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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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3 21:09 | 최종 수정 2020.09.23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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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역 3년 구형을 받은 박유하 교수
지난 20일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 교수에 대한 명예훼손 형사재판 1심 최종변론에서 검찰은 3년 징역형을 구형했다. 애초 박유하 교수가 고발당한 이유는 그가 위안부 피해자들을 ‘자발적 매춘부’ 등으로 표현하며 비방했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며 변명으로 일관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나온 ‘자발적 매춘부’라는 표현은 그러한 표현을 사용한 일본 우익을 비판하기 위해 인용한 것에 지나지 않다. 또한 정말로 박유하 교수가 일본의 역사적 책임을 가벼이 하려는 의도에서 해당 책을 썼는지에 대해서는 더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우선 <한겨레> 등 일부 진보 언론매체에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내의 소수의견을 밝힌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 박유하 교수가 일본 우익에 동조하고 친일적일 태도를 보였다는 논조로 보도했다.?그리고 그러한 보도가 많은 시민과 네티즌 사이에서 기정사실로 되며 공분을 산 바 있다.
나는 박유하 교수에게 분노한 모든 사람을 바보 취급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이런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실제로 한국의 진보진영과 시민사회에서 친일·반일 프레임은 매우 강력하게 작동해왔다. 그런데 일부 결론을 미리 앞질러 말하면 박유하 교수가 (일본 우익과 제국주의 세력의 추종자라는 의미에서의)친일이라는 것은 사실도 아니며(와다 하루키와 오에 겐자부로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과 와 같은 일본의 진보좌파 지식인들이 그의 문제의식 일부를 지지한 바 있다) 애초 박유하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는 친일이냐 반일이냐는 잣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책도 아니다.
박유하 교수의 전작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
우선 박유하 교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학자로서 평소 어떤 글을 썼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인 <내서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라는 책이다.
미리 설명하자면 박유하 교수는 일문학 전공자이며 일본 근대문학 비평과 논문을 쓰고 학위를 받은 바 있다. 이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라는 책은 일문학자로서 그의 학위논문을 기반으로 쓴 책이며 일본어로 먼저 쓰이고 나중에 한국어로 번역됐다.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이렇다. 일문학자로서 박유하가 일본의 메이지 시대의 문학인 나쓰메 소세키에 대해 비평하는 저작이다. 내용은 이하와 같다.
나쓰메 소세키는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이며 일본의 국민작가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소설로도 국내에 잘 알려져 있으며 그 외에도 <도련님>, <풀배게>, <행인> 등의 소설로도 유명하다. 국민작가인 만큼 당연히 일본인이라면 모두가 그를 좋아한다.
그는 일본의 근대문학을 정립했고 지금도 국내에서 많이 읽히는 일본소설 특유의 감성을 만들어낸 사람이기도 했다. 심지어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이후 ‘전후 민주주의’ 시기의 진보좌파에서도 대부분 나쓰메 소세키를 좋아했다.
일본의 진보좌파들은 나쓰메 소세키가 일찍부터 제국주의 권력을 비판하고 서구 물질문명을 비판하고 개인의 자유를 옹호했던 사람이라고 추켜세운다. 물론 그것이 완전히 잘못된 해석은 아니다.
그러나 박유하 교수가 보기에 나쓰메 소세키는 모순적인 사람이다. 그는 여러 소설과 에세이에서 개인의 자유와 양심을 옹호했던 동시에 정반대로 전쟁과 제국주의 옹호 발언도 했으며, 강자가 우월하다는 사상을 노골적으로 설파했고, 여성에 대한 혐오와 차별의식을 여러 차례 내비쳤다.
그가 소설가로 훌륭할 수는 있어도 그에게 정치적 올바름을 부여하는 것은 이상하다, 라고 한국인 박유하 교수는 일본 문학계에 대해 당돌하게 반박한 것이다.
나는 여기서부터가 박유하 고유의 퍼서낼리티가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의의가 있다면 일본인이 아니면서 자기 나름의 생각으로 일본 문학의 비평적 관행과 합의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지점이다.
