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페미니즘의 옳고 그름을 이야기해야 한다

지난 5월, 홍대 몰카유출과 혜화역 시위라는 일련의 사건으로 페미니즘 이슈는 다시금 우리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특히 홍대 몰카유출 사건을 기점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의 목소리도 눈에 띄게 높아졌다. 홍대 몰카유출 사건은 명백히 한 사람의 사회적 존엄을 유린한 범죄다.

<한겨레>는 이 사건을 보도한 5월 8일자 지면에서 손희정 문화평론가의 말을 인용하며 ‘내가 남에게 어떤 폭력을 가했는지 스스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들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필자는 이 기사를 보며 이번의 안타까운 사건이 페미니즘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그 외연을 돌아보는 뼈아픈 성찰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했다.

때문에 지난 5월 28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보며 참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기사에서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를 비롯한 페미니스트 4인은 ‘남성혐오’를 과도기적 현상이자 여성운동의 전술로 규정하고, 페미니즘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의하는 것은 남성주의적 사고일 뿐이라며 비판의 가능성을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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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과연 과도기적 현상이라는 말로 지금의 2차 가해가 용인될 수 있으며, 페미니즘에 윤리적 성찰과 반성 따위는 필요 없는 것인가. 페미니즘은 결코 비판 받을 수 없으며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은 그저 꼰대질에 불과한 것일까.

과도기에도 사람은 있다

4인의 인터뷰를 보며 분노한 첫번째 지점은 ‘과도기’에 대한 이들의 순진하고 무책임한 인식이었다. 한국의 페미니즘이 남성혐오에 가까운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오찬호 작가는 이를 과도기로 규정하며 ‘방향이 잘못됐다고 하면 안 된다’라고 답했고,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지금의 과격행동도 ‘일시적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또 윤김지영 건국대 교수는 남성혐오는 성립될 수 없으며 그렇게 보이는 행동들은 ‘여성운동의 전술’이라고 답했고,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는 남혐에 대한 문제제기가 여성운동의 두번째 단계에 대한 ‘역사의식이 없어서’ 생긴 오해라고 했다. 지금의 현상이란 여권신장과 가부장제 철폐를 향한 역사의 ‘거대한 전환’ 중에 발생하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 과도기란 뭔가. 1999년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처럼 어딘가 하늘 저편에 ‘2020년 가부장제 철폐’ 같은 신이 맞춘 타이머라도 있단 말인가. 그럴리가. 과도기란 명제와 반명제가 부딪히는 시기로(그것이 역사의 변증법이든 아니든), 그저 때가 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감대에 이를 때까지 서로 다른 목소리가 함께 부딪히고 갈등하고 논쟁하면서 인간의 목소리로 돌파해야 할 시간이다. 80년대의 화염병은 어느 날 뚝딱 2016년의 촛불로 바뀐 것이 아니다. 변화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좌절과 실패와 논쟁 끝에 이루어졌다. 즉, 과도기를 넘어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타인의 침묵을 강요할게 아니라, 더욱 힘써 소통하고 고민하고 듣고 대화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 기사 속의 대담자들은 어떤가. 그들은 현재의 과격행동을 ‘때’가 되면 자연히 해결될 일로 치부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오해라는 말로 일축한다. 지금 당장 혜화역 시위 현장에서 홍대 몰카 피해자의 사회적 삶이 유린당하고 있음에도 페미니스트라는 사람들이 ‘그래서는 안된다’는 말 대신에 이 모든 것은 일시적 현상이라고, 별일 아니니 걱정 말라고 대중을 달랜다. 침묵 또한 분명한 정치적 판단이다. 여성운동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위해 누드모델쯤은 희생되어도 된다는, 너무도 쉽고 간명한 그들의 정치적 판단은 어쩐지 너무 익숙하고 그래서 더 섬뜩하다. 그것은 바로 대일본제국을 위해 자살‘당해야’ 했던 오키나와 주민들의 ‘옥쇄’, 개발을 위해 인간을 포기했던 ‘용산참사’에서 익히 보아온 모습이기 때문이다.

혜화역 5차 시위(출처 ‘불편한 용기’ 트위터)

지금 페미니스트들에게 세상 모든 차별과 갈등에 주목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불가능한 도덕률을 요구하게 아니다. 최소한 당신들이 여성운동이라고 부르는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살인에 대해서는 그러지 말라고 외쳐야 할 의무가 당신들에게 있다는 말이다. 지금 일부의 잘못을 싸잡아 페미니즘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그 일부의 잘못을 ‘방관하고 정당화한 것’은 명백한 페미니스트들의 잘못이다. 과도기는 역사의 시간이기 전에 한 인간의 삶이기에, 70년 전 칼 폴라니가 이야기했듯 ‘거대한 전환’의 시기에 ‘악마의 맷돌’에 갈려야 하는 인간 개개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헌데 지금 한국 사회의 가장 이름 있는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운동의 역사적 발전이라는 거대 담론만을 바라보며 그 과도기를 겪어내어야 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묵인하고 있다. 그것도 거대 담론에 짓눌린 개인의 서사를 바라보고 보듬어야 할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말이다.

