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비아 페미니즘] 미 대선 프레임 ‘공포’, 정치적 올바름은 정말로 올바를까

리얼뉴스 승인 2016.11.28 11:52 의견 0
공포와 공포가 맞선 미국 대선

지난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될 때 힐러리 지지자들 혹은 트럼프 반대자들의 반응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도덕성 이슈는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의 주된 프레임이었다.

주류언론은 트럼프가 성희롱과 차별적 극언을 일삼은 부도덕한 사람이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대다수의 미디어가 힐러리를 지지했다. 비록 힐러리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상당수의 양심적 미국인들이 트럼프를 견제하며 미국인의 양심과 애국심에 호소하는 선거였다.

그러나 실제로 투표 결과는 미국 상다수의 유권자들이 주류 미디어와 민주당이 짠 도덕성 프레임에 무관심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냈다. 오히려 많은 사람은 주류 정치의 관행과 시스템을 혁파하겠다는 트럼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사생활과 도덕성에는 거의 신경 쓰지 않은 것이다.

물론 트럼프는 전형적인 우파 포퓰리스트이다. 그는 멕시코-미국 사이의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면서 불법이민을 근절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러스트 벨트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되찾기 위해 FTA와 TPP 등 무역협정을 폐기할 것을 공언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출처 NBC)

또한 그는 월스트리트의 금권정치를 근절하겠다면서 월급을 반납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임기응변의 정책은 이민문제도, 실업문제도, 금권정치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그가 공약을 지키든 지키지 않든 미국 정치의 관행을 개혁하며 서민들의 일자리를 되찾겠다는 약속은 거짓말에 불과하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트럼프가 공포를 동원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미국에 유입되는 외국자본과 불법이민자가 미국을 지배하는 미래에 대한 공포를 매우 효과적으로 환기했다.

한편 힐러리와 민주당 진영도 성추행범과 인종차별주의자에 지배되는 파시스트 국가가 될 미국의 미래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했다. 공포와 공포가 맞부딪힌 선거였다. 이러한 선거전략의 심층에서, 유권자들 사이에 상대방에 대해 지니는 공포심이 확대재생산되었다.

오른쪽에 무슬림과 불법체류자 그리고 외국자본의 유입과 미국적 가치의 훼손에 대한 공포심이 자리 잡고 있다면, 왼쪽에는 총기사용과 저질 TV쇼에 집착하며 각종 성차별적/인종주의적 편견과 기독교 근본주의에 중독되어 있는 ‘멍청한 백인’, 혹은 하층계급 ‘백인 쓰레기’, ‘레드넥’에 대한 혐오와 경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

흥미로운 것은 선거 이후에도 선거결과를 이해하기 위한 일환으로 각종 신문지상에서 ‘정체성 담론’이 번성했다는 것이다. 가령 ‘왜 일부 (백인) 여성은, 왜 일부 성소수자는, 심지어 왜 일부 무슬림들은 트럼프를 지지하게 되었는가’를 반문하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실을 말하자면 진실은 간단하다. 진실은 정치인에 대한 지지여부는 인종적, 성적, 종교적, 문화적 등등의 정체성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의 사회적 갈등과 불평등은 개개의 인종, 성별, 종교적 정체성을 ‘가로지른다.’

정체성 정치의 가장 큰 모순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각자의 정체성에 대한 애착을 행위의 기본동기로 상정하며 실제의 사회적 갈등과 불평등의 전선이 어디를 가로지르는지에 대한 분석을 무효화시킨다. 무엇보다 정치적 올바름은 각자의 정체성에 대한 '관용'을 해법으로 내세우는데, 여기서도 모순이 발생한다.

예컨대 포스트모던 문화연구이론의 논리에 따르면 러스트 벨트의 백인 노동자들이 외국자본과 이민자들을 혐오하며 자신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종교를 위협하는 적에 맞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따라서 이들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것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일부 진보파는 트럼프를 지지한 멍청한 일부 미국인들이 반동적인 선택을 했다며 싸잡아 비난한다.

