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살이는 근본 없는 문화

본래 우리 민족은 처가살이가 많았다.

조선 개국 공신인 정도전 생가, 삼판서 고택의 소유주 변경 사례를 살펴보자. 정도전의 아버지인 정운경은 삼판서 고택을 정도전에게 물려주지 않았다. 정운경은 정도전이 아닌 사위인 황유정에게 삼판서 고택을 물려줬는데, 황유정은 다시 사위인 김소량에게 집을 물려준다. 김소량은 다시 사위인 김담에게 물려줬는데, 김담의 생존 시기는 15세기로서 세종부터 성종대이다.

김담부터는 부계로 삼판서 고택이 상속되었는데, 이러한 이유는 딸이 없거나 하는 경우였다. 강릉의 오죽헌을 살펴보자 율곡 이이(오천원짜리의 그분)의 아버지인 이원수는 처가살이의 대표적 인물이다. 율곡 이이의 본가는 파주이지만 그는 어머니 사임당 신씨(오만원짜리의 그분)의 집인 외가 오죽헌에서 자랐다.

“중국은 예의가 나온 나라입니다. 혼인 예법은 바로 ‘음’이 ‘양’을 따르게 되어 여자가 남자 집으로 가고, 여기서 아들과 손자가 태어나 친가에서 장성합니다. (중간생략) 우리 동방의 문물제도는 모두 중국을 본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독 혼례만은 아직도 옛 풍속에 따라 양이 음을 따르므로 남자가 여자 집에 가고, 여기서 아들과 손자가 태어나 외가에서 자랍니다.”
– 태종실록 14년(1414) 1월 4일 –

 

왕이 김종서에게 물었다. “친영의 예법은 우리 조정에서 오랫동안 실시하지 않았는데, 부윤 고약해 등이 옛 예법을 근거로 이를 실행하자고 요청했다. 태종 때에 친영을 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어린 처녀들도 결혼시켜 친영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친영하기 어려운 점이 무엇인가?”

김종서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나라의 풍속은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는 것으로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만일 여자가 남자 집으로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 필요한 노비·의복·그릇을 여자 집에서 모두 마련해야 하므로, 이를 어렵게 생각하여 꺼리는 것입니다. 남자 집이 만일 부유하면 신부를 접대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지만, 가난한 사람은 부담하기가 아주 힘들어서 남자 집에서도 이를 꺼려 왔습니다.”
– 세종실록 12년(1430) 12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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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건국되고 시집살이인 친영제를 보편적으로 실시하려 했지만, 세종실록의 기록처럼 쉽지 않아 17세기까지 우리 민족은 처가살이 문화가 압도적인 풍습이었다.

“그 풍속에 혼인할 때에는 구두로 미리 약정하면 여자 집에서 본채 뒤편에 작은 별채를 지어 그 집을 ‘사위집(壻屋)’이라 부른다. 저녁 무렵에 신랑이 신붓집 문밖에 도착하여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무릎을 꿇고 절하면서 아무쪼록 신부와 잘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한다. 이렇게 두세 번 거듭하면 신부 부모는 그때야 ‘사위집’에 가서 자도록 허락하고, 신랑이 가져온 돈과 폐백은 그 집 옆에 둔다. 아들을 낳아서 장성하면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 삼국지 고구려 전기 –

고구려의 데릴사위제(서옥제) 이후 고려와 조선 중기까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혼례 방식은 시집살이가 아니라 ‘처가살이’였던 셈이다.

남자가 집을 마련해간다는 것은 적어도 17세기까지는 있지도 않은 풍속이었고, ‘장가’를 간다는 것은 ‘장인의 집’에 간다는 뜻이며, 처가는 사위와 딸을 위해 별채를 내어주는 풍습이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사위는 장인·장모를 아버님과 어머님으로 호칭하며, 그 집의 아들처럼 행동해야 했다.

조선 중기까지 장성한 아들이 있어도 어머니는 ‘호주’가 될 수 있었다. 조선 성리학의 대가 이황(천원짜리의 그분)의 아들과 딸이 받은 상속 현황에서도 남녀 차별은 없었다. 게다가 족보에는 사위와 외손주까지 들어갔던 상황을 볼 때, 오히려 오늘날 시집살이와 상속의 남녀 차별은 애초에 근본도 없는 문화인 셈이다.

17세기부터 시집살이가 된 것은 상속제가 장자와 부계 위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는 농법이 발전과 더불어 면적당 생산량이 늘자 장자 외의 자녀에게는 적게 물려줘도 생계유지에 걱정이 없었다는 점이 있었다.

이때부터 제주(祭主)인 장자는 제사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다른 자녀보다 더 많은 땅을 상속받았다. 그만큼 제사를 주관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7세기 이전까지는 여자가 자신의 집안 제사를 치뤄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고구려 이후부터 본다면 시집살이와 장자와 부계 중심 상속은 고작 400년 정도밖에 안 된 짧은 역사인 셈.

굳이 제사나 부계를 통한 어떤 관습이 없다면 집 장만하는 게 남자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제는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원래 제도는 예법에는 그 의미에 걸맞은 물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데, 그걸 망각하면 그냥 구습일 뿐이다. 현대 시대에 폐백이니 예단은 왜 할까? 쓸데없이. 분가시킬 거면 알아서 살게 하면 된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라는 말이 처가살이에서 나온 말인데, 시집살이시키면서 ‘사위는 백년손님’ 이야기하면 그건 개그가 되는 셈이다.

임형찬

'정치하지마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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