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인간 유병언과 라쇼몽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로 인해 세월호 선박의 운행사 청해진해운의 소유주로 지목됐던 고 유병언과 그가 다녔던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가 압수수색 및 수사의 대상에 올랐다. 이때 유병언은 도피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도됐다. 유병언은 구원파라는 수상한 사이비 종교의 교주이며 김기춘 등 정권실세와 내밀한 커넥션이 있다는 의혹으로 각종 추측과 음모론 그리고 무성한 소문의 중심이 됐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므로 그의 죽음으로 많은 진실이 묻히게 됐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유병언이라는 ‘문제적 인간’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몽>에서처럼 사건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과 입장이 엇갈리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사진=유병언(출처 SBS 캡쳐)

필자가 이 글을 쓰면서 참조한 주된 레퍼런스는 (지금도 유병언 관련설을 의심받고 있는) 오대양 사건 때부터 유병언 관련 취재를 해왔던 <신동아>의 이정훈 기자의 상세한 기사들이다. 더불어 필자 역시 개인적인 조사를 병행했다.

현재도 유병언은 누군가의 비호 아래 어딘가 몸을 숨기고 살아있다는 설이 일부에서는 기정사실로 여겨지기는 듯하다. 2014년에 보도된 방송에서는 구원파가 신도들의 돈을 갈취하는 수상한 사이비 종교로 묘사됐으며 OCN 드라마 <시그널>에서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이 언급되면서 다시 한 번 인터넷은 이와 관련한 미스테리들로 시끄러웠다.

유병언을 죽을 때까지 따라다녔던 것이 바로 1·2차 오대양 사건의 배후설이다. 또한 유병언이 도피행각을 거듭한 끝에 결국 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는 수사결과가 발표됐는데 이마저 불신의 대상이 될 정도로 그는 죽어서도 문제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심지어 그의 도피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구원파 내부에서도 유병언의 죽음을 납득하지 못했다. 그의 변사체가 발견되었지만 너무 심한 부패 때문에 신원을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국과수에서 시신의 DNA 일치 소견이 언론에 발표됐지만 사람들은 그 시신이 유병언 본인일리 없다는 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죽어서 발견됐다는 사실보다도 국과수조차 매수되었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더 컸던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불신은 그간 정부와 거대 권력이 보인 비상식적인 커넥션과 공모에 대한 가라앉지 않는 분노의 관성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필자는 그러한 음모론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당시 유병언의 사체는 국과수 의뢰와 함께 생전 치과 기록을 담당했던 의사를 통해 다시 감정되었기 때문에 (구원파인)측근들에게는 그의 죽음이 기정사실로 여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토록 유병언은 음모론과 떼어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를 둘러싼 음모론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오대양 사건을 둘러싼 음모론 vs. 음모론

먼저 1·2차 오대양 사건을 보자. 오대양 사건은 1987년 한 공장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한때 구원파 교회에 다녔던 ‘박순자’라는 여자가 종말론과 재림신앙을 믿는 광신도 집단인 이른바 오대양을 만들어 공장 내부에서 종교와 사업행위를 병행하며 신도들에게 사채를 끌어오기를 강요하다가 수사망이 좁혀오자 미래를 비관하며 집단자살(자의에 의한 타살 포함)을 행한 사건이다.

고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이 알려진 이후 국민감정이 고조된 상황에서 이 사건 역시 ‘타살’일지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됐으며 오대양 사건의 배후에 전 세모의 대표였던 유병언이 있었고 오대양이 끌어온 사채를 세모에 전달했다는 주장 역시 꾸준히 제기됐다.

