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기다리고 기억하는 한 행복하게 하는 약속

[리뷰] 영화 <그해 여름>

약속이란 현시점에서 앞으로의 일을 미리 정해 두는 것, 혹은 그 내용을 의미합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의 내일을 두고 감히 확신을 전제로 한, 그것도 언제 변할지 모르는 타인의 마음과 섣불리 포개려는 마음의 다짐인 약속은 그래서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있는 것인가 봅니다.

며칠 전 한 친구가 그러더군요. 인생 별거 없으니 즐겨야 한다고요. 사랑에 상처받고 사람에 마음 주는 대신 여기저기 쏘다니며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등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즐기느라 바쁜 그 모습이 얼핏 즐거워도 보였으나 그보단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찾느라 분주한 몸부림 같다는 게 솔직한 느낌이었습니다. 굳게 믿었던 한 편을 등진 체념과 단념이 다른 한 편을 향한 믿음과 확신이 아닌, 그저 등진 쪽을 절대 돌아보지 않으려는 혼자만의 결심으로 굳어진 것이 보였으니까요.

친구는 말했습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어. 반쯤은 닫아야지, 아니면 너무 다치거든.

그래요.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하지 않으니까 덜 상처받을 수 있어요. 약속하지 않으면 기다리지 않으니까 덜 괴로울 수 있고요. 생에 대단한 무엇, 커다란 의미가 있는 듯 굴면 피곤할 수 있죠. 차라리 아무것도 없다 생각하면 선택의 문제도 쉽습니다. 눈앞에 이익을 취하면 되고 본능에 충실한 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다보면 공허해지는 시점이 반드시 옵니다. 이게 다가 아닌 것 같고 내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도 될거에요. 본능은 같은 본능보다 더 높은 가치, 더 좋은 의미, 더 숭고한 목표를 추구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니까요.

영화 <그해 여름> 포스터

<그해 여름>의 정인은 월북한 아버지때문에 마을내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사랑하는 남자, 석영과의 관계에서도, 그리고 그 후의 나날들에서도 억울하고 불행한 처지가 됩니다. 시대가 그러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이유였으므로, 개인이 싸워 이길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이었으므로 그녀는 그 불행을 스스로 감당하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그녀가 취한 태도는 약속이었습니다.

우리 이다음에는 절대 손 놓지 말아요. 사랑해요.

편백나무 잎의 향이 사람을 부르는 힘이 있다고 믿었던 두 사람만의 암호를 위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무를 심었어요. 나뭇잎 하나를 따려고요.

이렇게 하나씩 나눠주다 보면 내 손 떠난 이 나뭇잎이 언젠가 그 사람 손에 가게 되겠죠?

그 암호 속에 숨겨진 세 마디 말을 전해주려고요.

나 잘 있어요. 나 걱정하지 말아요. 나 행복해요.

석영은 물고기들이 변해서 만들어진 돌들이 비만 오면 슬픈 종소리를 울린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진짜였다는 것을 후에야 알게 되었듯이, 불행 속에서도 약속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사는 한, 정인이 행복했다는 것을 그녀의 죽음 후에야 편백나무 저편에서 불어오는 향기로 알았을 겁니다.

그해 여름, 의미 없고 의욕 없던 한 남자의 삶이 한여름의 소나기와 같은 한 여자로 인해 흠뻑 젖고 물들었습니다. 물기는 금세 말라갔지만, 그날의 감촉, 향기, 흔적은 남아있어요. 그 장면에 대한 기억이 있는 한, 누군가와의 약속을 기다리는 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삶에서도 의미를 찾고 의욕 없던 태도에서도 생기가 돋아나는 것 같습니다.

영화 <그해 여름>

비록 죽기 전 꼭 만나고 싶었던 그녀의 죽음을 확인해버린 후였지만 그는 한층한층 쌓아 올린 돌탑 맨 꼭대기 위에 그녀의 유품인 물고기 돌을 올려요. 세상엔 없지만 그해 여름의 물방울처럼, 메아리처럼, 향기처럼 그녀가 그의 마음 깊숙한 곳곳에 살아있었거든요.

약속, 기다림, 믿음. 한쪽에서 돌아서면 끝나버리는 희망없는 단어들. 그래서 우리는 행여 다칠까 뒤도 안돌아보고 금새 방향을 틀어버리곤 말한 대로 닫힌 마음이 다치지 않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신에 그거 아세요?

편백 나뭇잎은 자연향균물질인 피톤치드를 함유하고 있는데 해충과 병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내뿜는 것이랍니다. 편백 나뭇잎의 향이 널리 퍼져 짙게 머무는 것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거죠.

정인의 약속, 기다림, 그 믿음은 그녀 스스로의 삶을 행복하다 믿게 했을 뿐 아니라 주변을 물들이고 잔향을 남겼으니 꼭 허황된 희망의 말들은 아닌 것도 같습니다.

그런 향기로 남고 싶은, 사라진 후에도 남아있고 싶은 ‘서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