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으로도 충분한 삶을 위하여

[리뷰] 동화 <백만 번 산 고양이>

안녕하세요. 글 쓰는 서연입니다.

이틀 전이 엄마의 생신이었습니다. 설 얼마 지나지 않아 온 가족이 다시 모였는데요, 그 후로 3월엔 형부의 생일이, 5월엔 어버이날과 어린이날이, 6월엔 아빠의 생신이, 7·8월엔 휴가철이, 하반기엔 추석과 또 다른 식구들의 생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날이 많죠. 반복된 패턴의 지루한 하루들 속에 분명 활력소가 되어줄 그 날들이 고맙기도 한 한편 분주함 위에 정신없음을 더해줄 그 날들을 다 챙기다 보면 한 달이 훌쩍, 일 년이 훌쩍, 어느새 나이도 훌쩍, 그렇게 늙어가고 있더라고요.

조금씩은 깨져 조각난 삶의 모양들처럼 조금씩은 불행한 우리 가족들의 하루는 그날도 예외는 아녔던지라 둘째 조카는 울고 엄마와 아빠는 티격태격하고 언니는 저에게 면박을 주고 불편한 마음으로 먹다 체한 저는 모든 화의 원인을 엄마에게 돌리고 말았고 형부는 그 사이에서 눈치를 보았어요.

사실 엄마의 생신이 아니었다면 너무도 평범한 하루의 풍경이었는데 엄마의 생신이라는 이유로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생각했습니다. 이런 풍경의 하루가 365번 반복되고, 그 반복이 70회 반복돼 할머니라고 불리는 나이가 된다면, 삶의 마지막을 생각하며 나는 무엇을 후회하고 무엇을 되찾고 싶어 ‘제발, 단 한 번만’이라는 간절한 기도로 시간을 거스르고 싶어 신을 찾을까. 그러지 않기 위해서 나는 그 긴 시간을 신 앞에 선 것처럼 매 순간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충실하게 살아낼 수 있을까를.

일본의 국민 작가로 유명한 사노 요코는 2010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요. 새로운 시각이 보이는 톡톡 튀는 문장들, 읽는 것만으로 음성지원이라도 되듯 귀에서 맴도는 말들이 강한 임팩트가 있어 여전히 많은 한국 팬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자신의 병을 알고도 ‘죽는 게 뭐라고’ 하며 쿨하게 말할 수 있었던 노장의 죽음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그림동화책 <백만 번 산 고양이>를 나눠보려 합니다.

그림동화책 <백만 번 산 고양이> / 사노 요코

얼룩고양이는 백만 년 동안 백만 번 죽고 백만 번 다시 살아요. 그 시간 동안 백만 명의 주인을 만나 큰 사랑을 받다가 고양이가 죽었을 때는 큰 눈물의 애도를 받아요. 그런데 정작 고양이는 자신의 삶과 죽음 앞에 단 한 번의 기쁨도, 슬픔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난 백만 명의 주인들과 주어진 백만 번의 삶을 사랑하지 않았거든요.

전쟁을 일삼던 임금님이 주인이었을 때도, 바다를 항해하던 뱃사공이 주인이었을 때도, 서커스단 마술사가 주인이었을 때도, 어두컴컴한 밤을 누비던 도둑이 주인이었을 때도, 홀로 사는 할머니가 주인이었을 때도, 아이를 늘 안고 업고 다니던 여자아이가 주인이었을 때도 고양이는 아주 싫어했어요. 죽는 것 따위도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다시 살아나 처음으로 누구의 고양이도 아니었을 때, 그러니까 처음으로 주인 없는 도둑고양이가 되었을 때, 그의 삶은 바뀝니다.

고양이는 처음으로 자기만의 고양이가 되었습니다. 고양이는 자기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암고양이들도 그에게 반해 신부가 되고 싶어 해요. 그래서 선물 공세를 펼치는데요. 그는 이렇게 말해요.

나는 백만 번이나 죽어봤다고. 새삼스럽게 이런 게 다 뭐야.

고양이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좋아했던 것이죠.