이 기록을 찾아본 결과 재판과정에서 유병언은 이와 관련해서 무혐의 판정을 받았고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조세포탈 등 다른 경영상의 비리 혐의로 기소됐다. 일부에서는 이것이 유병언과 오대양 사건과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근거라 해석하지만 당시 공판 기록에 따르면 유병언은 오대양으로부터 사채를 전달받았다는 혐의에 대해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며 기소된 조세포탈 등의 혐의는 오대양 사건과 무관한 회사 운영상의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대양 사건에 관한 음모론은 무수한 소문과 함께 퍼져나갔지만 그 누구도 그 당시 공판 기록을 참고로 이야기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재밌는 것은 이 똑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두 가지 음모론이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다수의 언론에서는 수사기관이 유병언과 구원파의 오대양 사건 배후설을 속 시원하게 밝혀주지 못했다는 불만을 터뜨렸지만 이것은 유병언의 배후설이 팩트라는 심증 아래서의 이야기일 뿐이다. 때문에 항간에서는 당시 김기춘 법무부장관이 개입한 수사기관과 법원이 오대양 사건을 축소·은폐했고 이것이 유병언의 정권실세와의 유착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음모론을 지지한다.

그런데 구원파 측에서는 나중에도 다시 보겠지만 정 반대의 음모론을 들고 나온다. 그들은 당시 군사정권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6월 항쟁 그리고 초원복집 사건 등 자신들에게 불리한 사건들로부터 국민의 눈을 돌리기 위해 구원파를 그들과 무관한 오대양 사건을 연관시키고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며 오대양 사건은 실제 수사관들이 발표한 내용보다 부풀려져 보도됐다고 믿고 있다.

구원파는 이단인가?

유병언과 구원파를 둘러싼 음모론이 난무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구원파가 사이비 교주를 모시는 수상한 광신도 집단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다소 복잡하고 미묘하지만 기독교사와 신학적 문제를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다.

좁은 시장을 두고 여러 교파들이 경쟁적으로 난립하고 있는 한국 개신교에서는 ‘이단 논란’이라는 것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구원파가 이단판정을 받게 된 발단은 1974년 탁명환씨가 이른바 <세칭 구원파의 정체>라는 책을 출간에서 시작됐다. 그의 발언은 80년대 후반 오대양 사건은 물론이고 세월호 사건 이후에도 언급되며 ‘구원파는 이단’이라는 공식을 공고히 하는 데 일조했다.

물론 개신교에는 다양한 이단성향의 교파가 있으며 이는 다소 미묘한 신학적 쟁점을 동반한다. 그러나 이단을 판정하는 몇 가지 징후가 있다. 첫째, 광적인 개인숭배. 둘째, 자신만의 독특한 성경해석에 대한 ‘배타적인’ 자기 확신. 셋째, 종말과 재림이 임박했음에 대한 강한 확신. 그러나 이러한 기준조차도 미묘한 것이 기성교단의 일부 교회도 이런 기준으로 보면 이단의 징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구원파에 대해 알아보면서 필자가 놀랐던 것은 유병언을 필두로 하는 구원파와 달리 그 계보를 올라갈 때 그들과 전혀 교류가 없었던 다른 구원파 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박옥수, 이요한(이복칠)의 구원파 교회가 그것이다. 이요한의 경우 권신찬·유병언의 교구에서 ‘교회와 관련한 수익사업’에 반대해 떨어져 나온 것이므로 어느 정도 초기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박옥수의 구원파 교회는 애초에 딕 욕이라는 해외 선교사와의 교류를 기점으로 (딕 욕에 의해 박옥수가 교류했고 이와 별개로 권신찬이 딕 욕과 교류해 따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파생되었으므로 기독교 내에서 ‘이단’이라는 의심은 떠나서라도 같은 문제세력인 구원파로 묶여 오대양이나 세월호의 혐의를 받기엔 억울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처럼 구원파는 원류인 기독교복음침례회와 거기서 파생된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대한예수교침례회(기쁜소식선교회) 이 3개 교단을 이르는 말이지만 언론에서는 구분되지 않고 있다. 사실 일반인 입장에서는 크게 관심이 없는 문제다. 다만 여기서 분명한 것은 구원파가 본래의 기원에서는 무슨 무당이 접신 받듯이 생겨난 이단과는 조금 상이하다는 점이다.

