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의 홀, 구멍 난 삶에 대한 자세

[리뷰] 편혜영 <홀>

안녕하세요. 글 쓰는 ‘서연’입니다.

뒤늦게 시작하는 공부 때문에 몹시 바쁜 와중에 마음에 브레이크가 걸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마음에 제동이 걸리면 빠르게 추진돼야 할 일들이 하나 둘 밀리면서 생활 전반에 무리가 생겨요. 그러면 공부고 꿈이고 다 손 놓게 되고 마음 하나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조금 늦은 속도로 간다는 건 삶의 짧은 찰나인 지금의 시각으로는 실패일 수 있지만 긴 여정인 일생의 도착지에서는 그저 경험의 과정일 수 있기에 이렇게 느린 나를, 이렇게 서툰 나를 최대한 인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 정 안될 때 달밤의 산책은 필자만의 꿀 팁인데요. 달이 주는 위로가, 더 정확히는 달을 찾는 내 마음이 스스로를 다독이기 때문입니다.

편혜영의 <홀>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신체적 자유와 아내를 잃은, 어쩌면 삶에 대한 신뢰와 자신에 대한 의지마저 잃은 마흔의 오기가 주인공입니다. 이제 막 눈을 떠 의식의 세계로 돌아온 그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삶을 꾸려나가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홀>(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출판)

원래 고아였던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가족은 장모인데요. 장모는 가까이하기엔 조금 어려운 사람입니다. 예를 갖추긴 하지만 속을 알 수 없어 거리가 느껴지는, 그래서 남 같은 사람.

오기는 아내의 집을 처음 방문하던 때를 회상하는데 그 장면 속에는 바람 난 장인의 과거사와 신경질적인 장모의 내면, 부모님과 거리를 둔 아내, 그리고 거실장 안, 생활의 흔적이 묻어나지 않는 자기 하나가 놓여있습니다. 그것은 일본사람이었던 외할머니의 유골함이었는데요.

아내는 유골함을 바라보며 일본어로 무어라 중얼거리는 엄마를 징그럽고 무섭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유골함을 자기로 오해한 오기가 아내와 농담을 나누는 대목이 후에 나오는데요.

자기야 저거 자기 아니야.

자기는 도대체 왜 그래.

동음이의어의 말장난이지만 깊은 의미가 있어서 미리 데려왔습니다. 상대를 칭하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칭하기도 하는 말인 ‘자기’는 서로를 하나로 섞이게 하는 말이죠. 또 이 단어가 칭하는 또 다른 사물인 ‘유골함’이 죽음과 관련된 단어라는 것은 두 사람의 결혼과 사랑에 드리운 복선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해 집으로 돌아온 오기에게도 징그럽고 무서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돌보지 못한 정원이었는데요. 아내가 살아있을 때, 정확히는 오기의 동료들이 이사한 그 집에 놀러 와 정원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한 이후부터 아내가 열과 성을 다해 돌보았던 공간이었습니다.

오기의 기억 속에 아내는 성공을지향하지만 늘 실패하고, 실패하지만 포기 또한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오기가 아내에게 반한 면모이자 이내 변한 이유이기도 했을 겁니다. 아내의 그런 성격엔 그가 싫어했지만 닮아간 아버지의 모습과 그가 동경했지만, 자살이라는 큰 충격을 남긴 어머니의 모습이 공존했거든요.

여기서 정원은 여성성이 강한 공간입니다. 생명을 낳고 기르는 상징성 때문인데요. 자살한 엄마는 그에게 결핍된 모성애를, 그래서 일차적 성장에서의 죽음을 의미하고 엇나간 관계 속의 아내는 그에게 이차적 성숙에서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기댈 유일한 여성들의 잔상은 곧 그의 삶의 방향과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성공했지만, 속물인 아버지와 실패했기에 잉여인 어머니의 모습이 공존하는 아내의 모습은 비단 아내만의 모습은 아닐 겁니다. 삶은 언제나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아무리 힘껏 내달려도 삶은 하루씩 잃어가는 결과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 셜리 잭슨상(장편 부문)을 수상한 편혜영 작가(출처 문학과지성사)

여기까지가 사건 전개의 암시였다면 진짜는 장모와의 동거생활부터입니다. 입주 간병인과 물리치료사를 몰아내고 스스로 그 역할을 자처한 장모는 딸의 자리를 대신합니다. 장모는 아내의 서재에서 아내의 기록들을 단서로 오기에 대한 많은 것들을 알아내죠. 제이와의 관계마저.

