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진보정당은 무능력할까

이번 탄핵정국에서 가장 큰 반사이익을 누린 것은 더민주당이다.

탄핵정국 이전에는 10~20%의 지지율에 불과했던 것이 일부 여론조사기관에서는 최근 40%를 상회했고 가장 두터운 유력 대선주자층을 보유하고 있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동아리’에 가까운 다른 꼬마 진보정당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의당의 지지율은 5% 남짓한 수준에서 정체하고 있다.

사진=정의당

이는 노무현 탄핵사건 때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동반상승했던 상황과 매우 대조적이다.

물론 지지율이 모든 것을 의미하지 않지만 적어도 왜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먼저 과거와 현재의 진보진영의 지형의 차이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거 민주노동당과 현재 정의당(을 비롯한 다른 진보정당)의 차이는 역시 계급적 기반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다.

구 민주노동당은 ‘일하는 사람의 희망’이라는 캐치프레이스를 내세우며 임금소득자에게 어필하고 실제로 조직노동과 연계했지만 지금 어느 진보정당도 계급적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러한 계급적 기반과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 더 권장되고 있다. 그리고 그보다는 청년, 여성, 소수자 등의 정체성 정치로 선회한지 오래이다.

나아가 그들이 현재 내세우는 정책도 예를 들어 불로소득을 비판하면서도 기본소득을 내세운다든지, 최저임금 만원 슬로건을 외치며 다른 한편에서는 골목상권 보호를 내세우는 등 서로 논리와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것들의 백화점식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선언’ 혹은 ‘슬로건’인지 아니면 ‘정책’인지 헷갈릴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정당으로서 무능력하고 아마추어리즘에 빠졌다는 증거이다.

물론 진보정당이 계급적 의제를 버림으로써 계급적 ‘협소함’을 넘어서 대중적 외연을 확장했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과거(19세기 서유럽)에는 ‘계급정당’이 바로 귀족정당과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대중정당’을 의미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한편 계급적 의제에서 탈피하고 이런 저런 (대개 영미와 유럽에서 조악한 형태로 수입된) 신좌파적인 정체성 정치의 의제들을 수용한 현 진보정치는 대중적인 외연을 넓히기는커녕 오히려 더 정파적 이해관계가 중심이 된 활동가들의 친목집단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실제로 대중이 진보정당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리고 대중을 향한 정치적 판단과 정책과 선언들도 활동가들의 잣대과 세계관으로 재단된 대중을 향할 뿐 실제로는 대중들에게는 지극히 폐쇄적인 관념적 집단으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물론 진보진영에서 이따금씩 똑똑한 정치인과 훌륭한 활동가 그리고 유의미한 정책적 제안이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오히려 더 문제인데, 진보진영의 위기인식을 가로막는 가장 큰 착각 중 하나는 바로 개별적인 ‘인물’과 ‘가치’ 그리고 ‘정책’의 선명성으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관념이다.

오히려 버니 샌더스의 사례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선명하고 진보적인 인물도 제1야당에서 경선을 치를 수 있으며, 진보적 가치와 정책이라는 것도 결국 다른 정당에 흡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박원순이 최근 내세운 국공립대통합안도 과거 민주노동당 시절에 나왔던 정책이다. 그리고 이재명의 청년수당과 기본소득 논의도 과거 사회당과 노동당에서 논의되었던 것이다.

사회적 임금제도와 일자리 나누기 그리고 노동시간 단축도 이제는 제도권 심지어 정부부처에서 논의되고 있다. 즉 그것이 이제는 딱히 ‘진보적인’ 정책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이것들이 저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고 진보정당의 인물들이 결국 다른 야당에 비해 더 ‘진정성’이 있고 ‘정의롭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 지지자들의 생각일 뿐이다.

결국 계급적 의제를 회복하는 것 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계급적 의제란 대단한 게 아니라 노동계급 중심의 시각과 인식틀을 갖는 것이다.

그것이 반드시 종래의 인식대로 노동운동이 희망이다, 라든가 노조중심의 사업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보다는 여러 분야의 사회적 적대와 갈등이 노동소득자와 비노동소득자의 대립을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어떻게 노동소득자=노동계급의 삶을 안정화시킬지에 대한 종합적인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역설적이게도 현재 그러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은 보수야당 정치인과 후보들이지 진보정당은 아니다.

예를 들어 지금의 출산율 저하와 다가오는 인구절벽의 문제는 단지 여성의 문제인 것만도 아니고 청년세대의 문제인 것만도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의 삶의 재생산 문제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무상보육뿐만 아니라 교육비 인하와 주거비 인하 그리고 더 나아가 양질의 일자리 늘리기라는 종합대책이 필요하다. 당연히 노령인구에 대한 일자리와 복지문제도 수반되어야 한다.

현채처럼 특정 계층과 정체성에 고착된 파편화된 슬로건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임금소득자의 연령별/성별/계층별 생애주기 전체를 고려한 종합대책이 필요하며 거기서 발생하는 비용을 최종적으로 누구에게 부과할지도 고민해야 한다.

원래는 이것이 진보와 좌파에게 기대되는 역할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아주 단순히 말해서 ‘계급투쟁’의 의미 아닌가.

그러나 지금 이러한 계급적 의제를 고민할 능력도 의욕도 상실한 것이 진보진영의 현주소이다.

무엇보다 탄핵정국에서 현 정치에 실망한 유권자들은 진보나 좌파적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상국가화, 시스템의 정상화 더 나아가 국민통합을 바란다는 점에서 딱히 진보정치에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상황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사실 애초에 잘 했어야 하는 것은 진보진영이 아니라 보수진영이다.

결국 지금의 유권자들의 기대 속에서 진보정치의 운신의 폭은 좁다. 그럼에도 그 동안 진보정당은 스스로 자신의 지지기반을 잠식하고 점점 협소한 활동가 중심의 동아리로 퇴행하고 있는 건지는 아닌지, 더 이상 임금소득자=노동계급의 삶에 도움이 안 되는 존재는 아닌지, 스스로 돌아볼 일이다.

박가분
경제학 박사. 프리랜서 작가. '그 페미니즘이 당신을 불행하게 하는 이유'(2019, 공저), '포비아 페미니즘'(2017), '혐오의 미러링'(2016),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2014), '일베의 사상'(2013) 출간. '2014년 변신하는 리바이어던과 감정의 정치'로 창작과 비평 사회인문평론상 수상과 2016년 일본 '겐론'지 번역. paxwoni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