우리가 구원파라고 부르는 교회는 본래 영미에서 시작된 ‘플리머스 형제단 운동’에서 영향을 받았고 한국에서는 이 운동에 감화를 받은 기존 장로교 목사였던 권신찬 목사에 의해 설립됐다. 청교도 운동과 함께 영미로 전파된 형제단 교회는 신종교개혁의 계보로서 재세레파, 탈권위주의 등을 내세운 침례교 계파에 속한다. 기성의 교회와 달리 목사나 한국처럼 장로·권사를 따로 두지 않는 평신도 중심의 교회를 운영하며 약식 세례가 아닌 정식 침례를 중시하는 세력이다.

구원파의 설립멤버 중 일부와 이를 전파한 외국 전도사(딕 욕)가 정식 목회자 신분이 아니라는 것이 수상하다는 시각도 있으나 이는 재세례파 계보를 이어온 해외의 전통적인 형제단 운동에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참고로 헬라어 신약성서의 권위적 번역가인 벤자민 뉴튼도 형제단 소속이었으며 기성교회에서도 인기가 많은 ‘5만번 이상 기도가 응답받은 인물’이라는 별칭은 가진 조지 뮬러도 (물론 한국에서의 그의 인기는 한국의 기복신앙적 요소 때문이지만)형제단과 교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일 개신교를 좌익사상에 비유한다면 형제단은 ‘아나키즘’ 조류에 가까울 것이다. 아나키즘 역시 고정된 권위를 배격하고 수평적인 연대를 추구하며 꼬뮨이나 소비에트 식의 조직을 중시하는 정치운동이었다. 물론 형제단 운동은 물론이고 아나키즘에는 여러 난점이 있다.

첫째, 권위를 배격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그러한 복음을 설파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자연스레 권위가 형성되고 따르는 무리가 생겨나는 역설이 반복된다. 실제로 과거 구원파의 설립자인 고 권신찬 목사의 ‘사위’였던 유병언은 구원파 내에서 언변(설교능력) 때문에 유명세를 얻은 카리스마적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권위자가 없기 때문에 (따로 정해진 목회자가 없기 때문에 평신도도 설교를 할 수 있다) 분열에 분열을 거듭한다. 실제로 유병언 역시 자신의 사업을 교회사업과 연관시키면서 이요한 등의 세력과 갈등으로 교회의 분열이 일어난 바 있다.

셋째, 조직의 제대로 된 권위자나 대표자가 없기 때문에 외부의 비판에 취약한 구조이다. 사실 구원파가 유병언을 (구원파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소위 ‘교주’로 모시는 사이비 광신도 집단이라는 이미지가 붙여진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구원파’라는 수상쩍은(?) 이름도 정작 그들 자신이 붙인 이름이 아니라, 형제단 교리를 따르는 교회들에 대해 현대종교 연구자 탁명환 소장에 의해 이단판정이 내려지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일부 탁명환 반대진영에서는 현재는 고인이 된 탁명환 소장 역시 사기 혐의에 의한 전과가 있고 이단과 사이비에 대한 판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한기총과 공조했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사실 한국에 존재하는 교회나 종교 단체 등을 돌아다니면서 그 자체를 전문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아카이빙을 하는 활동가가 없었기에 그가 가진 정보의 독점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고 각종 언론 등에서는 그의 이단 판정에 관한 정보를 그대로 검증 없이 보도하게 된 점 등은 다시 살펴보아야 할 점인지 모른다.

실제로 전세계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형제단 운동은 초기 기독교식의 평신도 간 교제를 중시하고 선교운동을 병행한다는 발상 외에는, 이렇다 할 교단이나 교파를 형성하고 있지 않았다. 때문에 기성의 한국 교단에서 형제단 운동을 모태로 해서 이어져 온 침례계파 교회들에 대해 이단 판정을 내려온 경우가 심심찮게 있어왔고 이 배후에는 한기총과 탁명환 소장과 같은 사람들이 존재했다.