시민윤리는 언제부터 꼰대질이 되었나

이 인터뷰에서 필자가 분노한 또 하나의 지점은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을 퇴행으로 규정하며 윤리적 비판의 여지를 원천 차단하는 대담자들의 태도다. 올바른 페미니즘의 방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오찬호 작가는 지금의 페미니즘이 왜곡되지 않았으며 현재의 충돌은 ‘성차별·불평등에 저항하기 위한 훈련’이라고 답했고, 윤김지영 교수는 올바른 페미니즘과 그렇지 못한 페미니즘의 이분법은 ‘남성주의적 사고’이며 올바름 자체가 누구에 의해 정의되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이택광 교수는 ‘페미니즘은 여성의 목소리를 이론화한다는 점에서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다’고 말했고, 조한혜정 교수는 ‘올바르다 아니다를 말하는 사람은 ‘꼰대’이며 지금은 스스로 사유하는 성숙한 시민의 시대’라고 했다. 이들 모두는 페미니즘에 대한 올바름을 판단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하며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의 가능성을 일축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로 직업지식인들의 말씀에 고분고분 따르며 올바른 페미니즘의 방향에 대해서는 함구해야 하는 것일까.

먼저 윤김지영 교수의 말을 살펴보자. 모성 신화에서 보듯 우리 사회의 올바름 자체가 가부장제의 틀 안에서 정의됐을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올바른 페미니즘과 그렇지 않은 페미니즘을 나누는 것은 남성주의적 사고’이며 ‘옳고 그름에 대한 윤리적 성찰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지금까지 시민사회가 고민하며 쌓아온 시민윤리와 올바름에 대한 논의를 모두 ‘남성주의적 사고’로 치부해도 되는가. 게다가 이 발화야말로 이미 ‘여성적인 것은 선, 남성적인 것은 악’이라는 편협한 이분법 자체이지 않는가. 지금 페미니스트들이 말해야 하는 것은 시민윤리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이 아니라 여성들을 위해 우리 사회의 시민윤리가 변화해나가야 할 정확한 지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올바르다 아니다를 말하는 사람은 꼰대’라는 조한혜정 교수의 발언은 실망스럽다. ‘절대선이 없는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라는 현실 인식이 ‘올바름에 대한 성찰은 무가치하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절대선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더 절실하고 절박하게 바른 삶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니었던가.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페미니즘을 지지해온 것도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없는 사회’는 부정의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더이상 우리가 명백한 정의를 규정할 수는 없더라도 명백한 부정의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고 말해야 한다. 옳고 그름에 대한 성찰을 포기하고 이를 한낱 꼰대질로 폄훼하며, 비판은 모두 차단한 채 ‘성숙한 시민들이 알아서 잘 할 것이다’라는 식의 성급한 낙관으로 인간을 구속하는 모든 시민윤리의 제약을 무화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이자 인간에 대한 몰이해이며, 학자로서의 게으름이자 활동가로서의 무책임함이 아닐 수 없다.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을 반박하며 페미니스트들이 즐겨 인용하는 경구가 있다. 바로 ‘백명의 페미니스트가 있으면 백개의 페미니즘이 있다’는 말이다.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다. 어디 페미니즘에 관해서만 해당되는 말이겠는가. 백명의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백개의 가치관이 있고 백개의 인생관이 있으며 백개의 세계관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모두를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모든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 허용되어야 하며, ‘불관용에는 불관용한다’라는 시민윤리의 황금률은 지켜져야 한다. 필자가 혜화역 시위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녀들이 ‘오빠가 허락한’ 고분고분한 페미니즘에서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홍대 몰카피해자를 조롱하고 공연음란죄 운운하며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져버렸기 때문이다. 여성들아, 화내고 저항하고 까불고 소리쳐라. 다만 우리, 인간에 대한 예의는 지키자 제발.

‘백래시’라는 재갈과 당신들의 맨스플레인

지금 당장 현실에서 피와 살을 가진 한 인간의 구체적인 삶이 유린당하고 있는데도 당신들은 남성혐오는 없다고, 페미니즘을 더 공부하라고, 내 삶에 실재하는 도덕감정은 무지에서 비롯된 착각일 뿐이라고, 근사한 말들로 자꾸만 가르치려고 한다. 필자는 당신들이 보여주는 ‘맨스플래인의 전형성’이 지긋지긋하다. 도대체 누가 무슨 권력으로 페미니즘을 시민윤리의 ‘예외’로 결정했는가. 도대체 누가 무슨 자격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을 억압하는가. 필자는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하고 비판할 권리가 있다. 지금 퇴행(백래시)이라는 낙인으로 입에 재갈을 물리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글을 마치며
사실 필자는 처음 이 글을 <오마이뉴스>에 기고했다. 그곳의 논조에 맞지 않는 ‘불편한’ 기사지만, 그 불편함을 견디며 다른 목소리를 안고 고민해주길 바랬다. 이 글은 다른 누구보다도 페미니스트들에게 닿고 싶은 말이었다. 하지만 결국 닿지 않았고, 그 사실이 자못 가슴 아프다. (아울러 다시 이야기할 기회를 준 <리얼뉴스>에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전문가의 말이니 옳다 믿으며 제 몫의 윤리적 판단을 포기하고 ‘명백한 부정의’에 침묵으로 동조하는 일은 인문학의 태도도 페미니즘의 태도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지난 세기 우리가 뼈아프게 알아야 했던 ‘평범한 악의 얼굴’일 뿐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대중의 ‘오해’에 과연 페미니스트들이 반성해야할 지점은 하나도 없는가. 지금 페미니즘에 필요한 것이 진영논리인지 자기성찰인지, 당신들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아집을 벗고 시민윤리와의 관계 설정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시작하기를. 이 모든 날선 말은 아직 페미니즘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어서 하는 말이다.

권보경
wow_niceda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