박유하의 옹호자들은 박유하 교수가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비판자들은 독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쪽의 해석이 옳든 간에 둘 다 박유하의 어떤 고유한 특성을 그저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사실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라는 책에서 박유하 교수는 (1) ‘내셔널리즘 비판’ (2) ‘여성주의’ (3) ‘소수자의 목소리 말하기’라는 잣대를 시종일관 가져간다. 실제로 박유하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과 에세이에서 주변화되고 바보 취급당하는 캐릭터에 주목한다.
이를테면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에 등장한 무식한 시골 사람, 더럽다고 경멸당한 만주의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 그리고 남자주인공을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요물 취급당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복권시킨다.
그리고 이 시골 사람, 중국인과 조선인, 여성의 입장에서 그의 작품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한다. 그것을 통해 박유하는 국민작가로 존경받는 나쓰메 소세키가 어떻게 주변부의 소수자와 약자의 목소리를 침묵시켰는지를 폭로하는 방식으로 글을 전개한다.
특히 소세키가 얼마나 내셔널리즘 사상에 얼마나 사로잡혀있는지,특히 소세키가 얼마나 내셔널리즘 사상에 얼마나 사로잡혀있는지, 그것이 어떻게 소설과 텍스트 속의 상징적 폭력을 지탱하고 공모해왔는지를 말하고 있다.
박유하의 일관된 관점, 내셔널리즘 비판
재밌는 것은 이러한 내셔널리즘 비판이 <제국의 위안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박유하 교수가 옳은지 틀린지는 따져봐야겠지만 적어도 그가 일관된 사람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를 의심하는 진보좌파 지식인과 독자들이 그의 초기의 책을 읽는다면 그의 언어가 얼마나 자신들에게 친숙하게 느껴지는지에 대해 매우 놀랄 것이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에게 맹목적인 호감마저 느끼거나 아니며 반감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제국의 위안부>의 책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이렇다. 지금까지 한국에 알려진 위안부 피해자의 ‘전형’은 일본군에 의해 납치당하고 강제연행 당한 순결한 소녀이다. 그러나 그것이 위안부 피해자의 모습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위안부 피해자 중에서는 ‘돈을 벌게 해준다’라는 민간업자(포주)의 꼬드김을 통해 위안부 모집에 응했던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들이 예상과 달리 그들이 간 곳에는 갈취와 폭행 그리고 원치 않는 윤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 역시 일본제국주의의 피해자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책임마저 일본에게 물을 필요가 있다. 또한 위안부들은 전쟁 와중에 일본군인과의 동지적 관계를 강요당하며 애국심을 가질 것을 강요당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그러한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 조선인들이 내밀한 부분에서까지 전쟁에 동원되고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감염되는 지점을 구태여 드러낸다는 점에서 <제국의 위안부>는 절대 유쾌한 내용이 아니다. 또한 박유하는 개개인이 스스로를 속여가면서까지 자신의 괴로움을 감내하도록 강요했던 것이 바로 위안부 동원제도가 지닌 가장 끔찍한 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그것을 ‘구조적 강제’라는 개념으로 정리하고 있다.
구조적 강제란 쉽게 말해서 일본제국과 군이 피해자를 직접 강제로 끌고 간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위안부 제도 자체를 설계하고 입안함으로써 이러한 피해를 발생하게 했다는 것이다. 조폭 두목이 자기 구역의 부하들에게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오라고 지시해서 부하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강도를 저지르고 금품을 갈취했다면 조폭 두목은 직접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우익의 책임 면피용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셈이다.
혹자는 <제국의 위안부>야말로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취사선택하고 있으며 대다수의 피해자는 위안부 모집에 응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강제연행과 납치의 피해자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이것은 박유하 교수의 논지 자체를 훼손하는 비판이 아니다. 누가 수적인 다수이고 소수인지를 말하는 것은 이미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에서 소수자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걸 중시했던 박유하의 입장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내셔널리즘(민족주의)적 감정 아래 위안부의 전형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소수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우리들이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박유하 교수는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대협과 같은 위안부 피해자 지원단체들이 오히려 소수의 목소리를 억압했던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반문은 일본의 근대적 양심과 개인의 자유를 대표했던 나쓰메 소세키가 사실은 여성과 소수자 그리고 주변인의 목소리 역시 억압했던 것이라는 박유하의 반문과 공명한다.
