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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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8 14:08 | 최종 수정 2021.09.17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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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풍경
스웨덴 총선 결과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어느 쪽도 다수석을 얻지 못하고 극우정당이 캐스팅 보드를 쥐게 됐다. 구체적인 기록을 보면 중도좌파 연립여당(사회민주당·좌파당·녹색당)은 40.6% 득표율을 기록했고 중도우파 야권연합(보수당·중앙당·기독민주당 등)은 40.3% 득표율을 보였다.
이에 이민자 수용 중단과 유럽연합의 탈퇴를 주장하는 등 극우로 평가받는 스웨덴 민주당(사진)이 단독으로 17.6% 득표율을 얻으며 제3당으로 약진했다. 북유럽 복지모델과 사회민주주의의 모범을 제시한 나라에서 극우정당이 세를 불린 것은 국제적으로 큰 충격을 줬다.
유럽 극우세력의 약진은 더는 새로운 소식이 아니다. 지난 2002년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극우주의자 장 마리 르펜이 프랑스 대통령 결선투표에 올라가 전 세계에 충격을 준 바 있다. 이후 반이민, 반EU 등의 슬로건과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헌신 등의 전통적 가치의 복원 등을 내세운 극우정당은 ‘꼴통’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현재에도 대중친화적인 정당으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극우세력의 돌풍 배경에는 일자리와 사회변화에서 소외된 중하계층 노동자의 불만과 이민자·난민 문제가 겹쳐져 있다. 이 역시 2000년대부터 되풀이된 진단으로서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관점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경제적 불평등 문제든, 이민자·난민에 대한 혐오의 문제든, 이 모든 문제는 그 자체로 극복할 수 없는 난제가 결코 아니다.
옛 철학자 헤겔의 말대로 진짜 문제는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있다면 어떨까. 진정한 문제해결을 가로막는 것은 늦어도 70~80년대 이후 좌파의 문법을 지배해온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라는 오랜 악습이다. 이걸 버리지 못하면 문제는 계속 악화하기만 할 것이다.
정체성 정치는 왜 극우에 대항하지 못하는가?
우선 정체성 정치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정체성 정치는 ‘소수자’로 설정된 계층의 현존과 목소리에 담론적 특권을 부여하는 데서 시작한다. ‘소수자는 소수자이므로 그 자체로 숭고하다’ 이것이 정체성 정치의 제일의 윤리강령이다. 이러한 윤리강령은 여러 번 우리를 사고의 맹점으로 몰고 간 바 있다. 이는 혜화역 시위에 담긴 명백한 증오의 언설을 외면하게 했고, 소수자로 지칭되는 집단 내부의 폭력에 대해서도 침묵하게 했다.
이러한 정체성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그 누구보다 도덕적인 나’, ‘그 누구보다 숭고한 나’를 자기만족적으로 전시하는 데만 급급할 뿐 ‘우리 사회의 도덕적 역량’을 강화하는 데는 무관심하다는 데 있다. 따라서 최근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된 바 있는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의 저자 마크 릴라의 지적에 따르면, 정체성 정치는 자체로 반정치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 사회의 도덕적 역량’이란 무엇일까. 바로 식당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타이르는 법, 병역거부자에게 다른 방식으로 시민적 의무를 지도록 설득하는 법, 성소수자와 동료 시민으로서 같이 일하고 대화하는 법을 익히고 배우는 데 있다.
물론 이러한 문제들은 지금도 인터넷과 일상적 공간에서의 논쟁을 일으킨다. 이같은 논쟁거리는 다른 말로 공통의 시민적 정체성에 대한 필요성을 급박하게 요청하는 사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체성 정치의 옹호자는 사태를 거꾸로 진단 중이다.
정체성 정치는 이런 문제에 대해, 노키즈존을 만든 자영업자를 혐오주의자로 매도하고, 병역거부의 동기를 무조건 숭고한 행위로 미화하고, 퀴어퍼레이드의 일부 방식에 우려를 표하는 시민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그야말로 최악의 방식이다.
