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진짜로 ‘타자화’ 됐을까

페미니스트가 특정 단어를 사전적 개념 이상으로 확대하고 변용하는 것에 재능이 있다. ‘여성혐오(Misogyny)’는 그 대표적인 예다. 이들은 본래 여성혐오를 의미하는 ‘Misogyny’의 사전적 개념을 무한히 확장시켰으며, 결국 우리에게 사회 통념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혐오’가 뜻하는 의미 이상으로 쓰기에 이르렀다. 왜 그런지에 대한 해명은 부족한 채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가 말하는 ‘여성혐오’의 개념은 분명히 존재한다. 여성에 대한 멸시, 혐오, 공포, 숭배, 칭찬 등 전혀 성질이 이런 단어들은 ‘타자화’라는 공통분모로 묶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일각에서 무분별한 낙인행위로 남발하는 ‘여성혐오’는 ‘여성에 대한 타자화’라는 의미에 가장 부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타자화는 가부장제라고 불리는 ‘남성 중심’사회에서 꾸준히 축적된 문화적 산물이며, 그것이 오늘날에도 만연해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곤 한다.

사진=우에노 치즈코

하지만 이는 틀린 주장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당당하게 역사적으로 여성은 타자화된 적이 없었으며 지금도 그러지 않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더욱 정확히 말해서 그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타자화는 말 그대로 ‘중심’과 ‘주변화’를 분리하는 개념이지만 역사적으로 여성들은 분명 기존 사회문화구조 속에서 여성으로서의 영역을 차지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물적 토대(공적인 영역) 위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월등한 우위를 점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여성을 타자화했다는 주장과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해석돼야 한다. 실제로 타자화되기 쉬웠던 집단은 그 사회가 규범화한 정상적인 남성상과 여성상에 부합하지 않았을 경우였다. (여기서 말하는 정상적인 남성상과 여성상을 젠더 ‘스테레오 타입’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정상의 범주에 부합하지 않는 자들은 주로 유대인이나 집시 같은 전통적인 국외자들, 유럽의 흑인들, 그리고 사회적 규범을 거부하거나 그것에 적합하지 않은 떠돌이, 정신병자, 상습적인 범죄자였고, 끝으로 ‘남자답지 않은’ 남자와 ‘여자답지 않은’ 여자가 포함됐다. 이는 아이와대 교수였던 독일 출신의 역사학자 조지 L. 모스가 그의 저서 <남자의 이미지>에서 지적한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기서 ‘남자답지 않은 남자’와 ‘여자답지 않은 여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국가의 도덕성과 행동의 규범적인 양식을 결정하는 주요 기준에는 남성성이라는 문화적 기준과 여성성이라는 문화적 기준이 함께 존재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즉,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기준에는 남성성만이 아닌 여성성 또한 포함됐으며, 여성성이라는 것은 남성성만큼의 보편성을 대변하지는 못했지만 일정 부분 국가의 역사와 전통을 상징하는 기준이었다는 것이다. 남성성이 미덕으로서의 보편적인 규범을 구현했다면, 여성성은 국가의 모성적인 성격을 대변하고 전통과 역사를 가리켰다.

이에 설명을 조금 첨가하자면 이러한 스테레오타입 때문에 여성은 공적인 영역에서 빛을 발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어머니로서 자애롭고 헌신적이었던 여성상을 띠었던 성모 마리아와 신사임당 같은 인물들은 종교적 상징이나 위인으로 남을 수 있었다. 두 인물 모두 어머니의 표상이자 최고의 여성상으로 불리는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즉, 여성성은 어머니와 양육자의 위치로서 확고한 존재감을 나타냈고, 이것은 남성이 침범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만, 남성은 이성적이고 여성은 감성적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인류의 보편성을 대변하기엔 남성성이 더 적합하며 여성은 미숙한 존재로 취급받았을 뿐이다.

과거 ‘백인 중심’사회의 흑인들을 떠올려보자. 당시의 정상과 비정상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바로 피부색이었다. 따라서 피부색이 하얗지 않은 흑인들은 그 자체로 이질적 존재였으며 타자화되기 적합한 인종이었다. 이러한 사회구조 속에서 흑인은 노예로 쓰이는 것 외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혹자들은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부여된 시기가 흑인들보다 늦었다며 여성의 인권이 얼마나 외면당해왔는지에 대해 내세우는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그것은 사적 영역 내에만 머물러있던 여성들에게 공적 영역 진출이라는 토대가 마련 된 시기가 흑인들이 인격적 존재로서 인권을 부여받게 된 시기보다 늦은 것으로 해석해야지 어느 쪽의 인권이 먼저였냐는 식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지난날 남성들의 권위가 우위를 점해오던 사회에서 여성은 과연 이질적인 존재였는가? 그렇지 않다. 앞서 설명했다시피 여성성은 국가의 상징으로서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백인 중심사회에서의 백인들은 흑인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었고 그들을 타자화할 수 있었지만 남성과 여성은 서로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타자화란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오히려 남성은 여성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다른 남성들과 필사적으로 경쟁하고 싸워야 했으며, 때론 목숨까지 내던질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규범화된 남성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였다. 여성도 마찬가지로 용모를 단정히 하고 어머니로서 아이를 잘 키워야만 여성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 못한 남성과 여성들은 모두 사회로부터, 각자로부터 인정받기 힘들었다. 이는 양쪽 모두에게 불편한 현실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남성의 힘듦을 설파하는 것도 아니고 여성이 차별받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필자는 기존의 규범화된 남성성과 여성성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다. 이는 남성과 여성을 넘어 이들 개개인의 개별성을 존중하지 않는 악습이기 때문이다.

개별성이 존중받는 사회는 남자가 돈을 잘 못 버는 대신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도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고, 여자의 외모가 뛰어나지 않아도 실력으로서 인정받으며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말한다. 그러한 점에서 사회가 아무리 변화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가진 재산과 직업 따위로, 혹은 외모만으로 개개인의 가치가 결정되고 있는 것은 앞서 말한 스테레오 타입이 오늘날에도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글에서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균형 잡힌 젠더 담론을 형성함에 있어서 어떤 성별이 중심이 되며 어떤 성별은 타자화된다는 논거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는 가해자와 피해자, 혹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만드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단지 혐오만을 양산할 뿐이다.

메갈리아와 워마드 같은 집단의 혐오적 언행에 ‘미러링’이란 대의명분이 따라 붙고, 이들을 언론사들과 속칭 지식인이란 사람들이 나서서 비호하는 현상은 여기서 출발했다고 본다. 이들의 변호는 “너넨 지금도 기득권이고 여태까지 횡포를 부려왔으니 당해도 싸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반대급부로 단지 여성이기에 차별받은 경험과 불편함을 인정해달라는 목소리조차 ‘메갈’로 낙인찍히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렇게 혐오가 혐오를 낳는 악순환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진정한 젠더 해방은 남성과 여성이 서로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라고 인식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남녀의 문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맞물려있기 때문에 한쪽의 문제를 인정한다고 해서 다른 한쪽의 문제가 부정되는 성질도 아니다. 그리고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열쇠는 우리 모두가 쥐고 있다.

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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