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은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고, 아프리카는 못 했는가?

임형찬 승인 2016.05.10 17:01 | 최종 수정 2022.07.11 17:21 의견 0

아프리카에 대한 왜곡이 정말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리카 하면 벌거숭이의 복장에 어설픈 창으로 사냥하는 부족들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아프리카 대륙 곳곳에는 수많은 왕국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유럽과 아시아와 달리 아프리카는 아래위로 펼쳐져 있는 대륙의 특성상 국가로서 국경선을 확정할 수 없는 지대가 많았다는 게 차이이다.

그래서 사막 지대에는 '국가' 자체가 등장하지 않고, 습한 사바나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지역에는 원시 부족들이 살고 있었지만, 그 외 농사가 되거나 목축이 되는 지역은 유럽이나 아시아처럼 유목민족이 있고, 농경민족이 있어 도시국가도 만들고, 왕국 혹은 그 왕국을 지배한 제국이 등장했다.

아래의 사진은 아프리카 중세 국가 병사의 복장이다. 유럽의 중세 병사의 복장과 유사하다. 사실상 아시아의 그것과도 큰 차이가 없는데, 아프리카는 사실 '기록되지 않고' 사라진 나라가 많을 뿐, 대륙 곳곳에는 사람이 가득 차 있었고, 역사의 흐름에서 언제나 문명은 존재했다. 공백이 없지만, 우리가 공백처럼 느끼는 것은 바로 역사에 대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는 중세 봉건 왕국이 곳곳에 있었다. 어떤 곳은 칼리프라는 지위의 강력한 지도자로 중앙 집권을 하기도 했다. 사실상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오스만 튀르크와 유사한 체제가 있었다.

다만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따로 해군력을 키울 의미가 없었다. 그들이 주로 교류했던 지역은 내륙이고, 그 내륙 루트를 타고 중동과 북아프리카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이전에도 서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의 국가들은 해양을 통해 상업적 교류를 했다. 전쟁이라는 목표로 '해양'을 이용하기에는 가성비가 낮았을 뿐이다.

유럽의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희망봉 루트가 발견된 게 오로지 유럽인의 공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미 아프리카 왕국들의 상업 무역선들은 서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를 가는 루트를 알고 있었다.

아프리카 왕국들도 세습이 아닌 능력에 맞게 '관료'를 뽑는 제도가 있었다. 과거제도 같은 것은 아니고, 별도의 교육기관을 통해 출신 부족별로 동등하게 인재를 선발하는 제도가 있었다.

부족 연맹체로 저런 넓은 땅을 통치할 수 있다고? 고대 이집트와 카르타고가 등장한 이후 아프리카에는 저런 커다란 국가들이 다수 있었다. 부족 연맹체로 저런 넓은 땅을 통치할 수 있다고? 고대 이집트와 카르타고가 등장한 이후 아프리카에는 저런 커다란 국가들이 다수 있었다.

아프리카 왕국들을 부족연맹체 수준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지함의 증거이다. 아프리카 왕국들은 유럽과 같이 '봉건제도'였고, '기사'란 계급도 있으며, 신분 체제도 명확했다. 중앙정부라는 게 아프리카에도 있었다.

아프리카와 동아시아의 차이는 유럽과의 접촉 시점에서 차이가 난다. 아프리카는 초기 유럽 국가와 대등한 형식의 무역을 했다. 그 무역 대상이 '상아', '다이아몬드', '황금' 뿐만 아니라 '사람'도 있었다는 점이다. 아프리카에서 유럽과 북미로 끌려간 노예는 아프리카 왕국들의 노예 계급에 해당한다.

또한, 초기에는 유럽의 상선들이 지나가는 지역에 보급 도시를 만들어 큰 이득을 남기고, 중계무역으로도 큰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포르투갈이나 영국과 프랑스는 이러한 이득을 직접 누리기 위해 총독을 설치했다. 이 총독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경영하기 위함이 아니라 일종의 '상관'의 형태였다. 자국 상인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인데, 유럽과 아프리카의 힘의 균형이 깨졌을 때 이것은 식민지 경영의 본부가 되었다.

이게 미개한 것이면 비슷한 갑주를 입은 고구려의 기마병은 뭔가? 이게 미개한 것이면 비슷한 갑주를 입은 고구려의 기마병은 뭔가?

유럽 국가의 아프리카 식민지 건설은 1840~5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이전에는 대부분의 아프리카가 독립국이었다. 그리고 1850년 이후 유럽의 직접적인 침탈이 시작되었다.

한국이 후진국이었음에도 근대화를 빨리 이룬 것을 동아시아 체제의 우월성으로 포장하지만 사실 '정치적 안정'을 빨리 얻은 것과 크게 연관되어 있다. 한국은 1945년 독립, 1950년 한국전쟁을 통해 이념 경계선이 명확해졌다.

더욱 운이 좋았던 것은 강대국들의 영토 분할 선에 이민족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세계 경제에 편입되어 혜택을 볼 수 있었다.

즉, 70년대와 80년대 호황기라는 로켓 위에 올라탔다는 점이다. 세계 경제의 국가 간 불평등이 가속화되기 이전 거의 막차에 올라탔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는 늦게 독립했다. 대체로 1960~1980년 사이에 독립했다. 게다가 독립 초기에 임의로 국경선을 설정했다.

또한, 한국보다 더 오랜 기간 식민 통치를 받았는데, 이때 분할통치 경영 덕택에 없던 민족 구분도 만들어지는 등 갈등의 씨앗이 잠재된 상황에서 독립을 맞이했다.

그 결과 동아시아의 대만, 홍콩, 한국, 싱가포르 등이 정치 경제적 안정을 구가할 때,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내전으로 파탄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들의 인적·물적 자원을 제대로 사용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빈곤국으로 전락했다.

