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고 시리게 사라졌던 전설, 김경천 장군

[리뷰] 이원규 <김경천 평전>

어느 일기 속 한 대목이다.

4253년(단기·서기 1920년) 1월 첫날은 소왕령(러시아 우스리스크) 스와놉스까야 거리 러시아인 집에서 서오성씨와 더불어 새해를 맞았다. 삼천리강산 이천만 동포를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망명한 첫번 새해다. 이렇게 쉽게 해를 보내다가는 큰일이다. 나는 ‘아아, 왜 밖으로 나와서 허송세월하는가’ 하고 가슴이 막힌다. 겁이 난다. 조국에 죄를 짓는다.

-<경천아일록>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이름도 낯선 이역만리 땅에서 생을 걸고 조국을 위해 싸우려던 사람 하나 있었다. 경천(擎天) 김광서 장군이다. 의암 유인석과 홍범도가 몸담았던 13도 창의군을 이은 항일의병장 1.5세대쯤 될까.

그의 삶과 숱한 전공은 무장독립운동 행적 가장 첫 번째 반열에 올려도 손색없다. 소설가 이원규 선생이 빚은 <김경천 평전>을 읽었다.

<김경천 평전>(이원규 지음 / 도서출판선인 출판)

시작은 김일성이었다. 1994년 혹서 복판에 사거했으니 그가 세상을 뜬 지도 25년이 훌쩍 넘었다. 그 세월이 무색하게 요즘 학교 현장에서 그의 이름이 심심찮게 들린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김일성은 항일 민족 영웅이다”라는 말이었다.

사람이나 사건에 서툰 편견이나 얕은 지식을 묻히긴 싫었다. 평가를 하기보단 저 말이 사실에 가까운지 알아보고 싶었다. 검색해보니 조선족 출신의 재미작가 유순호가 쓴 <김일성 평전>이 나와 있다. 이 책은 북한에서 별 검증 없이 찬양과 흠숭 일색으로 편찬해 낸 여느 책과 달랐다.

인간 김일성 아니 김성주를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 소년 김성주가 사회주의 사상과 독립전쟁에 관심을 쏟으면서 마주하는 이름은 예상대로 일성, 백마 타고 시베리아와 연해주에서 눈부신 전투를 펼치는 김 장군이었다. 경천 김광서.

이원규 선생의 책은 검색을 거듭하다 만났다. 책을 읽으며 그래도 이름난 독립운동가들의 평전과 삶은 한두 번쯤 접한 줄 알았던 오만이 깨져버렸다.

그는 황실이 선정한 일본 유학생이었고 일본 육군유년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 도합 16년에 걸친 정통 군사 교육을 이수한 뒤 일본군 사령관이 공인하고 높이 평가한 기병 장교가 됐다. 윤치호, 이용익, 최린, 최남선과 교호하고 우리 군의 비조격이라 할 지청천, 이범석, 이응준, 홍사익, 김석원을 후배로 두었던 사람이었다.

1911년경 김경천과 아내 유정화(출처 김경천 평전)
기병장교 시절의 김경천 장군(출처 김경천 평전)

연해주와 시베리아 항일 무장 투쟁의 중심, 아니 어쩌면 거의 대다수 독립운동가가 항일무장투쟁을 떠올리면 가장 첫손에 꼽는 사람이 김 장군이다. 책 속엔 남한의 조병옥, 장택상이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응준과 나눴던 대화가 나온다. 왜 이렇게까지 단언을 하는지 책을 읽어보면 안다.

이원규 작가의 책은 빚었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이다. 우리말,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자료 등을 수집하고 독파했는데 그 수와 수준이 엄청나다. 사실 김원봉이나 김산, 조봉암 등 굴곡의 근현대사를 치열하게 살았던 인물을 조명해 세상이 주목하기까지 된 데에는 그의 공이 적지 않았다.

