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믿는 선은 정말 윤리적일까

정의의 편에 섰다고 믿는 당신에게

[글 싣는 순서]

  1. 조국 사태, 아직 남아 있는 질문들
  2. 당신이 믿는 선은 정말 윤리적일까
  3. 윤리적 삶을 위한 두 가지 원칙

보편적 가치라는 위험한 유령

세상에, 21세기에 아직도 ‘보편적 가치’라니. 이 얼마나 꼰대스러운 말인가. 이 짧은 단어는 우리에게 ‘체력은 국력’이라고 적힌 운동장에 일렬로 서서 국민교육훈장을 읊는, 이제는 잊힌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 시대에 ‘보편적 가치’를 말하는 것은 이중의 어려움을 갖는다. 그 첫 번째는 ‘가치’를 말하는 것의 어려움이다. 과학의 시대에 신뢰할 수 있는 진리는 숫의 형태로 표현된다. 숫자는 누구라도 투명하게 비교가능하고 검증가능하고 반박가능하며 그래서 신뢰할만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 자유, 용기 같은 가치들은 어떤가. 그것은 측정할 수 없기에 비교하기도 반박하기도 우열을 가리기도 곤란하다.

문제를 더욱 어렵게 하는 것은 ‘보편’이다. 지난 역사에서 우리가 보아온 숱한 폭력들이 보편의 이름으로 저질러졌다. 신의 이름으로 벌어진 테러, 국가의 이름으로 강요된 희생이 그것이다. 이러한 폭력은 신이나 국가와 같은 거대담론이 한 개인의 삶보다 더 보편적이고 숭고한 가치라는 확신 위에 서 있다.

911테러(출처 CNN)

보편의 폭력은 거대 담론만이 아닌 일상의 영역에서도 발견된다. 당대의 도덕은 보통 당대의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 상식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상식은 소수자에게 이성애와 정상가족 등 다수의 기준을 강요하는 윤리적 폭력으로 작동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녹록하지 않다. 이 모든 난점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가치’는 우리 사전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먼저 ‘가치’를 살펴보자. 우리는 매일의 일상에서 추상적 가치들을 ‘실제’로써 경험한다. 일상의 수많은 결정 앞에서 우리는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자기 내면의 도덕감정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삶의 질적 차원은 결코 완전히 소거되지 않는다. 실제로 한때 공리주의자들은 ‘쾌락의 양’이라는 기준을 통해 다양한 질적 가치를 양적 가치로 변환하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기획이었다. 가치판단의 시초에 놓인 ‘더 좋은 쾌락’과 ‘나쁜 쾌락’의 질적 차원만은 끝끝내 변환되지 않고 남았다.

‘보편’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서구의 지식인들은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서구의 가치가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했다는 통렬한 자기비판과 마주해야 했다. 또한 인류학 연구에 크게 영향을 받은 구조주의는 서구의 가치가 보편의 가치는 아니며 하나의 사회구조에서 자라난 하나의 가치체계일 뿐임을 이야기했다. 이러한 맥락에 의해 수면 위로 떠 오른 문화상대주의의 흐름은 한동안 전후의 사유를 주도했다.

하지만 이 흐름도 영영 지속하지는 못했다. 참담한 현실과의 대면이 만든 충격 때문이었다. 솔제니친이 고발한 강제수용소의 참상, 그리고 소련군에 의해 벌어진 헝가리 혁명의 유혈진압은 사람들에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라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보편적 가치의 남용이 만드는 폭력이 위험한 만큼 보편적 가치의 부재가 방치한 폭력 또한 끔찍할 수 있음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이렇듯 보편적 가치란 자칫하면 우리를 집어삼킬 수 있지만 그렇다고 삶에서 완전히 제거해버릴 수도 없는 위험한 관념이다. 더욱 위험한 것은 이 관념을 없는 것으로 취급하며 외면하고 방치하는 태도다.

지금 보편적 가치는 존재하지만 언급할 수 없는 유령의 모습으로 우리사회를 떠돈다. 그리고 이 유령은 우리의 부정에도 사라지지 않고 극단의 언어 속에 불길하게 출몰한다.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가 보편적 가치를 말해야 하는 이유다.

도덕과 윤리

한 걸음 더 논의를 진전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옳다고 느낄까. 여기 우리가 숭고함을 느끼는 두 개의 장면이 있다. 하나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시민을 구한 순직 소방관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5월의 광주에서 자신에게 내려온 발포명령을 거부한 군인의 모습이다.

전자는 내면의 두려움을 이겨내며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을 끝까지 지켰고, 후자는 내면의 목소리를 쫓아 자신에게 주어진 부당한 명령을 거부했다. 바로 이 내면의 음성과 외부의 음성 사이에 윤리적인 것은 태어난다.

사진=셔터스톡

푸코는 우리가 따르는 가치를 도덕과 윤리의 두 범주로 구분한다. 먼저 도덕은 가정, 학교, 교회 등 다양한 사회제도를 통해 개인에게 주어지는 가치체계다. 즉, 도덕은 우리의 외부에서 결정되고 보편적으로 공유된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이다.

