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 삶을 위한 두 가지 원칙

[글 싣는 순서]

  1. 조국 사태, 아직 남아 있는 질문들
  2. 당신이 믿는 선은 정말 윤리적일까
  3. 윤리적 삶을 위한 두 가지 원칙

우리가 마주한 윤리의 난제들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하는 윤리적 주체로 살겠다는 우리의 결심은 그러나 현실 앞에 이내 막막해진다. 현실공간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우리가 마주한 윤리적 과제의 난이도는 순식간에 성큼 몇 단계를 뛰어 올라가 버리기 때문이다.

현실은 우리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두 가지 제약조건을 마주하게 한다. 그 중 첫 번째는 총체성의 상실이다. 지난 세기 인류가 경험했던 악은 기존의 예측과 판단능력을 넘어서는 전대미문의 것이었다. 거기서 알게 된 사실은 너무나도 거대하고 복잡해진 사회에서 우리가 점점 세계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총체성의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돌프 히틀러

또한 지속적인 기술의 발전은 이 문제를 더욱 심화시킨다. 갈수록 더 빠르고 더 복잡하며 더 광범위하게 변화하는 유동화된 세계에서 개인이 내 앞에 놓인 현실의 총체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어쩌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이에 더해 두 번째 제약은 상황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금-여기’에서 모든 판단과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이야기하듯 역사적 사건의 의미는 언제나 사후적으로만 드러난다.

하지만 우리가 폭주하는 기관차를 멈춰 세울 수 있는 시공간은 오직 아직 모든 의미가 결정되지 않은 순간, ‘지금-여기’뿐이다. 즉, 우리가 윤리적 주체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직 모든 의미가 결정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순간에 개개인이 스스로 제 몫의 윤리적 사유와 결단을 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실의 불가능한 요구는 우리로 하여금 자꾸만 윤리적 주체의 자리에서 뒷걸음치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의 귀에 달콤한 유혹을 속삭인다.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누군가에게 윤리적 판단을 양도하라는 유혹, 그러면 나는 이 모든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 그러다 혹시 무언가 잘못된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것은 나와 무관하며 오판의 책임은 오롯이 그 누군가의 몫이 될 것이라는 유혹, 그러므로 이제 그만 판단하고 결정하는 주권자의 자리에서 내려오라는 유혹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런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 책임의 무게를 벗어 던진 사유는 현실에서 유리돼 가볍고 명쾌해진다. 더 이상은 복잡한 사회구조도, 내 생각의 반례도, 선택이 야기할지도 모를 역효과도 고려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설명은 그저 ‘문프께서 선택하셨으니’와 같은 한 마디로 충분해진다.

출처 공지영 작가 페이스북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매혹적인 유혹에 지지 않고 윤리적 주체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까.

윤리적 주체를 위한 두 가지 원칙

윤리적 주체의 자리를 지켜내기 위한 첫 번째 원칙은 바로 무지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식이 가진 의의와 한계를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 지식은 오랫동안 우리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힘이 돼왔다. 지식은 우리가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고 관리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그것은 대학과 학위라는 교육기관과 인증제도를 통해 효율적으로 계승되고 전문적으로 발전해왔다.

하지만 이런 지식은 이해의 틀인 동시에 편견의 틀이기도 하다. 과거의 사건을 통해 사후적으로 정립되는 지식으로는 현재 사건의 의미를 온전히 다 파악할 수 없으며, 지금의 분화된 지식체계는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세계 전체를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데 한계를 드러낸다.

또한 학위제도를 통해 강화되는 구별 짓기는 스승을 통해 지식을 전수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 위계를 만들어 지식의 계보 밖에 있는 사유가 자라나지 못하게 한다. 즉, 지식은 내 몫의 판단을 위한 근거일 뿐 정답은 아니다. 지식권력이 아무리 근사해 보일지라도 우리는 결코 그것에 내 몫의 판단과 내 몫의 책임을 양도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나 자신도, 타인도, 세계도 그 무엇 하나 온전히 알지 못한다. 그런데 내가 마주한 이 무지 속에 더 나은 윤리의 가능성은 숨어있다. 총체성이 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내 몫의 진리의 파편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이 무지의 자리를 포기할 때 앎은 사라지고 우리의 안다고 믿는 것은 누군가를 향한 폭력이 된다.

