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레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리뷰] 영화 <러브레터>

안녕하세요. 글 쓰는 서연입니다.

올해 서울의 첫눈이 11월 24일에 내렸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조금 멀고 따뜻한 남쪽 도시에 있는지라 아직은 만나지 못한 첫눈을 기다리고만 있습니다. 언제나 기대와 실망의 감정을 동반하는 이 기다림의 시간을 이왕이면 즐겁게 보내고 싶어 영화 한 편을 보기로 했습니다.

영화 <러브레터> 포스터

겨울이면 생각나는 영화, 잘 짜인 구성과 이와이 슌지 감독 특유의 감성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마음을 사로잡는 영화, <러브레터>입니다. 첫사랑, 죽은 후지이 이츠키를 잊지 못하는 와타나 베히로코는 추모식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집에 들러 졸업앨범을 보게 됩니다. 그러고는 졸업앨범 속에 기록된 그의 예전 주소로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정말로 답장이 와요. 이제는 사라진 주소인데 말이죠. 답장을 보낸 그녀는 옛 여인, 이츠키의 동창생이자 동명이인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영문을 몰랐던 두 사람은 히로코의 오타루 지역 방문으로 이츠키라는 이름의 동명이인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 두 사람이 동창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여자 이츠키와 히로코가 아주 많이 닮았다는 사실까지도요.

닮아서라면 용서할 수 없어요. (중략) 첫눈에 반한 것도 따로 이유가 있었군요.

히로코는 여자 이츠키에게 남자 이츠키가 죽었다는 말을 전하지 않고 다만 사랑했던 그의 과거를 공유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렇게 현재 성인이 된 이츠키의 연인인 히로코와 과거 학생이었던 이츠키의 동명 친구인 이츠키는 편지를 주고받게 됩니다. 죽은 이츠키가 두 사람 사이를 잇는 매개가 되는 것이죠.

여자 이츠키는 히로코에게 남자 이츠키의 과거 모습들을 알려줍니다.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던 일, 함께 도서위원이 되었던 일, 시험지가 바뀌었던 일, 육상부였던 그가 다리를 다친 일, 친구가 그를 좋아했던 일 등을. 서신 속에서 두 사람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히로코는,

당신 추억 속의 이츠키는 제가 모르는 그의 모습입니다. (중략) 제가 모르는 그의 세계가 더 많겠죠? 제가 아는 건 아주 조금뿐입니다. 당신의 편지를 읽고 그걸 깨달았어요.

지금까지도 그를 놓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히로코는 전부라고 믿었던 모습이 자신이 알고 있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죠. 그리고 여자 이츠키는,

도서카드에 쓴 이름이 정말 그의 이름일까요? 그가 쓴 이름들이 당신 이름인 것만 같군요.

그가 자신을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남자 이츠키의 특이한 습관(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읽은 후 도서 카드에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던 것)이 남긴 증거물 때문입니다. 남자 이츠키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의 반납을 여자 이츠키에게 부탁한 일이 있었어요.

도서 카드 뒷면의 여자 이츠키

그런데 그 도서 카드 뒷면에 그려진 자신의 얼굴을 히로코의 부탁으로 모교에 방문했다가 후배들에 의해 발견됩니다. 남자 이츠키를 사랑했기에 같은 시간 속에서도 여자 이츠키는 차마 눈치채지 못했던 그의 감정을 서신 속에서나마 읽어낸 히로코는 비록 추억 속의 사랑이지만 두 사람의 마음을 가만히 연결해줍니다. 그리고 이제 그를 보내줄 준비를 해요.

잘 지내고 있나요? 전 잘 지내요.

<러브레터>명대사 “오겡끼데스까? 와따시와 겡끼데쓰~”

곁에 있던 히로코의 남자친구는 이 장면에서 옆에 있던 지인에게 가장 중요한 때니까 그냥 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히로코가 죽음 속의 그가 아니라 삶 속의 자신을 찾게 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히로코가 과거를 버리고 현재를, 죽음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그 순간, 여자 이츠키 역시 독감의 위험, 죽음에서 막 눈을 뜹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심한 감기로 돌아가셨거든요. 마침 아버지의 장례식 날이 남자 이츠키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을 들고 방문했던 날, 그러니까 전학을 가던 날, 그래서 둘의 마지막 만남이었던 날이었습니다.

여자 이츠키가 히로코에게 붙이지 못한 마지막 편지의 첫 문장은 히로코가 남자 이츠키를 떠나보내며 건넨 마지막 문장이기도 합니다.

잘 지내고 있나요? 저는 잘 지내요.

안부를 묻는 가장 흔한 말이 사실은 러브레터의 가장 중요한 내용인 겁니다. 어떻게든 잘, 무사히, 행복하게 지내고 있기를 바란다는 마음이니까요.

영화의 첫 장면은 하얀 눈밭에 드러누워 숨을 참고 누워있던 히로코가 더는 참지 못하고 탁 뱉어버리며 일어서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마을을 향해 천천히 내려와요. 죽음이 삶을 깨운 것이죠. 그래서 영화의 제목 <러브레터>는 정말 천국에서 온 편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은 이츠키가 그토록 닮은, 그러나 전혀 몰랐던 두 사람을 이어주고 각자의 행복을 찾게 했으니까요. 한 사람에게는 잃을 뻔했던 과거의 추억을,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충실할 기회를 주어 추억은 추억대로, 삶은 삶대로 제자리를 찾게 했으니까요. 그래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책의 제목은 등장만으로 큰 메시지가 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음으로써 자신과 현재의 삶까지 선물한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편지 쓰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커갈수록 진심을 드러내는 이 행위가 왠지 손해 보는 일 같아 의식적으로 멀리했는데요.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를 보고, 또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한 문장을 읽고는 그 손해들이 사실은 다 내게 돌아오는 복임을 깨달았습니다.

간 것보다 돌아온 것이 더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은 간 것이 우리자신에게서 나온 것임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준 사랑이 지금 당장은 손해 같아도 다시 돌아오는 반동의 힘, 마음의 작용, 사랑의 원리로 결국은 내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금 시간이 걸린다 해도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잃어버린 시간 속의 추억과 삶이 찾아졌듯이 멀리 돌아오더라도 결국은 내 것이 될 사랑의 마음을, 삶의 원천일 에너지를 굳이 아끼지 말아야겠다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것은 몇 배의 손해가 나는 일이니 일부러 접어두지 말아야겠다고, 첫눈을 기다리는 감정 속에서 다짐해보는 서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