉, 여성의 코르셋이라고 하는 ‘아름다움’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핵심과 맞닿아있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쁘고 못생긴 건 중요하지 않다. ‘아름다움’이 여성의 삶에 있어서 얼마만큼의 영역을 차지하고 이들의 행동 양식을 통제하느냐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혹자들의 냉소처럼 운동하는 대부분의 여성이 못생겼다고 해서 운동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름다움’이 여성이란 존재의 코르셋이라면, 그건 예쁘고 못생긴 것과 상관없이 억압기제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 운동의 잘못된 점이 있다면 여성의 피해 서사를 말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남성이라는 가해자를 규정하는 우를 범한다는 것이다. 즉, 여성에게 아름다움이 요구된 이유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지배계층인 남성들’이 ‘피지배계층의 여성들’을 통제하기 위해 ‘획일화된 미’를 강요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페미니스트들이 남녀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가부장제’라고 하는 여성착취사회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지금까지의 관행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실제로 페미니스트들은 코르셋을 가부장제가 유지돼온 가장 강력한 수단 중 하나로 보았으며, 가부장제 타파를 위해 실질적인 액션을 취해야 한다면 코르셋을 벗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코르셋의 원인을 오직 가부장제 이론으로부터 찾으려고 하면 남녀관계에 대한 논의는 또다시 환원주의에 빠지게 된다. 보나 마나 여성에게 코르셋이 씌워진 이유는 남성이 여성을 타자화했기 때문이며, 남성에게 아름다움이 여성만큼 강요되지 않은 이유는 남성중심사회이기 때문이라는 식의 결론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사실 코르셋이라고 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강요된 산물이라기보단 남녀가 함께 살아가며 서로 주체가 돼 상호적으로 교류하는 공간에서 각자의 기대치와 욕구 등이 만들어낸 초역사적 산물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코르셋은 족쇄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성을 통제할 강력한 무기도 된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다. 과연 여성의 ‘아름다움’이 남성들로부터 ‘강요받은 코르셋’이었는지 ‘주체적 코르셋’이었는지를 말이다.

탈코르셋 운동으로부터 페미니스트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여성의 가치가 외모만으로 평가받지 않고 그 사람만이 가진 역량으로 인정받고 싶은 것’이라면, 지금까지 여성들이 ‘외모’를 어떻게 무기로써 활용해오며 수혜를 누려왔는지 먼저 인정하고, “우리도 더 이상 남성들을 재력, 학벌, 능력 등으로 가치 판단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말했을 때 이들의 운동은 비로소 설득력과 대중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