물론 기성교단은 공식적인 교주를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구원파 같은 종류의 이단이야말로 더 ‘교활하고’, ‘사악한’ 이단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유병언은 정권실세와 내통했는가?

흥미로운 것은 것은 구원파 신도들은 세월호 사건 ‘이전부터’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 대해 깊은 피해의식과 반감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2차 오대양 사건에 대한 재판 당시 전 대전지검 부장검사 심재륜은 당시 법무부장관인 김기춘이 자신을 다른 지역으로 인사조치했다는 주장을 제기했고 이에 대해 김기춘으로부터 명예훼손을 당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심재륜 검사가 다른 검사로 변경되었을 때 세간에서는 심재륜 검사가 과도하게(?) 유병언을 조사할까봐 걱정한 김기춘 비서실장이 자신이 비호하던 유병언의 뒷배를 봐줄 수 있는 검사로 교체하도록 압력을 넣었다고 생각했으나 구원파 신도들은 오히려 김기춘이 유병언을 더 강압적으로 수사하도록 검사를 교체한 것이라 의심했다.

이런 상반된 인식은 세월호 사건에 대한 입장에 대해서도 이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사기관이 세월호 사건 직후 구원파 총본산을 압수수색 할 당시 구원파 측에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현수막을 붙인 것이 보도되며 ‘구원파와 정권실세와 내밀한 커넥션이 있다’는 추측이 나돌았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김기춘과 구원파가 남이 아니라는 내용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구원파는 당시 5공 말기 법무부장관이었던 김기춘이 국민의 정치적 불만을 돌리기 위해 오대양 사건의 배후로 세모와 구원파를 지목하며 무리하게 수사했다는 피해의식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다. 그들의 인식은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도 이어졌다. 박근혜 정권의 실정에 대한 불만을 돌리기 위해 또 다시 구원파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다는 인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파 신도들은 김기춘이 초원복집 사건에서 녹취된 본인의 말 ‘우리가 남이가’ 발언을 인용하며 그를 야유한 것이라 해명했다. 같은 현수막 문구에 대해 완전히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정황을 조사하면서 필자는 큰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세간의 음모론처럼 변사체의 신원이 국과수까지 매수하며 조작된 것이고 어딘가에 유병언이 김기춘의 비호 아래 살아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유병언은 정권의 비선실세가 분명하다. 최순실처럼 또 다른 공조관계였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보기엔 박근혜 정권에게 있어서 구원파는 최태민의 교구와 유사하지 않은 모습으로 다뤄지고 있다.

다른 한편 국과수에서 검증한 DNA 대조 결과가 진실이고 유병언이 도피과정에서 사망한 것이 분명하다면 이는 구원파측이 주장하는 것처럼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유병언은 공조관계가 아니라 적대관계임이 분명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언론에서 마치 세월호 참사의 가장 큰 책임자로 몰려 전국적인 보도와 추적으로 전 재산을 몰수당할 위기에 처해 도주하다 변사체로 발견된 유병언의 모습과 오대양 사건을 계기로 ‘이단 사이비’라는 꼬리표가 붙어 집단 타살설의 배후로 몰린 구원파의 모습은 적어도 국정원이나 정권의 ‘비호’를 받는 집단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로 의심되는 상황(그러나 검찰의 이러한 주장은 지금까지도 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에서 전국민적인 충격과 분노를 일으킨 세월호 참사 관련자로서 진실규명의 책임을 지고 있었던 만큼, 도피행각을 벌인 것은 책임을 회피한 파렴치한 행위였다.

그러므로 구원파의 이러한 책임회피성 인식은 응당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그러나 유병언 역시 김기춘 비서실장에 대해 구원파 측과 동일한 피해의식을 공유했고 과거 오대양 사건 당시 재판에서도 자신이 부당하게 처벌 받았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그가 보인 도주행각의 동기는 충분히 설명된다.