제이는 오기가 마음을 준 후배인데요. 아내의 과대망상이 현실이 된 건 아내가 오해했듯 정원에서의 저녁 식사 때가 아니라 그 후였습니다. 그러므로 오기는 아내의 의심에 반성하지 않았고 그녀의 슬픔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복수를 대신하듯 장모는 그날의 멤버들을 불러들입니다. 그리고는 무례하다 싶은 농담을 하고 어울리지 않는 술대접을 합니다. 이어 장모가 정원에 큰 구멍을 파놓은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은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산 걸 풀어놔야죠. 살아서 꼬리도 치고 숨도 쉬고 헤엄도 치고 그러는 걸 둬야지요. (중략) 추접하죠. 악착같이 그 좁은 구멍에서 살려고 해댈 텐데…

마치 오기의 생명을 향한 비난인듯한 장모의 이 말은 아내가 열중하던 정원에서 오기가 유독 견디지 못했던 것이 지독한 본성으로 끈질기게 자라나는 담쟁이 덩굴이었다는 점과 대치합니다.

장모의 속내를 알게 된 후 몸의 회복이 서서히 이뤄진다고 믿었던 오기는 장모에게서 탈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뻔하죠. 도망칠수록 장모가 그를 위해 파 놓은 구멍 속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가게 될 뿐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아내의 슬픔을 상기합니다.

오기는 비로소 울었다. 아내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

사고가 있던 그 날, 헤어짐을 위한 여행을 준비했던 아내와 그런 아내를 이해하려면 진작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내내 미뤄두고 자신의 기반을 다져갔던 오기 사이에 놓인 메워질 수 없는 틈은 그들에게만 존재하는 구멍은 아닐 겁니다.

애초에 삶이라는 것이 그런 속성을 지닌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가 독자에게 정말로 말해주고 싶었던 것은 불륜과 복수의 끝으로써의 죽음이 아니라 완전할 수 없는 삶의 구멍, 바로 그것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인간은 그런 식의 빈 구석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것이야말로 내면의 진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노력했더라면 달라졌을까’라는 여지를 남기는 가정 속에는 실패를 거듭해서 조금이나마 나아져 가는 지도처럼, 그가 자주 인용하곤 했던 ‘가까운 것은 먼 것보다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어느 지리학자의 말처럼 비극적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해봐야 할 일이라는 속뜻마저 내비치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도 해봅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러지 않았더라면 아내가 생명을 키우는 땅을 일구고 눈물을 흘릴 리 없었을 테니까, 상대방을 칭하는 ‘자기’와 스스로를 칭하는 ‘자기’가 같은 발음일 리 없을 테니까.

달밤의 산책이 좋은 건 아주 깜깜한 세상을 탈출할 수 있게 동그란 구멍을 뚫어놓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한 후부터였는데요. 괜히 힘줬던 마음이 풀리고 아등바등했던 모든 것들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내 아집으로 잃는 건 나 자신일 뿐이라는 깨달음을 달빛이, 달빛을 찾는 내 마음 스스로가 찾아주었기 때문입니다.

느려서 늦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서툴러서 실패해도 괜찮을 것 같고요. 빨리 가는 것이, 매번 잘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는 아니니까요. 구멍에 빠져 갇히지 않고 구멍 밖으로 잘 나아가기 위해서 긴밀하게 연결된 가까운 것들을 이해하려는 노력, 매번 실패하더라도 조금씩이나마 나아져가는 발전을 게을리하지 않는 삶이 진짜 잘 사는 삶이라는 것을 배움을 여전히 많은 빈틈 사이로 채어 넣은 ‘서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