출처 YTN

윤리적 주체의 자리를 지켜내기 위한 두 번째 원칙은 바로 서로에 대한 불완전함을 수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지금-여기’는 아직 사건의 의미가 완전히 결정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순간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불충분한 앎과 해결되지 않는 무지 속에 살아간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폭주하는 기관차를 멈춰 세울 수 있는 시공간이 바로 ‘지금-여기’뿐이라는 점이다. 즉, 우리는 불충분한 근거 속에서 불완전한 결과를 각오하며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사유하고 판단하고 결단하고 행동하는 수밖에 없다.

또한, 이는 우리가 서로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면 그 어떤 판단도 그 어떤 결단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현실에서 유리된 이상주의와 과도한 완벽주의가 위험한 이유다.

그런데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와 과도한 완벽주의는 한 가지 조건 아래에서만 자라날 수 있다. 바로 ‘예외’다. 모든 원칙은 얼마간 그것을 강제하는 사회적 압력을 갖는다. 그리고 그 압력이 과도해질 때 우리는 그 원칙을 윤리적 폭력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내가 세운 원칙에 대해 나만은 예외가 된다고 가정해보자. 그 경우 나는 내가 세운 원칙이 행사하는 윤리적 폭력의 크기를 가름할 수 없다. 이렇듯 스스로를 원칙의 예외로 만드는 ‘내로남불’은 원칙과 현실 사이에 있어야 할 되먹임의 연결고리를 끊어 우리를 현실의 지반에서 분리시키고,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린 이상은 결코 지킬 수 없는 완벽함의 모습으로 극단화된다. 이러한 위험은 우리에게 보편은 아직 유효한 가치임을 설득한다.

다시 공정을 생각하다

이제 다시 지난 가을의 광장을 떠올려보자. 그곳에서 촛불을 든 학생들은 ‘조국의 자녀들이 누린 특혜는 공정하지 않다’고 외쳤고, 비판자들은 ‘네가 가진 학벌의 기득권은 공정한가’라고 맞섰다. 그리고 이렇게 공정에 공정이 겹쳐지며 결국 공정을 말하는 것 자체가 불공정한 것이 됐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자. 그럼 도대체 무엇이 공정이란 말인가?

서울대·고려대 촛불집회(출처 KBS)

먼저 게임의 출발선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모두 다른 환경, 다른 성격, 다른 외모, 다른 건강, 다른 재능을 갖고 태어났다. 그 때문에 출발선에서의 공정은 그 실현은 물론 정의조차 쉽지 않다. 우리 모두가 서로의 클론이 되지 않는 이상 모든 측면에서 완벽히 공정한 출발선은 절대 불가능하다.

다음으로 게임의 룰을 떠올려보자. 이 또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정시든 수시든 세상의 모든 평가방법은 그 측정기준과는 다른 능력을 갖춘 사람들에게 불공정하다. 다음으로 게임의 결과를 떠올려보자. 우리는 보통 승자독식이나 무임승차를 불공정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사이의 어떤 방식이 공정한지에 대해서는 아직 합의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게임 자체는 어떤가? 우리는 왜 이 게임을 해야 하는 걸까. 우리 사회가 만든 분배의 게임과 계층의 사다리는 지금의 체제를 유지하고 누군가를 정당하게 배제하기 위한 수단은 아니었던가? 바로 이런 난해한 물음들은 우리에게 공정함이라는 개념을 다루는 데 있어 우리가 가진 근원적 한계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렇듯 공정함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공정함에 대한 논의를 끝내버리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한계는 우리에게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나의 공정 또한 완벽하지 않음을 기억할 때 너의 공정은 사라져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할 것이 된다.

우리는 모두 무지하고 불완전하다. 그런데 바로 이런 한계를 외면하지 않고 내 몫의 책임으로 끌어안을 때 비로소 윤리적인 것은 시작된다. 곱씹어볼수록 놀라운 일이다.

참고

  • 지그문트 바우만 <유동하는 공포>
  •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 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