<김경천 평전>이 출판된 2018년 저자의 나이는 일흔셋이었으니 노 작가의 공력이 장군의 전과 속에서 더불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평전이 전하는 김 장군의 생애는 눈부시고 눈물겹다. 구한 말 최고의 엘리트 생도(당시 일본 육사를 졸업하면 고등고시에 합격하고 임명되는 군수 정도의 권한을 주었다고 한다)가 부귀영화, 권력을 뒤로 하고 동지 몇과 단숨에 만주, 간도 땅으로 잠입한다.

3·1 운동 뒤끝이었고 그에 앞서 총독부와 조선주둔군의 공작으로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그의 부형 죽음 뒤였다. 처와 여식 셋. 아예 없는 셈 치자던 그의 체관이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최근 많이 언급되는 신흥무관학교에서 지청천, 이범석, 신동천 등과 교관으로 일하며 청산리, 봉오동의 주역들을 배출했다. 이어 연해주 땅으로 전략적 이동, 수청 적양촌이라는 곳에서 군정사령관으로 봉직하며 민정까지 대과(큰 허물이나 잘못. 편집자 주)없이 챙겨나가는 모습에선 통제영의 충무공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는 이곳에서 특히 마적들의 침입을 격퇴해 나간다.

때는 러시아 내전. 연해주 땅에서 적백 군대가 치열하게 전투 중이었다. 일본을 비롯한 이른바 러시아 혁명간섭군은 직간접적으로 내전에 개입하는데, 만주와 연해주 지방에서 창궐했던 마적단을 용병처럼 부리며 적(赤)군과 우리 동포들을 탄압했다.

당시 적군의 수뇌 레닌의 지원으로 조선 독립의 여망이 부풀었던 우리 의병들은 러시아 내전이 적군의 승리로 끝나야 독립에 유리한 정세가 조성된다는 결론 아래 적군과 함께 싸워나가는 중이었다. 그가 관여하지 못했던 간도참변과 고질적인 당파 싸움으로 빚어진 자유시참변 같은 패배, 비극을 제외하곤 그의 군대는 연전연승을 거뒀다.

특히 연해주 이만이라는 지역에서 백군과 일본군 900여명을 섬멸하며 거둔 승리는 아직도 회자되는 명 전투라고 한다. 규모의 차이가 있을 테지만 청산리, 봉오동, 어랑촌의 승리 못지않게 우리 독립사에 올릴 만한 귀하고 위대한 승리였다. 이때만 해도 김 장군은 독립전쟁으로 올 해방이라는 장래와 가족들과의 행복을 머릿속에 그렸을지 모른다.

순조롭게 이어갔고, 이제 장래의 대한독립을 그리던 그의 삶에 암운이 드리워지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러시아 내전이 적군의 승리로 돌아간 뒤, 장군은 간난고초 사선을 넘은 가족과 연해주에서 재회했다. 내전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 설립된 극동고려사범학교에서 일본어와 군사학을 가르치게 된다. 이 잠깐의 시절만큼 장군의 삶이 평탄한 적은 없었을 테다.

레닌이 죽고 후계를 이은 스탈린의 지시로 연해주 한인사회에 피바람이 분다. 숙청과 혹한 지방으로의 유형. 연해주 조선인들이 일본과 내통했다는 혐의였다. 장군과 그의 가족도 휘말릴 수밖에 없었으며 러시아 내전 때 장군이 쌓았던 혁혁한 전과는 몰아치는 숙청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평전의 결말일 그의 최후는 적지 않는다. 이 책은 더 많은 사람이 읽어야 한다. 그의 유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939년 카자흐스탄 수용소 입감 전(출처 김경천 평전)

위대한 민족영웅, 우리 군의 뿌리

‘위대한 민족 영웅 김일성’이라는 말에서 저 김일성이 북한 3대 승계를 한 그 자를 이름이라면 상당히 당혹스럽다. 이건 이념도 정파의 문제도 아니다. 사실과 급의 문제다. 해맑고 무구하게 사회주의와 독립운동을 추종했던 소년 성주에게 백마 탄 김 장군의 별호였던 ‘일성’은 가지고 싶은 무언가였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이 별호를 마치 고급 아이템처럼 차용하는 이가 숱하게 많았다고 한다.

