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남자라면 어렸을 때 몇 번쯤 들어봤을 말이다. 관심 있는 여자아이에게 짓궂은 장난을 쳤을 때, 공놀이하다가 유리창을 깼을 때, 친구들과 주먹다짐했을 때 남자아이들은 흔히 이런 말을 듣는다.
이런 말은 위험하다. 관심 혹은 애정이라는 미명하에 여성에게 가해지는 여러 가지 형태의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심 있는 여자아이가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을 때 고무줄을 끊고, 관심 있는 여자아이의 치마를 들추었을 때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들었던 아이는 나중에 커서 관심 있는 여자를 스토킹하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애인에게 손찌검하고 폭언을 퍼붓는 어른이 될 수 있다. 폭력적인 행동,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동들을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로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마냥 유해하기만 한 건 아니다. 가끔은 이런 말들이 필요할 때도 있다. 남자는 실수를 통해서 성장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찌질의 역사>라는 웹툰이 있다. 어느 평범한 남자의 성장기다. 대학 새내기인 주인공은 동급생을 짝사랑하기도 하고, 연상의 연인을 만나기도 하고, 바람도 피우고, 결혼을 앞둔 여자친구와 현실적인 갈등을 겪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실수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금씩 과거의 잘못들을 반성하고 고쳐나가는 모습들을 보인다.
웹툰의 말미에서 주인공은 삶이란 어느 특정 시점에 완성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실수하고, 반성하고,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과정일 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이 웹툰은 페미니스트들에게 비판받았다. 철저히 남자의 시선에서 기록되었을 뿐 여성의 시각이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폭력이고, 끔찍한 기억이었을 이야기들이 그저 미성숙하지만 순수했던 시절의 추억 정도로 미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이야기에는 근본적으로 여자의 시선이 반영될 수가 없다. 남자의 시선에서 그려질 수밖에 없다. 제목이 <찌질의 역사>인데 여자는 찌질해져 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연애는 남자 주도로 시작된다. 먼저 호감을 갖는 것도 남자고, 표현하는 것도 남자다. 물론 여자가 남자를 먼저 좋아할 때도 있지만 그런 상황에도 보통은 그 여자를 좋아하는 다른 남자가 있다. 그래서 자기를 좋아해 주는 남자와 연애를 시작하기도 한다. 여자는 남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비참하게 매달리고 밑바닥을 보일 일이 없다. 가끔 여자들에게 내가 원하는 누군가가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깨달았다는 식의 이야기를 듣는데, 좀 당황스럽다. 그걸 이제야 알았다고?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알고 있었는데?
하지만 남자의 입장은 다르다. 90% 이상의 평범한 남자들에겐 자기를 좋아하는 여자가 없다. 그러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와 연애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자기를 좋아하게 만들어야 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한다. 그건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실수를 할 수밖에 없다. 로데오 거리 한복판에서 춤추면서 고백도 해보고, 수학여행 장기자랑 시간에 무대에 올라가서 임재범의 ‘고해’를 열창해보기도 하고, 집 앞에 촛불로 하트 모양도 만들어봐야 한다. 그렇게 하면서 여자들에게 통하는 게 무엇이고 안 통하는 게 무엇인지를 배워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여성들은 반발할 것이다. 그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고 할 것이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녀가 무엇을 좋아할지 고민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배려와 세심함이 몸에 밴다고 할 것이다. 남자들은 늘 가부장제와 남성 우월주의의 가호를 받아온 기득권층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배려를 배우지 못한 것뿐이라고 할 것이다. 여자들은 배려와 섬세함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런 실수 따위 저지르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여자도 똑같다. 나도 살면서 몇 번 정도는 이성의 관심을 받아본 적이 있다. 그때 그녀들은 성숙하게 행동하지 못했다. (그녀들의 입장을 생각해서 차마 공개할 수는 없지만)내가 중학생 때도 안 했을 법한 행동들을 했다. 물론 그녀들을 탓하는 건 아니다. 그녀들도 몰랐을 뿐이다. 항상 그녀들은 다가오는 남자들을 평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먼저 다가가야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지 못했을 뿐이다. 사람은 다 그렇다. 실수를 해봐야 다음번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연애에서는 그게 주로 남자일 뿐이다.
그래서 남자에게는 실수할 권리가 필요하다. 어려서 작은 실수를 해보지 않으면 나중에 커서 큰 실수를 하게 된다. 팀장 혹은 상사라서 건냈을 뿐인 의례적인 친절을 성적 호감으로 착각해서 신입 여직원에게 고백 공격을 하고, 전화를 수십 통씩 걸고, 집 앞에 찾아가게 된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 사회는 남자들에게 실수를 저지를 기회, 반성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될 기회를 주지 않는다. 데이트 폭력, 스토킹, 가스라이팅 같은 단어들을 너무 쉽게 쓴다. 남자들을 너무 쉽게 성범죄자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남자들은 지레 겁을 먹고 도전해보지도 못한다. 그래서 성숙한 어른이 될 기회를 얻지도 못한다. 어디서 주워들은 건 많지만 막상 할 줄 아는 건 없는 겁쟁이들만 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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