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모델로 일하고 있는 러시아 여성들과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친구 유튜브에 게스트로 출연한 여성들이었는데 촬영을 도와주러 갔다가 식사도 같이 하게 됐다. 결혼 적령기 남녀가 모여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그리고 필자가 연애 프로그램에 나갔던 경력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애와 결혼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흐르게 됐다. 그런데 친구가 헤어진 여자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녀가 무성욕자였다는 것이다.
같이 식사하던 여성 게스트들이 그 얘기를 듣고 경악을 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녀들은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성관계를 해봤다면 성욕이 없다는 말은 절대로 할 수가 없을 거라고 했다. 오히려 여자가 더 성욕이 강하다고 했다. 자기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끝만 스쳐도, 심지어는 목소리만 듣고도 성적 흥분을 느낀 적이 있다고 했다.
여성의 성욕이란 무엇일까. 남성의 성욕은 명확하다. 남자들은 하루 종일 섹스 생각을 한다. 스스로 성욕이 없다고 하는 남자는 본 적이 없다. 무언가 신체적,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그런데 여성의 성욕은 너무나 천차만별이다. 위에 언급한 친구의 사례처럼 스스로 무성욕자라고 하는 여성들이 있는가 하면 남자들보다 더 성욕이 강하다고 하는 여성들도 있다. 필자가 겪어본 바로도 그랬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필자 앞에서 평생 성욕이란 걸 느껴본 적이 없는 순결한 천사인 양 행동했지만 필자에게 끌리는 여성은 달랐다. 필자가 알던 ‘여자’라는 존재가 맞나 싶었다. 필자가 먼저 지쳐서 나가 떨어질 정도였다.
그래서 필자는 그녀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들 유리한 대로 말을 이리저리 바꾸는 것이다. 데이트 비용이나 결혼 비용을 낼 때는 ‘나는 너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으니까 더 아쉬운 네가 알아서 숙이고 들어가야지?’하며 성욕이 없는 척 짐짓 내숭을 빼다가 자기들이 손해를 보는 상황, 이를테면 여자 경험이 많은 남자는 매력남, 카사노바로 우러름을 받지만 남자 경험이 많은 여자는 헤픈 여자로 여기는 문화에 대해서는 ‘여성에게도 성욕이 있는데 왜 순결이라는 틀에 가두어 두려고 하느냐’ 하면서 갑자기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내숭 없는 신여성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둘 다 정답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식사 자리에서 우리는 그녀들에게 한국에서 모델 활동을 하다 보면 한국 남자들에게 대시를 받는 일이 많은지 물었다. 이에 그녀들은 길거리에서 번호를 물어보는 남자, 인스타그램으로 DM을 보내는 남자는 많지만 첫인상에 호감이 느껴지지 않는 남자와는 어떤 관계도 이어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래도 계속 만나다 보면 더 좋은 점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그런 일은 절대 없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남자’와 ‘나를 좋아해주는 남자’ 중 주로 어느 쪽을 만나냐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 (체감상)거의 50:50으로 나오는데 러시아에서는 그런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를 얼마나 좋아해주건 내가 끌리지 않는다면 절대로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여성에게 성욕이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어느 정도 수준인지에 대한 응답이 갈리는 건 이런 차이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성욕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물론 매력적인 여자에게는 조금 더 성욕이 일겠지만 그렇지 않은 여성이라도 어느 정도의 성욕은 생긴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충분히 섹스를 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여성은 다르다. 섹스를 하면 아이가 생기고, 낳고, 길러야 한다. 만약 여자가 남자처럼 아무에게나 성욕을 느낀다면 ‘아무 남자’와 섹스를 해서 ‘아무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게 될 것이고, 좋은 유전자를 갖지도, 아버지의 지원을 충분하게 받지도 못한 그 아이의 생존율은 높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아무 남자’에게 성욕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자기가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으면서 연애를 시작하는 여성들도 많다. 당장 끌리진 않지만 자기에게 헌신적이라서, 혹은 조건이 좋아서, 나중에는 좋아지겠거니 하고 시작한다. 그러다 결혼까지 가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성욕을 느끼지 못한다. 자기에게 성욕이란 게 있는 줄도 모르고 평생을 살게 된다. 반면 러시아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목소리만 들어도 흥분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선악을 가리자는 건 아니다. 만약 한국에 남자의 헌신과 매너, 젠틀함을 높이 사는 문화가 없었더라면, 한국 여자들이 조건을 안 봤다면 필자 같은 ‘아무 남자’는 애초에 연애 시장에 발도 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오히려 한국식 연애 문화의 수혜자다. 러시아 여자들은 순수하고 한국 여자들은 속물적이라는 식의 비아냥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냥, 그날의 대화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관계에서는 더 절실한 쪽이 약자다. 취준생은 회사에 들어가고 싶지만 회사는 너 말고도 일할 사람이 줄 섰으니 회사가 갑이고, 남녀 관계에서는 보통 남자가 여자를 더 원하기 때문에 여자가 갑이다. 그래서 남자는 갑을 위해 돈과 시간, 정성을 쓴다. 그래서 남자들은 여자를 욕한다. 여자인 게 벼슬이냐, 김치녀다, 한다.
그런데 여자로 태어나면, 그래서 날 좋아하지만 내가 끌리지는 않는 남자에게 갑질을 하면 정말로 행복할까. 남편은 어떻게든 섹스를 해보려고 낑낑대는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면서 눈을 감고 목석처럼 누워있는 건, 혹은 좋은 척 연기를 하는 건 행복할까. 구멍 뚫린 것만 보면 성욕을 느끼게 태어난 족속으로서는 상상조차 해볼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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