일본에 대한 책임론에 대한 논쟁
이처럼 <제국의 위안부>는 손쉬운 판단을 허락하지 않는 책이다. 그것은 논쟁적인 책이다.
한편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논쟁 중에는 일본에 대한 책임을 어떤 형태로 지울 것이냐는 논쟁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박유하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넘어선 문제이다.
일본정부의 입장도 위안부에 대한 책임이 없다가 아니라(이미 일본정부는 여러 차례 이에 관한 책임을 인정한 바 있다. 무라아마 담화, 고노 담화 참조), 박정희 정권과의 ‘한일협정’으로 인해 이미 식민지 시절의 피해에 대한 법적배상의 책임을 다했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그에 관한 최종적인 판결이 이미 일본 내에서 내려져 버렸다.
한국의 경우 헌법재판소는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관한 별도의 법적 배상책임을 지도록 하기 위해 한국정부가 노력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판결을 일본에 강제할 수단이 없으며 국제법상으로도 한국이 유리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처럼 현재 법적책임론이 현실적 교착상태에 봉착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박유하는 이에 대해 크게 두 가지 대안을 내세운다. 1995년 위안부 피해에 대한 일본정부의 정치적 책임을 인정한 무라야마 담화의 계승과 확대. 그리고 한일양국 시민사회의 대화.
참고로 당시 좌파정당이던 사회당 정권의 무라야마 총리는 의회에서 자민당이 다수이며 사법부의 판단도 상이한 상황에서 우선 총리로서 자신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담화를 발표하고 일본 시민들의 기부와 일부 일본정부의 예산에서 출연한 아시아 평화기금으로 피해자에게 배상하는 조치를 취한 바 있다. 이것은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법적 배상이 난망한 상황에서 내린 정치적 결단인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운동권과 한국의 여론은 이것이 법적인 책임을 회피하는 술수라는 비판을 제기했다. 당시 위안부 피해자의 일부는 이 배상금을 거절하고 일부는 수용했다. 한편 박유하 교수는 무라야마 담화가 발표된 경위와 그것이 일본사회에서 수용된 경위와 의도가 상당부분 국내에서 오해되었다고 재반론한다.
아무튼 현실적인 이유에서든 법리적인 이유에서든 현재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에게 법적 배상책임을 묻기 난망한 상황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이미 일본정부가 사과하고 책임을 표명했던 무라야마 담화의 정신에서 ‘출발’해서 한일양국 시민사회의 대화와 이에 기초한 정부 간의 추가적인 외교적 협상이 중요하다는 박유하의 <화해를 위해서>의 논지 역시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일본정부와 사법부에 대한 법적인정 투쟁이라는 운동적 접근방식은 그동안 한일 양국 시민사회 사이에서 서로에 대한 오해와 반감만을 증폭시켰다. 사람들이 일본정부와 정치인 그리고 사법부를 겨냥하며 ‘반성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사이, ‘위안부는 일본군이 강제연행하지 않았다’는 일본 우익의 면피용 주장이 지난 20년간 논쟁이 공회전하면서 문제에 피로감을 느낀 보통의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파고들고 말았다.
박유하의 주장은 우리는 그들이 ‘우경화되었다’고 싸잡아 비난하기 이전에 위안부 피해의 유형이 다양하다는 주장이 왜 일본제국의 책임을 경감시킬 수 없는지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두 가지 기준
이처럼 일본에게 어떠한 형태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울 것이냐, 라는 문제는 기본적으로 ‘누가 고양의 목에 어떻게 방울을 맬 것이냐’의 문제이며 실천적인 문제이자 법리적인 측면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가치기준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진보진영과 한국의 시민사회가 위안부 문제에 접근할 때 가져갔던 정치적 올바름의 가치기준 자체가 충돌하고 있는 것이,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논쟁을 더욱 증폭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생각을 감히 말하자면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논쟁은 친일과 반일 그리고 보수와 진보의 논쟁이 아니라, 정치적 올바름을 논해왔던 진보진영 내부의 논쟁이며 더 나아가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상이한 가치기준이 강대강으로 부딪히고 있는 논쟁이다.