반면 윤리는 우리가 내면을 통해 스스로 결정한 가치체계다. 진정성을 추구하는 윤리적 주체는 자신에게 주어진 도덕의 명령을 마냥 수용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도덕의 명령을 일단 멈춰 세우며, 숙고를 통해 스스로 동의하고 선택한 가치만을 따라야 할 명령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시작된 개인의 윤리적 실천은 때로 견고했던 도덕의 지위를 흔들어버린다.

보편적 가치로서의 도덕은 영원불변하는 진리가 아니며 오히려 개인의 윤리적 결단을 통해 도전을 받고 의문시되며 끊임없이 재정립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윤리적 주체에게 필수적인 한 가지 능력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주어진 도덕의 명령을 숙고하고 판단하는 사유능력이다. 그런데 이때 말하는 사유능력은 일반적인 의미의 지능, 즉 최적의 경로로 목표를 향해 질주할 수 있게 돕는 전략적 판단능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질주하던 걸음을 멈춰 세우는 능력, 지금 내가 달려가고 있는 이 목표가 정말로 추구할만한 것인지를 끊임없이 반문하는 의심의 능력이다. 또한 이것은 어제 나의 마음을 뜨겁게 했던 윤리적 결단이 오늘의 현실에서는 낡은 도그마가 될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유연함, 그리고 낯선 결론 앞에서 스스로를 바꿀 줄 아는 용기를 요구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유능력은 유연하게 생각하겠다는 개인의 다짐만으로는 달성되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세계가 동질적인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우리가 이 세계를 의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의심은 기존의 가치체계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실의 반례를 통해 싹트고 현실의 근거를 통해 힘을 얻는다.

모든 유연함의 힘은 우리가 발 디딘 현실로부터 나온다. 그 때문에 유연함은 단순한 관념적 가치, 추상적 성품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에서 확인 가능한 매우 구체적인 행동원칙, 바로 자기 생각의 반례를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듯 현실의 작은 균열을 외면하지 않을 때 그렇게 시작된 개인의 윤리적 결단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우리의 현실과 모두의 원칙을 조금씩 바꾸어낸다.

진영논리는 왜 나쁜가

이제 다시 지난 가을의 광장으로 돌아가 보자. 진영논리에 의해 찢어진 광장은 동질적인 생각만이 끝없이 증폭되는 확증편향의 공간이었다. 먼저 광화문을 살펴보자.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검찰개혁의 구호는 정권의 검찰 길들이기였고, 검찰의 무리한 기소는 공소시효를 넘기지 않고 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여겨졌다.

반면 서초동에 모인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에게 검찰의 수사는 개혁에 저항하기 위한 먼지털이식 수사였고, 이때 조국 가족의 모든 잘못은 ‘그깟 표창장’이 되어 한없이 가벼워졌다. 그사이 남아있던 의문, 그렇다면 이제 우리사회의 원칙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출처 MBC 뉴스데스크

이런 극단화의 이면에는 손쉽게 상대를 악마화하는 왜곡된 인식이 존재한다. 자기 일에 자부심과 소명의식을 갖고 일하는 많은 직업인을 거리낌 없이 ‘개검’ 혹은 ‘정권의 개’로 단정해버리는 태도가 그것이다.

한 집단의 과오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을 사회의 평균과는 완전히 다른 도덕관념을 갖고 있다고 상정하는 것은 부당할뿐더러 문제해결에도 방해가 된다. 그들은 사회의 불의에는 단호하게 분노하지만, 주변의 문제 앞에서는 자꾸만 관대해지는 우리 모두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다.

가까운 이들을 향하는 우리의 평범하고 다정한 마음이 넓은 재량권을 만날 때 권력의 남용은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지금의 악마화가 가진 위험이 있다. 상대를 악마화하는 것은 내가 속한 진영의 잘못을 가리고 우리를 내 편에 한없이 관대해지게 하는 것이다. 이 모습은 실상 우리가 비판하던 바로 그들의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이렇듯 진영논리로 양분된 광장은 윤리적 주체를 질식시키는 무사유의 공간이 됐다. 그런데 이 모습은 결코 낯설지 않다.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손쉽게 보수화 우경화로 낙인찍어 더 들을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던, 이견 속에 담긴 타인의 현실적 곤란을 무책임하게 누락하고 대답조차 없이 방치했던, 결코 낯선 것과 조우하지 않고 그래서 단 한 발짝도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못했던, 그것은 바로 PC주의와 청년담론에서 지난 몇 년간 진보가 일관되게 보여주었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주어진 현실과 사회의 원칙, 그리고 내면의 목소리라는 세 가지 축에 의지해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을 내린다. 그런데 진영논리는 우리에게 현실의 반례를 가리고 사회의 원칙을 무화하며 오직 진영의 선의에 대한 믿음만을 남겨두라고 말한다.

주권자는 결단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진영논리는 판단의 근거를 빼앗아 우리를 아무것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존재로 만들며 이제 그만 자신들을 믿고 주권자의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유혹한다.

그 가을의 광장에서 한 진보인사가 물었다. “진영논리가 왜 나쁘냐”고. 그런데 착각하지 말자. 내 생각의 반례를 마주하지 않는 이 질문은 사유의 유연함이 아니라 사유의 무책임함을 보여줄 뿐이다. 진영논리는 나쁘다.

그리고 진영논리를 옹호하는 지금의 진보는 더 나쁘다.

참고

  • 찰스 테일러 <자아의 원천들>
  •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