‘왜 한국은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고, 아프리카는 못 했는가?’ 라는 의문은 명확하다. 그냥 독립 시기와 독립 상황이 달랐을 뿐이다. (일본은 이것과 무관하다. 패전국이므로)

여기에서 '영국의 통치 방식'과 '일본의 통치 방식'으로 어느 쪽이 도움되었는가는 그냥 정신승리일 뿐이고, 우월의식을 만들고 싶은 욕망에 불과하다. 둘 다 착취를 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착취당한 것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나마 조선은 1910년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까지 내셔널리즘이 어느 정도 성숙 단계로 진입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는 그 이전에 대부분 식민지로 전락하여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만들어진 민족 개념을 가지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도 아프리카 식민 경영에서 '자원'을 얻기 위해 플랜테이션 농업을 시작했다.?식민지 경제를 파탄 냈다. 일본도 한반도 경영에서 플랜테이션 농업을 강화했다. 새마을 운동이란 사실 일제가 한국 농촌 사회에 '벼농사' 일변도로 만든 선례를 본받은 것에 불과하다.

1625년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1625년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영국과 프랑스는 자국의 산업 원자재를 가져오기 위해 아프리카의 플랜테이션을 이용했다. 미국은 이 플랜테이션을 자국 내부에 구성했다. 바로 흑인 노예를 이용한 대규모 목화 농장이 그렇다.

유럽과 미국이 플랜테이션 농장을 통해 거둬들인 자원들을 가공하여 재화를 생산했다면, 일본은 조선의 쌀을 통해 일본 본토의 물가를 억제하는 용도로 활용했다.

임금을 억제해야 국제 시장에서 일본산 물건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일본은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일본의 자원 중에서 재미있는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1897년까지 금 수입량 중 78%가량이 조선의 금이었다. 일본이 초기 조선의 경제를 파탄 내고 잠식하는 과정은 유럽 국가들과 비슷했는데, 일본은 영국산 면직물을 통해 조선의 가내 수공업 면포가 공장제로 바뀌는 것을 좌절시켰다.

그 중계무역을 통해 일본은 조선의 금과 쌀을 유출했다. 그리고 일본은 그 금을 활용해 공장 기계와 함대를 사들였고, 쌀을 통해 도시 노동자의 물가 안정화를 꾀했다.

그냥 일본이나 영국이나 식민지가 피지배 국가들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헛소리라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는 식민지 후유증을 지금도 온몸으로 감내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한국 전쟁으로 감내했다. 그때 죽은 사람들이 몇인가? 파탄 난 농촌 경제는??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구한말 자급자족 농촌 경제를 완전히 박살 냈다.

아무리 농사지어도 빈곤했기에 시골 청년들은 도시에 와서 값싼 노동자가 되었다. 일제의 농촌진흥운동과 새마을 운동은 농촌 노동력을 도시로 떠나보는데 촉매제 같은 역할이었다.

우리가 세계사를 볼 때 정말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인디언으로 불리는 북미의 원주민과 북중미, 남미의 영토들의 공백에 대한 인식이다.

콜럼버스가 카리브해의 바하마섬에 도착했을 때, 이 섬들에는 1000만명 가량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북미에도 마찬가지여서 각 지역은 마치 원시 상태의 자연이 아니라 '유목 생활'을 하는 원주민과 '농경 생활'을 하는 원주민이 있었다.

그들은 호의로 유럽인을 대했지만 돌아온 것은 역병과 전쟁뿐이었다. 전쟁에 의한 학살보다 유럽대륙에서 가져온 질병이 전쟁도 없이 그들의 부족 연맹체를 박살 내기 시작했다.

아스텍도 잉카도 그러했다. 그렇게 몇천 만명이 죽은 다음에 우리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은 대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말 타는 이미지로 착각하게 되었다.

그들도 도시가 있었고, 나라가 있었다. 북미에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현대적 무기를 갖춘 미국이 19세기까지 원주민과의 전쟁을 치렀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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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이 칼럼처럼 착각하지 말자. 식민지 경영은 그저 식민지에 불과하다. 식민지가 있었기 때문에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다는 건 영국과 프랑스도 용도 폐기한 지 오래되었다.

근대화·산업화의 순서를 보자. 영국-프랑스-미국-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갈-러시아-일본이었다. 그저 영국에서 순서대로 이뤄졌다. 사회구성체 5단계로서 자본주의 근대화란 오로지 영국만이 이룬 성취였다.

나머지는 그저 누가 빨리 따라가느냐의 문제였을 뿐이었다. 원천적으로 특정 역사에만 '근대화·산업화의 맹아'가 있고 없고 여부는 정말 쓸모없는 논쟁에 가깝다.

공정 무역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한 번만 생각해보면 된다. 아프리카는 왜 자기들이 먹지도 않는 원두와 카카오를 만들까? 담배와 사탕수수는 왜? 아프리카 국가들도 원래 자급자족과 무역을 통해 성장하던 경제 체제였다.

식민지 플랜테이션을 통해 이 체제가 완전히 붕괴하고 독립하자 남은 것은 '원두 농사'에 최적화된 농토뿐이었다. 이 농토를 자급자족이 되는 '식량'을 생산하는 농토로 바꿔야 할 과제가 있다.

그런데 인간이란 한 달만 굶어도 죽는다. 일단 최저 빈곤선이지만 싸게 원두를 팔아, 수수를 팔아, 카카오를 싸게 팔아 식량 수입만 할 뿐이다.

그러다 내전이 터지면 리셋인거다. 황당하지 않나? 독립하고 보니 얻은 땅은 죄다 원두 농사를 짓고 있고 한국은 독립하고 보니 죄다 논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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