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연인, 그리고 독재자

지난해는 한국 영화가 시작된 지 100년이 된 해였다. 이 100년 동안 숱한 감독, 배우, 제작진이 재능을 발하며 명멸해 갔다. 오늘 이야기할 한 부부 역시 한국 영화사, 아니 북한까지 영향을 끼쳐 한반도 영화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필모그래피의 양뿐만 아니라 질을 향상시켰고, 거기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생애까지 더했다. 감독 신상옥, 배우 최은희 부부 이야기다. 프랑스 출신의 감독 폴 피셔가 그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김정일 프로덕션>이라는 책으로 기록했다.

<김정일 프로덕션, 세상에서 가장 황당하고 대담한 납치극>(폴 피셔 지음 / 한울 출판)

신상옥은 1960~1970년대 한국 영화의 파워맨이었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한 해 수십 편의 흥행작들을 감독·제작했다. 아내 최은희를 비롯해 신영균, 남궁원 등을 전속 배우로 기용했고 한국 영화사 최고의 스타라는 신성일을 발굴해냈다.

무성에서 유성영화로 건너오는 복판에 신 감독이 있었고, 13mm 렌즈와 250mm 줌렌즈를 최초로 도입했던 감독 역시 그였다. 한마디로 1950년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돼버린 한국 땅에 영화로써 윤기를 냈던 감독이었다.

문희, 윤정희, 남정임 1세대 트로이카 이전에 최은희가 있었다. 그녀는 푸근하면서도 세련되고 도회적인 인상으로 수십 편 영화에 출연하며 한국 영화의 얼굴로 군림했다. 이 전설 같은 두 사람의 결합과 행보는 세간의 말초적 관심부터 시대적 주목의 대상이 됐다. 그런 그들이 어느 날, 이 땅에서 증발했다. 영화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책은 북한 김정일 당시 선전선동부 부장의 지시 아래 홍콩에서 납치돼 동력선으로 북한 남포항까지 실려와 새로운 삶을 살게 됐던 두 연인과 독재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감독 출신의 저자는 피랍 당사자였던 최은희 배우는 물론 수십 여명의 탈북자를 인터뷰하고 여러 자료를 섭렵하고 소화해 아주 긴 호흡으로 이 과정을 서술한다.

보통 영화 한 편 제작하는데 길게는 5년, 짧게는 1~2년의 사전 취재가 선행된다는데 그 탓인지 집요하고도 세밀한 기록이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마치 카메라가 부감부터 줌아웃, 포커스인 하는 식으로 시공간적 배경을 앵글 전환하듯 넘나드는 솜씨가 그만이다.

책이 단순히 두 연인이 체험한 비상식적 상황과 몇몇 흥미 요소에만 주목했다면 호사가의 자료 리스트에만 두어도 됐으리라. 저자는 1945년 해방 후부터 남북한의 상황과 정치적 배경은 물론 정치 지도자들의 인상을 거쳐 신상옥, 최은희가 북한에 납치되면서 맞닥뜨렸던 당시 상황에 이르기까지의 사건(史件)을 망라한다.

특히 최은희의 증언을 빌려 서술된 김정일의 초상과 그의 행태는 흥미롭다. 지독한 영화광이라는 데서 비롯됐을 그의 허황한 사고방식들이 남한, 일본, 범아시아 수천 명을 납치해 가족들이 생사도 알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제임스 본드 같은 첩보, 특수 임무 영화를 현실과 혼동할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 KAL 민항기 폭파 사건,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 사건까지 그의 지시 또는 묵인 아래 벌어진 이유이다.

그뿐 아니라 무척 변덕스러웠던 그의 성미와 괴팍무도한 정략, 사치스러운 소비 향유 행태 때문에 수십 만이 정치범 수용소에서 고통받고 비인권적으로 학대 받으며 마약, 위폐 등의 범죄에 북한이 앞장서게 됐다.

노쇠한 김일성에 이어 실권자로 등장한 그가 구상한 집권 후 민심 수득 전략은 문화, 특히 영화였다. 그 어떤 문화 수단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영화를 제작해 아버지 김일성은 물론 대를 이어 세습한 자신까지 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남한 영화계 파워맨 신상옥, 최은희를 납치했다고 그는 서슴없이 고백한다.

책은 재미있다. 저자의 서술이 마치 감독의 카메라 워킹 같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두 연인의 우여곡절이 조마조마하고 지옥보다 더 지옥 같은 과거 북한의 상황에 울불이 난다.

그처럼 어마어마한 짓과 실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생각하는 위대한 김정일 지도자 동지를 보면 차라리 그가 가상의 인물이었기를 간절히 바라보기까지 한다. 현실은 그때보다 더 나빠졌는지 요 몇 년 새 탈북해 온 이들의 수기나 증언에 따르면 참혹함을 느낄 뿐이다.

책과 함께 2016년에 개봉한 영화 <연인과 독재자>를 보면 좋다. 책 속 증언과 기록의 훌륭한 시청각 보조 자료를 제공한다. 김정일, 신상옥의 육성을 들을 수 있고 사건 당시를 재연하거나 부연한 영상 자료가 풍부하다. 쇠잔해진, 그러나 여전히 꼿꼿해 당시를 똑똑히 증언하는 최은희 배우의 모습은 그 자체로 역사처럼 느껴진다.

영화 <연인과 독재자> 포스터

지난 8일 문재인 대통령 신년 연설에서 여러 언론이 비평하기를 가장 중심이 됐던 이야기는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향한 답방 요청이었다. 참 한결같다. 북한 측의 숱한 조롱과 비난, 비상식적 대응을 보고도 여전히 간구하고 호소한다. 계속 지원한다. 욕을 먹고, 이 같은 방침에 국민의 지지를 못 받아도 끈질기다. 우직함이랄지.

몇 년 전부터 탈북인, 재중 북한 인권 운동가들의 기록을 들여다본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이래 더 악랄하고 교묘해진 통치 술기와 혼돈의 상황, 인권이나 존엄은 미제 돈 몇 불이면 좌우될 만큼 곤두박질쳐버렸다고 한다. 북한을 향한 무한한 호소와 지원이 반드시 성과를 거두길 바라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과연 플랜B는 있는 걸까. 이것은 이념 문제가 아닌 인류 보편 인권의 문제이다.

한국은 물론 북한 인민들의 “영화에 대한 안목을 만든” 전설적인 감독 신상옥과 배우 최은희 부부가 겪은 ‘고난의 행군’을 보며 결국 북한을 생각하게 됐다. 이 책을 읽은 뒤 당대 김정일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을 그의 삼남 김정은의 왕국을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재미와 더불어 큰 수확이다.

한편, 최은희 배우는 지난 2018년 4월 16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그보다 앞서 2006년 신상옥 감독은 세상을 떠났다. 평생의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두 사람은 지금도 어떤 차기작을 만들지 머리를 맞대고 구상 중일 테다. 두 분의 안식을 빈다.

일생을 지망생으로 살았다. 기자지망생이었다, 가수지망생, PD지망생을 거쳐 취업지망생까지. 지망은 늘 지망으로 그쳤고 이루거나 되지 못했다. 현재는 이야기를 짓는 일을 지망한다. hhwanhee@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