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어둠과 검은빛이 공존하는 세상, 눈먼 자들의 도시

[리뷰]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안녕하세요. 글 쓰는 ‘서연’입니다.

이번 주는 당장 해결이 시급한 문제에 대해 가까운 지인들과 집중해 고민하고 상담했던 시간이 많았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죠.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아무리 사랑으로 묶인 사이여도 인식의 차이는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같은 사물을 보고도 다르게 느끼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어요. 객관적인 물체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다면 주관적 상황에 대해서는 더 큰 차이가 있겠죠.

우리가 일차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를 받아들이는 데에 80%를 담당하는 기관은 눈입니다. 그렇게 시각으로 들어온 정보에 대해서는 뇌로 이성적 판단을 내리거나 마음으로 의지적 선택을 합니다. 그러니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단지 눈으로 보는 문제가 아니라 그 후의 이해와 판단에 해당하는 인식의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를 골랐습니다. 상황은 매우 극적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갑작스레 도로 한복판, 차 안에서 눈이 먼 한 사람에서부터 시작해 감염은 안과, 호텔, 바, 집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점점 퍼져나가고 이윽고 도시 전체에 백색 어둠이 깔린다는 설정인데요.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그렇게 점점 많아지는 감염자들에 대해 정부에서 내린 조치는 격리 수용입니다. 인간적 관심과 배려 대신 임시변통에 불과한 조치를 세우고는 대열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바로 사살해버리는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태도를 보여요. 마치 나치 시대를 보는 듯도 했습니다.

그러니 눈먼 자들이 갇힌 격리 수용소 내부는 정확히 누가 적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언제든 증오와 광기의 불길이 타오를 수 있는 잠정적 전쟁 상태나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말했듯 그들은 눈이 멀기 전 어딘가에서 분명 스쳐 지나갔던 인연들이었는데 말이죠.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아니나 다를까 외부와의 통신이 단절된 상황이 되자 3병동의 왕이 된 사내는 모두를 지배하려 듭니다. 먹을 것을 얻으려면 자신에게 값비싼 것들을 바치라고 하죠. 귀중품이 더 이상 귀중품일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탐욕의 본능은 날카로운 이를 드러냅니다.

귀중품이 더 이상 귀중품일 수 없다면 그 어떤 가치보다 귀중한 인간 역시 더 이상 인간일 필요가 없다는 듯이 지배 무리는 더 바칠 귀중품이 떨어지자 이제는 여자들을 바치라고 해요. 그런데 지배 무리 중 한 사람은 원래가 맹인인 사람이었어요.

처음부터 그랬다면 인간의 도리를 알 텐데? 이러고도 발 뻗고 자시오? (중략) 이건 비인간적이오.

안과의사는 자신이대표로 있는 1병동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없음에 자책하는데 그에게 위로가 된 사람은 아내가 아니라 검은 안경을 쓴 채 안과에서 만났던 창녀였습니다. 유일하게 눈이 보여 모두를 보호하고 도와주는 지도자인 안과의사의 아내는 이를 그냥 모른 척 덮고 넘어가지만 지배 무리에게 여성들이 단체로 몸을 바친 후 그중 한 여자가 목숨을 잃게 되었을 때는 더는 참지 못하고 우두머리를 사살합니다. 그 후 누군가 화재 사건을 일으켜 모두가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들은 외칩니다.

자유예요.

그러나 이미 전쟁 후 모든 것이 다 무너져버린 도시처럼 폐허가 된 땅 위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수용소 내부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눈이 보이는 안과의사의 아내만이 그들을 위해 길을 안내하고 먹을 것을 구해오는데요.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시야가 닫히니 더 발달한 후각과 청각에 의지해 득달같이 달려드는 사람들로부터 도망치는 그녀에 대해서는 모두가 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혼자만 볼 수 있다는 것이 과연 구원일까, 재앙일까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눈먼 자들에 대해서는 가시적 세상 속에서 비가시적 영역을 상상했던 이전과 비가시적 세상 속에서 가시적 영역을 상상하는 지금의 상황을 비교해볼 수 있겠죠.

