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이토록 잔혹하게 가까운 삶의 비밀

[리뷰] 장 그르니에 <섬>

안녕하세요. 글 쓰는 ‘서연’입니다.

4월이 시작되면서 멀리 벚꽃 구경을 하러 가자는 친구의 청을 굳이 거절한 것은 특별한 이유에서가 아니었습니다. 유독 바빠질 예정인 상반기 스케줄에 허덕이는 피곤한 육체를 위한 배려이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여행에 대한 로망이 없는 평소의 취향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걸어서 삼분, 차 타고 십분 거리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날리는 명소들을 알고 있는 터에 뭐 하러 굳이 시간 쓰고 돈 쓰고 체력 쓸까 싶었던 겁니다. 친구는 투덜댔지만, 알고 있었을 겁니다. 멀리 찾아 떠나는 가치들이 일상 속에 있다고 믿는 필자의 마음을.

그래서 올해는 3분 거리의 벚꽃 구경을 즐긴 후 3시간 깊이의 섬 여행을 즐기는 것으로 이번 주말을 알차게 채웠습니다.

카뮈가 극찬하고 존경했던 장 그리니에의 비밀스러운 시적 언어가 가득한 이 책 <섬>은 마치 한 곡의 음악처럼 읽는 이의 정신세계를 유연하게 흘러 저도 모르는 새 깊은 꿈결 속에 도달하게 합니다.

섬(장 그르니에 지음 / 민음사 출판)

도착한 그곳에서도 리듬에 맞춰 걷거나 뛰거나 날겠지만, 그 모든 행보가 현실에서 동떨어진 몽상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가장 깊이 인식하게 하는 감각으로 재현된다는 점이 벚꽃을 대하는 필자의 평소 태도와도 닮아있어 손에 들었던 것이죠.

1부 공의 매혹에서는 어릴 때 찾아온, 계시라고 해도 좋을 결정적 순간으로 글을 열면서 세상의 헛됨을 말하지만, 그것은 곧 파멸이 아니라 바다와 같이 무한하고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있는 공백의 상태라고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2부 고양이 물루에서는 그가 키우는 고양이에 대한 관찰과 심상을 기록했는데 인간의 입장에서 자칫 놓칠 수 있는 시선을 잡았다는 점에서 신선하고도 감동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4개의 챕터로 구성된 2부는 상대적으로 긴 호흡이지만 지루함 없이 읽어낼 수 있었던 것도 작가의 세련된 시선과 훈훈한 철학적 사상이 함축돼 있어서였던 것 같아요. 특별히 좋았던 문장은 이것인데요.

나는 그의 몸 위에 내 시선을 가만히 기대어본다. 그러면 그가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시금 믿음직스러워졌다.(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그의 현전)

2부의 중심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문장은 룰루의 생존에서 범우주성을 보는가 하면 인간의 존재적 슬픔마저 느끼게 하는데 이는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 때문이기에 반대로 비인간적인 나라인 인도는 절대에 도달할 수 있는 나라라고 언급돼 있습니다(인도에 대한 이야기는 6부로 이어집니다).

케르겔렌 군도

3부 케르겔렌 군도에서는 나를가장 나답게 만드는 조건인 ‘비밀’에 대해서 다루는데요. 그는 비밀 없이는 행복도 없다며 비밀스러운 삶을 예찬하면서도 데카르트가 암스테르담에서 영위한 생활을 예로 들어 반전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는 생활을 완전히 개방해놓음으로써 정신은 자기만의 것으로 간직할 수 있었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갖게 될 호기심에 미리 선수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 것인데요. 더 나아가 그는 실제보다 자신을 더 미천하게 보이게 함으로써 삶의 순간순간을 가장 정직하게 느끼고 숨은 면면들을 가장 감각적으로 대면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3부의 끝부분에는 책의 제목인 섬에 대한 글이 인용되는데 작가가 암시하는 명상의 방향과도 맞닿아있으니 곱씹어 읽으며 음미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4부 행운의 섬들에서는 여행에 대한 그만의 고찰을 펼쳐 보입니다. 지금은 하나의 트렌드처럼 변한 여행에 대해 자기 인식을 위한 수단, 자신을 되찾기 위한 출발이라고 정의하는데요.

어떤 낯선 도시를 앞에 두고 깜짝 놀랄 때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다.

발과 땅의 결합, 눈과 빛의 결합을 통해 찾아지는 감각의 세계가 우리를 존재하게 한다는 메시지가 겨우내 잊었다 다시금 찾아온 봄날의 꽃향기처럼 삶을 충동질하는 매개가 됐습니다.

5부 부활의 섬은 한 백정의 비루한 삶과 죽음을 소재 삼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죽음이 아니라 소제목처럼 부활에 대해, 그리고 고립돼 있지만 시원한 바다를 만날 수 있는 섬에 대해, 그리고 꼭 섬을 닮아 혼자씩일 뿐인 인간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합니다.

6부 상상의 인도는 앞서 말한 바처럼 모든 인간적 척도를 벗어나있는 인도의 사상(종교), 체계(신분)를 들어 보통의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절대와 신성이 가능한 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도 타지마할

인간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닐까? 인간에게 가장 훌륭한 몫은 바로 인간을 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그것이니까.

7부 사라져버린 날들은 잠과 깨어있음의 사이인 몽상, 일찍이 그가 암시했던 명상, 글의 전체적인 출발이 되었던 상상으로 시작해 룰루가 그랬듯 감각의 세계와 합일되는 경험을 나누고 있습니다. 즉, 작가가 회의를 느꼈을 인간 존재의 슬픔을 섬들을 여행(상상과 경험으로)하며 극복한 듯이 보이는 이 대목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씩 더 전진하여 완벽할 순 없지만 꿈과 가까워지는 긍정의 삶을 노래한 듯 느껴집니다.

마지막 보로메의 섬들은 일상 너머에 있는 빛들을 쫓느라 실은 일상 속에 있는 그 빛들을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을 지적하는데요. 결국 여행이란 돌아오기 위한 출발이듯 가장 가까운 것 속에서 찾을 수 있는 피난처인 여기가 곧 보로메의 섬들이라는 겁니다.

한 번의 악수, 어떤 총명의 표시, 어떤 눈길··· 이런 것들이 바로 – 이토록 가까운, 이토록 잔혹하게 가까운 – 보로메 섬들일 터이다.

거절당한 채 투덜댔던 친구가 필자의 마음을 알고 있었을 거라 기대하듯이, 고집을 부리며 방콕의 섬 여행을 즐긴 필자 역시 친구의 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굳이 멀리 떠나는 것, 멀리서 찾을 대단한 무엇이 목적이라서가 아니라 섬처럼 동떨어진 혼자가 아니라는 실감과 함께라는 확신 속에서 어느 봄날의 예쁜 추억 한 페이지를 인생 책 속에 포함시키고 싶었다는 것을.

혼자 멀리 드라이브를 다녀왔다며 눈을 흘기는 친구는 그럼에도 제가 좋아하는 값비싼 브랜드의 초콜릿을 예쁜 선물 상자에 담아 내밀었습니다. 염치없이 받았지만 또 한 번 느꼈습니다. 그 일상 속의 부름과 함께라면 먼 곳의 신기루에 눈이 멀어보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다는 것을, 그 경험이 외로운 섬 생활을 달콤함으로 견디게 한다는 것을, 그것이 삶의 비밀이라는 것을 말이죠. 초콜릿의 진한 달콤함에 취해 이 밤, 또다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서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