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소설 읽는 시간

[리뷰] 루이스 세풀베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

안녕하세요. 글 쓰는 ‘서연’입니다.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총 두 달 반의 과정입니다. 함께 준비하는 사람들 모두 쉴 새 없이 달려오느라 지쳤을 때쯤, 브런치 타임을 갖고 친목을 나누었습니다. 이제 막바지인데 힘내자는 격려부터 이게 뭐라고 이렇게 공을 들이냐는 푸념까지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수다를 떨다 보니 그간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풀리더라고요.

역시 같은 길을 걷고 함께 돕는 사람들만이 앞으로 가야 할, 더 지난할지도 모를 길을 더 단단하게도, 부드럽게도 내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로 힘이 들었거든요. 중간에 포기한 사람들도 있었고, 조퇴에, 결석이 잦아지면서 진도가 뒤처져 두어배로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같은 입장이긴 했으나 아이에게 묶인 몸도, 직장에 속한 몸도 아닌 필자는 상대적으론 여유가 있었기에 한 발자국 떨어져 잠시 머리를 식히곤 했는데요, 마지막에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나눴던 푸념의 편에 서게 되더라고요. 서로들 응원해주고자 늘어놓았던 푸념이 제게는 꽤 진지하게 취하게 된 태도였습니다. 꼭 시험에 붙지 않더라도 배움은 내 안에 남았을 거고, 꼭 이 시험이 아니더라도 내겐 이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중요한 일들이, 꿈들이, 가치들이 있다는 것 말이죠.

그런 태도를 취했음에도 역시 시험은 시험인지라, 아무리 쿨해도 사람은 연연하는 법이라 어서 빨리 시간이 지나가기를, 그러다 모든 의무에서 벗어난 노년의 할머니가 되기를, 흔들의자에 앉아 좋아하는 책을 읽을 여유가 해야 할 일의 전부일 때가 되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질문하게 되었죠.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젊음도, 재산도, 사랑하는 배우자도, 그리고 존재가 거처할 마지막 삶의 보금자리마저도 잃었을 때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 과연 무엇일까, 하고요.

<연애소설 읽는 노인>(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 열린책들 출판)

제목만 읽고 선택한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분명 위와 같은 상태에 놓인 노인이 즐기는 취미생활을 통해 말년의 삶에 몇 안남은,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진정으로 중요한 삶의 재료들을 조명해주는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쁘게 쫓기는 시간 속에 모처럼 힐링이 되겠다고 기대하며 선택했는데요. 줄거리는 달랐지만 얻은 핵심은 비슷했기에 힐링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부인과의 사이에 자식이 없다는 것이 흠이 되어 고향 사람들에게 상처받은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는 아마존 원주민들에게 밀림에서의 생존법을 배우며 살아가게 되는데요, 부인과 사별 후 문명의 발달과 동시에 훼손되는 밀림 속에서 점차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게 되었을 때쯤 연애소설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러다 그에게 책을 가져다주는 좋은 친구인 치과의사를 알게 되죠. 그에게 유일한 삶의 낙은 천천히, 반복하며, 여유롭게 연애 소설을 읽는 것이었는데요.

음절과 단어와 문장을 차례대로 반복하는 노인의 책 읽기 방식은 특히 자신의 마음에 드는 구절이나 장면이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이를 방해하는 사건과 사람들이 있어요. 바로 암살쾡이에 살해된 시체와 그 시체를 찾고자 노인을 설득하는 뚱보, 읍장이었습니다. 읍장은 예전에 도시 권력과 횡포의 대변자인데 공교롭게도 그가 함께 사는 여자는 원주민인디오였습니다. 그를 두고 사람들은 여자의 마법에 걸려 그가 죽을 날을 꼽기도 했고요.

어차피 뚱보는 그 여자의 손에 죽게 되어 있소. 가슴에 품었던 증오가 폭발하는 순간 말이오. 원래 그런 일은 시간 문제가 아니던가요?

다른 무엇보다도 연애소설 읽는 시간을 방해받는 것에 가장 분개했던 노인은 읍장에 설득당하는 대신 그 뒤로는 자신을 방해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는데요. 결국 마지막엔 다들 마을로 돌아가고 노인 혼자만이 암살쾡이와 결투를 벌이게 됩니다. 자식들을 모두 잃은 암살쾡이는 인간을 향한 증오가 끝까지 차올라 복수를 하려는 모양인데 그것은 자살과도 같은 무모한 행위였죠. 녀석이 스스로 택한 것은 결국 죽음이었지만 인간들을 향한 마지막 한판 승부를 꼭 벌이고서야 죽겠다는, 삶을 걸어서까지 남기려는 교훈이었던 거죠.

노인은 암살쾡이와의 오랜 결투 끝에 암컷의 몸이 허공으로 뜨는 것을, 가슴이 열리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느끼죠.

생각보다 훨씬 큰 몸집을 지닌 짐승의 자태는 굶어서 야위긴 했지만 너무나 아름다워 도저히 인간의 상상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존재처럼 보였다. 죽은 짐승의 털을 어루만지던 노인은 자신이 입은 상처의 고통을 잊은 채 명예롭지 못한 싸움에서 어느 쪽도 승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렸다.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하는 것 같아도 상생하지 못한 이기성의 피해는 군림하는 자들에게 돌아옵니다. 뚱보 읍장이 아무리 높은 권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 권력의 횡포에 발목 잡히는 것은 그 자신이듯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쓸쓸한 걸음으로 그가 향하는 집에 대한 묘사인데요, “이따금 인간의 야만성을 잊게 해주는 세상의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얘기하는 연애 소설이 있는 그의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동물과 인간, 자연과 문명의 대비를 통해 상생과 조화를 형상화해내고 있지만, 곳곳에 엮인 에피소드들은 조직과 인간, 상하 구조에 놓인 관계에 대해서까지 생각하게 해요. 권력을 가진 정부, 읍장, 혹은 양키들과 노인을 비롯한 원주민들이 각 그 대척점에 놓여있죠. 거대한 구조보다 개인적이고 사소한 삶의 부분들에 눈길이 가는 저로서는 역시 숨겨진, 혹은 발견된 그 의미들에서 힐링을 받았던 거고요.

너무 바쁠 때, 그러다 지칠 때 해야 할 일은 ‘잠깐 멈춤’이라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치르는 이 싸움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굳이 그럴 필요 없는 것들을 향해 나도 모르게 전쟁 같은 싸움을 걸고, 스스로 저주에 걸린 악마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해요. 정말로 나를 살리고 들뜨게 하는 것은 세상의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얘기하는 연애소설 같은 것을 읽는 순간일 테니까요.

곱씹어 읽다가 마침내 그 뜻이 스스로 존중을 받고 일어나는 문장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에 삶의 모든 의미를 찾는 노인처럼요. 그 눈물이 육체와 영혼의 통로라는 것을, 그러므로 문명과 자연도, 동물과 인간도, 보다 높은 무엇과 가장 원초적 본능도, 무엇보다 삶과 죽음도 모두 하나의 연결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까지.

전쟁 같은 시험을 코앞에 두고 연애 소설을 읽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원하는 일인 노인을 엿본 것만으로 이미 시험에 합격한 서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