물론 볼 수 있다는 것은 신이 내린 축복임이 틀림없지만 작가가 설정한 극한 상황과 그 상황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의도는 더 중요한 것을 담고 있습니다. 작가는 보이지 않는 세상을 처음부터 하얀 어둠이라고 표현했는데요.

그 말은 보이는 세상은 반대로 검은 빛이라는 것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보이기 때문에 지켜졌던 법, 가식이더라도 간직했던 양심, 암묵적으로 지켜졌던 배려 이면에는 끝으로 내몰리면 변해버리는 마음, 자비 따윈 애초에 없었던 듯 악해지는 행동, 꺼내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는 광기가 숨어있습니다.

그러니 보인다는 것은 자유이자 통제이고 앎이자 무지일 수 있습니다. 성당 안에 눈이 가려졌던 신의 성상은 그러므로 인간을 위한 또 다른 계획일 수도, 어쩌면 인간을 향한 최후의 경종일 수도 있을 겁니다.

모두가 안과의사의 집으로 온 날 밤, 보이는 세상 속에서 더 좋을 것도 없었던 흑인 노인은 정이 싹 텄던 검은 안경의 창녀에게 이렇게 말해요.

노인의 소망만큼 허망한 것은 없다오. (중략) 내 소원은 우리가 같이 사는 거에요. 지금처럼.

안 보이는 채로?

난 더 좋았던 적이 없어 놔서…

그리고 다음 날 제일 처음으로 눈이 멀었던 한 남자의 시각이 회복되자 모두가 기뻐하는 와중에 노인만은 무감합니다. 보이는 세상 속에서 늘 소외된 채 보이지 않는 그늘의 한 부분처럼 살았던 그에게는 어쩌면 모두가 보이지 않았던 세상이 덜 외롭고 안정된, 그래서 평등하고 좋았던 세상이었을 테죠.

이제 모두의 시각이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이 보이는데 안과의사의 아내는 어쩌면 이제는 내 차례일 수도 있다는 의심으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화면 가득히 하얀 어둠이 드리워지는데 카메라가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내려오면 세상은 푸른 안개를 걷어내고 선명히 밝아오는 아침이에요.

신이 우리에게 시각을 허락한 것은 그저 눈으로 보는 것만을 요구해서는 아닐 겁니다. 눈이 뇌로 연결되어 있듯이 보는 것은 아는 것으로, 이성이 감성의 지배를 받듯이 아는 것은 이해하는 것으로 연결되어야 해요.

그래서 크게 안다는 의미를 가진 ‘깨닫다’는 말이 따로 있는 것이고,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말,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라는 말도 모두 성숙한 인격을 위해서 작품 속에 담긴 메시지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겠고요.

초반에서 중반부로 넘어가는 부분에 모두가 둘러앉아 음악을 듣는 장면의 대사는 자막으로 처리되는데요.

음악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영혼과 활짝 뜬 눈과 눈물 (중략) 기쁨의 눈물일까? 슬픔의 눈물일까? 기쁨과 슬픔은 물과 기름이 아니어서 서로 공존한다.

수용소 내부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 세상이 그렇습니다. 기쁨과 슬픔이, 선과 악이, 양심과 속임수가, 자비와 폭력이, 사랑과 증오가, 그리고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곳이죠. 인간의 내면이기도 하고요. 그 공존 속에서 끝끝내 버려지지 않는 것들이 앞에 선 말들이기를, 설사 끝으로 내몰린다 하더라도 선이 악을, 사랑이 증오를, 빛이 어둠에게 손 내밀어 인도해주기를 바라봅니다. 안과의사의 아내가 그러했듯이. 활짝 뜬 눈으로 눈 앞의 것만을 쫓기보다 잠시 감은 눈으로 더 먼 빛을 그려보는 오늘의 서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