정체성 정치는 윤리적으로도 무반성적일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실패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실패는 대중과 노동자 내부에 있는 좌파의 빈 자리를 극우파들이 착실히 채우는 사태와 무관하지 않다.
정체성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시민사회 내의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공통의 덕목과 정체성을 강화하는 법을 모색하는 대신 ‘소수자’의 이익에 대한 당파적 옹호에 매몰된다는 데 있다. 물론 일부 정체성 정치의 이념적 옹호자들은 이러한 ‘문화적 당파성’을 과거 좌파의 금과옥조였던 ‘계급적 당파성’의 충실한 역사적 재현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한편 정체성 정치에 대한 이들의 집착은 역설적이게도 노동계급에 대한 좌파의 영향력이 쇠퇴한 이후 더욱 강화됐다. 본지에 기고하는 채서안은 이를 꼬집어 래디컬 페미니즘 등 각종 정체성 정치의 조류를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의 문화대혁명”이라고 부른 바 있다.
계급정치와 문화정치의 올바른 만남
정체성 정치는 애초부터 ‘계급정치’와 ‘문화정치’의 잘못된 만남이었을 뿐이다.
과거 문화정치의 문제의식은 노동계급의 경제적 조건만으로 계급적 동질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오히려 노동자계급이 공유하는 특정한 문화, 습속, 도덕 등이 노동계급을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문화정치를 강조했던 조지 오웰, 안토니오 그람시 등의 좌파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적어도 이들은 노동계급이 공유하는 공통의 문화적 자산을 강조하는 건강한 지향 정도는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건강한 지향이 바로 정체성 정치가 결여하는 바다. 실제로 미국의 저명 진보 지식인 노엄 촘스키는 2017년 한 대담에서 “정체성 정치는 대다수 사람의 생활방식, 가치, 헌신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고 나타났다. 이는 반발을 가져왔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다시 유럽의 상황으로 돌아가자면, 이제 와서 난민을 여러 국가가 수용한 방식이 잘못이었다며 극우주의자에게 맞장구칠 필요는 없다. 다만 이제부터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소수자’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의 역량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요청은 프랑스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가 이민자 문제 등에 직면한 유럽이 공유해야 할 ‘시민다움’을 모색하면서 화두로 던진 <우리, 유럽의 시민들?>이라는 책 제목과도 일맥상통한다. 철학자로서 발리바르는 책 제목에 물음표를 붙였지만, 현실정치는 그 제목 말미에 느낌표를 제시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앞으로 좌파는 극우적 불만을 발본색원하기 위해서라도 좌파의 전통적 미덕인 ‘계급성’을 강화해야 한다. 계급이라는 말이 떠오르게 하는 옛 인상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예컨대 미국의 ‘민주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는 주 40시간 이상 월급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생계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을 민주적 사회주의라고 정의한 바 있다(<버니 샌더스의 정치 혁명>). 이것이 샌더스가 나름대로 정의한 노동계급적 관점이다. 좌파는 이들의 관점으로 사회를 바라봐야 한다.
동시에 좌파는 이러한 ‘다수 노동계급’이 공유해야 할 ‘시민적 덕목과 정체성’을 모색해야 한다. 소수자의 정체성 자체에 매몰될 게 아니라, 노동계급의 정체성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소수자와 동료 시민으로서 공존할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계급정치와 문화정치의 올바른 만남 안에서야말로 우리는 오히려 소수자 운동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극우적 경향에 맞서 보호할 수 있다. 이것이 지금 유럽의 극우열풍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경제학 박사. 프리랜서 작가. '그 페미니즘이 당신을 불행하게 하는 이유'(2019, 공저), '포비아 페미니즘'(2017), '혐오의 미러링'(2016),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2014), '일베의 사상'(2013) 출간. '2014년 변신하는 리바이어던과 감정의 정치'로 창작과 비평 사회인문평론상 수상과 2016년 일본 '겐론'지 번역.
박가분
paxwoni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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