그러다 자신을 본 척도 않는 하얀 고양이를 봤을 때 상황은 역전됩니다. 그가 아무리 백만 번이나 죽어봤던 자신의 삶을 자랑하고 서커스단의 기술인 공중돌기로 뽐내도 시큰둥해요. 연신 백만 번이나 죽어봤다고 자랑하던 그가 방법을 바꿔 마음의 말을 솔직하게 했을 때 하얀 고양이는 그제야 긍정의 대답을 들려줘요.

네 곁에 있어도 괜찮겠니?

으응

그 후로 그들은 늘 서로의 곁에 머무릅니다. 아기고양이도 많이 낳고요.

늘 서로의 곁에 머무르는 얼룩고양이와 하얀고양이, 아기고양이들

고양이는 이제 “난 백만 번이나···”라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고양이는 하얀고양이와 아기고양이들을 자기 자신보다 더 좋아할 정도였습니다.

아직 이야기가 조금 더 남았지만, 이 대목이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 중 가장 큰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아요. 백만 번이나 살았고 백만 명의 주인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지만 단 한 번도 삶에 미련이 없었던 얼룩고양이가 주인 없이 자기만의 고양이가 되었을 때는 언뜻 삶의 자유와 자존을 찾은 듯 보여요.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게도 되고요.

그러나 자신보다 더 좋아하는 대상인 가족을 만나게 되었을 때는 그보다 더 큰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자기애를 넘어선 가족애, 그리고 삶에 대한 의지와 의미를. 그 배움을 바탕으로 이제는 하얀고양이와 함께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삶의 가르침보다 늘 한 걸음 뒤처지는 생명의 깨달음은 후회의 눈물로 남습니다.

그제야 하얀고양이에게는 늙음 후의 죽음이 찾아오고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무감했던 얼룩고양이는 처음으로 밤낮없이 울고 또 울게 되죠. 그러던 어느 날 낮에 울음을 그치고 움직임도 멈췄습니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무감했던 얼룩고양이는 하얀고양이의 죽음에 처음으로 밤낮없이 울고 또 웁니다

그러고는 두 번 다시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얼룩고양이에게도 삶은 되풀이되지 않을 모양이에요. 그러니 문제는 얼마나 ‘오래’‘살아’ 있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깊게’ ‘살고’ 있었느냐입니다. 백만 번이 아니라 천만 번의 삶이었대도 멈춰있는 심장으로는 눈물도, 감동도 없는 무의미한 생이 되어 버리지만 단 한 번의 삶이었대도 생동으로 펄떡거리는 심장으로는 삶 너머의 삶 속에서도 다시 살아나 못다 한 사랑을, 미련 많은 생을 이어나갈 수 있을 거라 믿어요.

그래서 작가는 얼룩고양이의 삶을 그때에서야 멈추도록 의도한 것 아니었을까요? 이는 반대로 사랑과 동행한 삶은 그 하나로 충분한 것이라는 메시지이기도 하고요. 다시 태어날 필요 없이 그것으로 충분한 삶이라는 거죠. 결국 사랑은 삶의 정수이고 죽음 후에도 둘을 잇는 유일한 힘인 듯해요.

언제부턴가 사랑한다는 말이 너무 흔해져서 잘 하지 않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어색하고 낯간지러운 단어가 되어 버려서 더 하지 않게 되었고요. 엄마 생신인 그 하루조차도 완벽할 수 없었던 우리 식구들은 아마 죽음 앞에 아쉬운 것이 많을 듯합니다. 아마도 사노 요코 작가는 우리 식구들과는 다르게 삶을, 삶 속에 사람들을 충분히 사랑했었던 듯해요. 미련 없이 “죽는 게 뭐라고”라고 말했던 것을 보면요.

그리되고 싶어서 그 밤이 다 가기 전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는데요. 알고 보니 아빠도, 언니도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문장을 전송했더라고요. 곁에 있을 때는 수줍은 말, 그래도 용기 내어 전한 그 말, 작가 식으로 ‘그 말이 뭐라고’ 엄마는 내심 흐뭇해하고, 우리는 깨어져도 하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름다운 삶과 죽음, 죽음 너머의 삶을 위해 오늘도 사랑을, 대단히 어렵지만 흘러가는 하루만큼 성장할 우리의 마음에 기대보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그 사랑을 노래하고 믿어보고 기도해보는 서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