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부조리의 조리

[리뷰] 알베르 카뮈 <이방인>

다르고 낯설고 안쪽에 속해있지 않은 사람을 우리는 이방인이라고 부릅니다. 종종 이방인과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함께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는 형식의 허울을 벗으면 다들 나와 같지 않은 마음으로 연결고리가 뚝 끊어진 것 같은 외로움이 순간적 감정이 아닌 영원한 진실일 것 같은 때가.

세상은 무의미하고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나의 노력은 허망하고 처량해서 그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도 있습니다. 포기란 극단적 의미에서 삶과 다른 차원의 세계를 의미하기도 하고 현실을 직면한 사실적 세계가 아닌 현실을 외면한 피안적 세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두 회피일 뿐이죠. 그런 회피가 아닌 것 중 가장 손쉬운 방법은 허무주의를 지향하는 것이고요. 어떤 의미도, 가치도, 이유도 없는 이 세상에서의 버거운 삶을 형벌처럼 등에 지고 살아가는 존재들이 취할 수 있는 어쩌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희망 따윈 없으므로.

그래요. 희망이 없는데 희망을 말하는 것만큼 허무한 짓은 없으며 안 그래도 절망적인 존재를 또 한 번 기만하는 짓은 없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지워가요. 나에게서 너를, 너에게서 나를, 세상에게서 나를, 나에게서 나를, 서로의 이름을, 필요를, 온기를, 향기를···. 어차피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우리는 자칫 허무주의를 이렇게 해석하고 이렇게 살아갑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이는 얼핏 현명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카뮈는 말합니다. 그 허무의 한계 안에서 허무의 극복을 추구하는 것은 가능하며 그것만이 존엄성을 가진 인간이 할 일이라고요.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 민음사 출판

<이방인>의 뫼르소는 세상에 속해있지 않은 듯한 인물입니다. 어머니의 죽음에 무감각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르고 태양의 강한 빛 때문에 직접적 관계가 없는 사람을 살해하고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해요. 그래서 재판에서 자신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을 타인의 삶을 보듯 봅니다. 모든 일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의 평준화된 가치로 바라보는 그에게 마침내 사형선고가 내려진 후의 어느 밤 그는 참으로 오랜만에 죽은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그처럼 죽음 가까이서 어머니는 해방감을 느끼며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이 생겼을 것임에 틀림없다. (중략)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형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이 증오의 함성으로 자신을 맞아주었으면 하는 소원만을 갖은 채 여태껏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구경꾼들의 증오의 함성이야말로 곧 자신의 죽음을 포함한 삶의 부조리를 증명해주는 것이므로, 그것만이 이 세상의 진실이므로, 끝까지 거짓말하지 않음으로써, 끝까지 이방인으로 남음으로써, 즉 끝까지 부조리한 삶을 인식하며 견뎌낸 자신을 긍정함으로써 눈을 감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소위 해석하듯 허무, 부조리, 무의미는 그 단어 자체가 다인, 그 안엔 아무것도 없는, 그래서 마음대로 살아버리는 막무가내식의 삶이 아닙니다. 삶이 부조리하다면 그 부조리한 운명보다 더 큰 인간의 존엄성, 삶이 고통이라면 그 고통의 힘보다 더 센 인간의 의지 속에서 조리와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니체가 말한 초인 역시 허무를 극복한 긍정의 인간이고요.

부조리의 반어로써 조리란 삶의 본질적 법칙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본질이란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고요. 어떤 경우에도 숭고한, 절대적인 무엇.

그러니 아무리 삶이 부조리하고 무의미할지라도, 우리는 저마다 서로에게서 섬처럼 떨어진 이방인일지라도, 아픈 진실을 직면해야 할지라도, 그것들에 굴복하지 않고 그마저 긍정하며 운명보다 큰 내가, 고통보다 센 내가 되기로 해요. 부조리의 조리를 추구하며 행복해하기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