두 번째, 급의 문제. 청년 김일성의 최대 치적이라 할 보천보 전투를 호외 특종으로 전한 동아일보 기사를 다시 읽었다. 일본 행정관료 수명이 사상했다. 역으로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죽거나 다친 동북항일연군의 숫자가 더 많았다. 주재소, 면사무소 등 벽촌 가장 작은 행정기관들을 습격한 소동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유순호 작가의 <김일성 평전>에 따르면 청년 김일성은 실상 보천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에 비하면 몇십 차례 그악한 마적과 싸우고 백군, 일본 연합군과 겨루고, 고관대작을 폭사상했던 숱한 독립 의·열사들은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김일성의 말년을 그린 한 논픽션에서 그가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보고 온통 거짓투성이라며 부끄러워했다는 대목을 보았다. 사람이라면. 그래도 지도자라면.

‘위대한 김일성 영웅’ 사건으로 볼 때 학교 현장에서 벌어지는 편향보다 더 우려스러운 건 교육의 수준이다. 필시 저 말이 나왔던 배경에는 20대 때 아무 비판 없이 1인 수령 체제를 추종하고 그와 더불어 사상이라고도 정의할 수도 없는 ‘주체사상’을 돌아가며 학습했던 얕은 지식이 있을 거로 생각한다.

학설, 더군다나 교육을 예비하는 학설은 거듭 검증되고 끊임없이 연구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일각에선 진짜 김일성 장군은 경천 김광서가 아니라 제3의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자료가 있고 타당하다면 찾아 읽고 싶다.

1921년 연해주 파르티잔 활동가들 모임(출처 김경천 평전)

평전을 읽으며 또 하나 떠올랐던 생각이 있다. 지난해 현충일 대통령이 했던 발언이다. 우리 국군의 뿌리는 김원봉과 광복군이라는 말. 김원봉(일본과의 본격적인 전투를 위해 화북지대로 건너가려다 태항산에서 순국한 윤세주의 숨은 공을 대부분 이야기하지 않는다)의 의열단, 거기에 이은 조선의용대, 발전한 조선의용군이 한국 국군의 시발점이라는 주장이었다.

충칭 임시정부의 한국애국단에 이은 광복군(조선의용군과 합병) 이전에 북로, 서로 군정서도 있고 임시정부의 연통제도 수송부대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 군 첩보 부대의 기원이라면 대한제국 시기의 제국익문사도 거론할 수 있다.

한국군의 기원을 찾으려면 더 복잡하고 지난한 학술적 논의와 합의가 필요하다. 해방 후 미군정의 군사영어학교가 국군창립의 모체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간도특설대, 만주군관학교, 김경천 장군과 지청천, 이범석, 이응준(몇몇 군 출신은 초대참모총장 이응준을 우리 국군의 산파라고 부른다)이 나왔던 일본육사 역시 우리 군에 인력을 불어넣었다. 잡탕에 혼종인 한국군 창설의 연원을 대통령이 선언하면 지어지는 것인가?

현충일 추념식에 국군 통수권자로서 선언을 해버렸다는 데서 절망을 느꼈다. 옆의 참모들은 책을 하나 안 읽고 혹시 대학 때 스터디한 지식으로 이렇게 어마어마한 연설문을 작성하는 걸까. 부끄럽고 아픈 역사는 언급하지 않고 빛나고 내세울 만한 역사만 짚으면 일본 우익과 다른 건 뭘까.

새해에는 일본 육사 출신 독립군 장교들의 기록과 연해주 지방에서 활약하던 독립 선열들을 공부해보려고 한다. 거듭 공부하고 새로운 자료가 나오면 독파해 묵고 고여 있는 이른바 썩은 지식을 타파해 나가자는 것이 올해 다짐 가운데 하나이다. 이 분야에선 동국대 이기동 교수와 수원대 박환 교수의 저작이 선제적이다.

일생을 지망생으로 살았다. 기자지망생이었다, 가수지망생, PD지망생을 거쳐 취업지망생까지. 지망은 늘 지망으로 그쳤고 이루거나 되지 못했다. 현재는 이야기를 짓는 일을 지망한다. hhwanhee@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