이처럼 유병언 자신의 세월호 관련 책임론과 그가 세월호 사건과 관련해서 정권과 권력실세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세월호 참사라는 비극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유병언에 관한 냉정한 판단을 하기는 물론 어렵다. 그러나 여론은 그렇다 쳐도 언론은 냉정한 판단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세월호 사건 이후 유병언이 정권들과 커넥션을 가지고 있었다는 추측성 보도가 잇달았다. 가령 창조경제 지원금이 유병언 관련 계열사에 흘러들어간 것이 정권유착의 증거라고 지목되었지만 이는 추측성 보도에 불과했다.

그 전에 유병언 자신이 정권과 내밀한 커넥션을 맺을 만큼 구원파 외부에서도 영향력이 있는 인물인가, 하는 기본적인 의심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통킹만 사건처럼 가끔씩 음모론이 결과적으로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음모론을 검증할 때에는 음모론에 부합하는 이런 저런 사실과 증언들을 긁어모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것은 오히려 확증편향으로 빠지는 길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자신이 갖고 있는 가설 자체가 이치에 맞느냐는 것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가령 전 세모 회장이었던 유병언이 군사정권 시절부터 정권과 유착했을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라면 애초에 그가 다녔던 구원파가 군사정권 당시부터 기성교단으로부터 이단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참고로 구원파는 이미 1985년 기독교 성결교단에 의해 이단 판정을 받은 이후 90년대 초반까지 기성교단으로부터 잇달아 이단판정을 받았다. 이 점은 오히려 구국봉사단을 설립하고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던 최태민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또한 유병언이 최태민처럼 정권의 비호를 받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였다면 과연 대대적이고 공개적인 방식으로 세월호 참사의 책임자로 지목받고 수사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그럼에도 혹자는 그것이 사실은 유병언과의 금권유착을 은폐하기 위한 차폐막에 불과하다는 추측을 한다. 이처럼 유병언 사건은 완전히 상충되는 사건해석이 대립하는 영화 <라쇼몽>의 내용과 유사하다.

나가며

이미 보았듯 사실 유병언에 대한 수사는 무리한 밀어붙이기식 수사로 추측과 음모론을 무성하게 한 경우이다. 또한 분명한 것은 ‘사이비 종교’의 ‘교주’라는 기존의 보도와 이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이 세월호와 유병언 그리고 박근혜 정권과의 관계에 대해 선정적인 보도와 추측을 더욱 부추겼다는 점이다.

유병언은 종교과 경제의 유착관계, 사업과 관련 비리 등으로 비판받을 수 있고 세월호 참사의 책임론에 대해서도 추궁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권력의 핵심과 유착한 인물일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게다가 오대양 사건은 공판 과정이 제대로 보도된 적이 (당시 이정훈 기자의 월간조선 기사를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그저 무수한 음모와 루머의 소재거리로만 소비되었다. 언론에서 보도되는 많은 기사들은 그들이 이단이고 사이비라는 이유에서 구원파 쪽의 주장이나 정황은 한쪽 눈을 가린 채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으며 때문에 모든 논의는 객관적으로 추론된 결과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답을 정한 상태로 행해졌다.

실제로 최태민과 박근혜와의 유착관계가 알려지자 경향신문은 유병언이 과거 최태민 관련 단체에 참여했다는 보도를 했다가 결국 법원의 결정에 의해 이를 정정보도한 바 있다. 정의와 진실을 밝힌다는 명목으로 객관적 조사 없이 손쉽게 답을 정하고 음모를 양산하는 일은 이처럼 비일비재하며, 사회에서 은폐된 집단일수록 이런 일에 더 취약하기 마련이다.

박가분
경제학 박사. 프리랜서 작가. '그 페미니즘이 당신을 불행하게 하는 이유'(2019, 공저), '포비아 페미니즘'(2017), '혐오의 미러링'(2016),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2014), '일베의 사상'(2013) 출간. '2014년 변신하는 리바이어던과 감정의 정치'로 창작과 비평 사회인문평론상 수상과 2016년 일본 '겐론'지 번역. paxwoni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