그나마 박유하에 대한 이성적인 비판 중에서는 박유하 교수가 현재 살아계신 위안부 피해자의 감정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그것대로 일리가 있는 반론이다. 현재 생존한 피해자 중에서 상당수는 정대협을 중심으로 일본의 법적 책임론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유하 교수는 이 정대협이라는 단체가 과거 ‘정신대’와 ‘위안부’를 구분하지 않았던 과거가 있으며 또 다른 한편에서는 지금까지 민족감정에 편승해서 특권화된 한 가지 위안부상(일본군에 강제로 연행당한 순결한 소녀)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킴으로써 그 외의 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부지불식간에 주변화하고 억압하고 침묵시켰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것대로 또 일리가 있는 발언이다. 궁극적으로 누가 옳은지 그른지는 나쓰메 소세키의 표현대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을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은 ‘피해자 중심주의’ 혹은 ‘당사자주의’라는 가치기준과 ‘내셔널리즘 비판’과 ‘소수자 중심주의’ 그리고 ‘주변화된 목소리를 말하기’라는 가치기준이 지금 이 사안에서 강대강으로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평소에 진보좌파 진영 내부에서 공존해왔던 가치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평소 그동안 행복하게 공존해왔던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이 지금 서로 충돌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 진영조차 박유하 교수에 대한 논쟁에서 분열되어 있다.
참고로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의 저자이자 유명 페미니스트인 우에노 치즈코는 박유하 교수에 대한 지지메시지를 보낸 바 있다.
진보언론이 박유하를 피곤해하는 이유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 안티 박유하 기사를 주로 실었던 <한겨레> 길윤형 기자가 (그에 대한 처벌을 바라지 않는다면서도) SNS에서 박유하 교수의 책에 대해 ‘피곤한 논의’라고 논평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확실히 박유하 교수의 책은 읽는 것만으로 피로감이 몰려온다. 정치적 올바름을 한 가지 가치기준으로 해석해서 타인에 대한 도덕적 우월성과 지적 우월성을 손쉽게 과시해오던 <한겨레>식의 대중적 진보담론이 박유하 교수가 제기하는 문제 앞에서는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보진영에서 금과옥조로 여겨져오던 피해자 중심주의와 소수자 옹호론 이 두 가지를 여기서는 일도양단하듯이 양자택일할 수 없다. 결국 무엇에 ‘상대적인 가중치’를 두어야 할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국 어떤 가치에 더 가중치를 둘 것이냐는 문제는 궁극적인 옳고 그름이 없는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민하고 갈등해야만 하는 것이다. 당연히 길윤형 기자가 이런 논의를 ‘피곤’하게 느끼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피곤해진다고 해서 외면할 수 있는 사항도 아니다. 문제는 일부가 자신들이 자신의 진영 내에서 자신의 이념이 봉착한 모순적인 지점을 고민해야 할 문제를 사법적인 판단의 영역으로 가져간다는 점이다.
<제국의 위안부>는 내용 그 자체만으로도 피곤할 수밖에 없으며 또 일부러 피곤해지라고 쓴 책이다. 그의 책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 박유하 교수의 책이 지닌 그러한 의의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경제학 박사. 프리랜서 작가. '그 페미니즘이 당신을 불행하게 하는 이유'(2019, 공저), '포비아 페미니즘'(2017), '혐오의 미러링'(2016),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2014), '일베의 사상'(2013) 출간. '2014년 변신하는 리바이어던과 감정의 정치'로 창작과 비평 사회인문평론상 수상과 2016년 일본 '겐론'지 번역.
박가분
paxwoni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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