그러나 진보파의 정치적 올바름의 논리를 따르면 겐지스 강의 썩은 물을 마시는 인도인들의 미신적 관습이 존중되어야 하는 만큼 백인 미국인들의 기독교 근본주의도 존중받아야 한다. 사실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할 것은 트럼프 지지자들이 아니라 진보주의자 자신의 비일관적인 잣대이다.

한편 정체성 정치의 문제는 더 근본적인 차원에 있다. 유권자 개개인의 인종적, 연령적, 종교적, 지역적, 직업적 '정체성'에 호소하는 전략은 결국 유권자들을 '반동적'인 선택으로 이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 아닌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보수적 선택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미국의 대선과정에서는 그 이전의 경선과정에서 제기되었던 불평등 이슈가 거의 사장되었다. 이 문제는 글로벌한 추세이기도 하다. 다양한 인종, 성, 문화를 가로지르는 사회운동과 사회이념의 전통이 사라진 상황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우울증적 애착과 타인의 정체성에 대한 공포와 혐오라는 감정이 손쉬운 정치적 동원과 조작의 대상이 된다. 이 책임에서 보수반동뿐만 아니라 리버럴 진보파도 벗어나기 힘들다.

제조된 공포(manufactured phobism)

물론 여성과 유색인종 그리고 성소수자들이 일상에서 겪는 차별과 혐오는 실제적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에 우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아가 모든 사람 각자에게는 그 나름의 소수자성(性)이 있다는 정체성 정치의 논리를 따르면, 이러한 우려는 보편적이기도 하다. 다만 문제는 정치와 미디어가 이러한 공포를 동원하는 방식이다. 더 나아가 일련의 사회적 갈등이 정체성을 둘러싼 혐오와 공포의 표출로 ‘축소·환원’되는 사태 그 자체에도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잠깐 독자들에게 생소할 수 있는 개념 소개로 우회해 보자. 노암 촘스키라는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및 언어학자는 현대 정치시스템이 미디어와 주류정치가 만들어낸 일종의 ‘제조된 합의(manufactured consent)’에 기반해 있다는 비판을 한 적이 있다. 가령 보통의 사람들은 일상에서 민주주의가 양당제 시스템에 기반해야 한다는 데 합의한 바 없다.

또한 대기업의 시장지배가 시장경제 본연의 모습이라는 데에도, 외국에 대한 침략전쟁이 안보에 도움이 된다는 것에도 합의한 바 없다. 이 모든 관념들은 언론매체를 접하면서 그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침투한 것에 불과한데도 마치 모두가 이러한 관념에 모두가 ‘동의’한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제조된 합의’이다.

마찬가지로 현대 정치적 올바름의 담론은 ‘제조된 공포’에 기반해 있는 것은 아닐까? 제조된 공포란 말 그대로 타인의 정체성, 성향, 신념에 관하여 미디어에 의해 극대화된 상상적 공포심을 의미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런 공포심의 우파적 버전이 있다면 좌파적 버전도 있다. 제조된 공포의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자 일부 언론과 SNS에서는 흑인 및 여성에 대한 공격과 미국의 인종차별단체인 KKK단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줄을 이었다.

그러나 그 중 일부는 잘못되거나 와전된 소식이었고 또 대부분의 경우 단순범죄인지 증오범죄인지 여부는 물론, 트럼프의 당선여부와 관련성을 확인하기 어려운 내용들이었다. 오히려 트럼프의 당선으로 인해 증오범죄가 급증했다기보다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정치적 동기가 바로 소수자에 대한 증오에 있을 것이라는 미디어를 중심으로 제조된 공포심이 확산되었다는 쪽이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Qg0pO9VG1J8

미국 SNL에서 방영된 트럼프 비판

지난 2016년 3월 미국 SNL에서 방영된 트럼프 비판 영상을 보면, 보통의 선량한 미국인임을 강조하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실제로는 KKK단원 복장이나 나치 휘장을 숨겨두고 있는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물론 이러한 풍자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성향과 정체성에 대한 공포어린 상상에 기초한다. 여기서 발생한 무의식적 집단사고는 트럼프의 당선 이후 집단적 패닉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진보적 ‘정치적 올바름’의 어두운 이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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