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안 되긴 하지만, 영원한 사랑

[서연의 러뷰레터] 결혼 이야기

서연 승인 2020.11.17 14:53 | 최종 수정 2020.11.17 15:10 의견 0

결혼은 언제나 화두일 수밖에 없는 주제죠. 우리가 성장하면서 거쳐야 할 몇 가지 큰 관문 중 하나이기도 하고 바라 마다하지 않는 사랑의 결실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죠.

그 후로 얼마나 오랫동안 행복하냐는 물음은 동서고금의 관심이고요. 그러니까 결혼은 ‘사랑’ 그리고 ‘행복’이라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 키워드와의 교점을 가진, 내 삶의 모양을 확실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선택입니다.

당연한 일이죠. 매 순간을 마주 보고 숨을 나눌 사람을 갖는 일은 삶을 통째로 내어주고 서로에게만 휘둘리겠다고 선언하는 일과 다름없으니까요.

'결혼 이야기' 포스터(출처 넷플릭스)
'결혼 이야기' 포스터(출처 넷플릭스)

찰리는 스무 살이었던 니콜의 생기 없던 삶에 단비처럼 내려 시원한 충격을 준 남자였어요. 약혼자가 있었음에도 무감각했던 그녀의 잠들어있던 일부를 깨워준 사람이었기에 그녀는 삶을 내어 주기로 결심하게 돼요.

촉망받는 LA 배우의 삶을 접고 결혼해 그가 속한 뉴욕 극단에 들어와요. 물론 결혼 생활도 그가 살고 있던 뉴욕 집으로 들어와 시작하게 됩니다.

배우로서 니콜의 능력과 명성이 감독인 찰리를 위한 희생과 배려로 이용될 때에도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함께 할 수 있다면 모든 게 괜찮다고요. 그러나 아니었어요. 행복이라 생각했던 것은 자신을 달래는 위로에 불과했고, 괜찮다는 믿음과는 달리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어요.

내가 살아난 게 아니라 찰리에게 생기를 더해줬던 거죠.

게다가 찰리가 극단의 여직원과 잤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실 두 사람이 결혼해 뉴욕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을 때,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LA에서도 살아보자는 약속을 했었지만, 기회가 왔음에도 찰리는 거절했어요.

찰리에겐 그건 약속이 아니라 유럽에도 가보자는 의견, 식기장을 소파 뒤에 놓자는 제안처럼 아주 사소한 상의거리 중 하나였으니까요.

니콜은 현재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은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마침 LA에서 다시 영화 촬영을 할 수 있게 된 그녀는 찰리의 동의를 받고 아들 헨리와 함께 LA로 떠나게 돼요.

이제 영화의 배경은 LA로 옮겨갑니다. LA는 결혼생활이 아니라 이혼 과정이 보이는 공간이에요. 두 사람이 합의하에 원만하게 조정하길 원했던 이혼은 변호사들이 개입하면서 서로의 바닥을 드러내는 폭로전이 되고 법정에서의 승리를 위한 난타전이 됩니다.

찰리는 혼외정사를 했어요.

니콜은 밤마다 술을 마시는 습관이 있어요.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속담처럼 결혼을 유지하는 동안 사랑을 전제로 한 부부의 싸움은 물장난에 불과해요. 지나고 나면 흔적도 남지 않는 한낱 말다툼일 뿐이지만 이혼 분쟁은 두 사람만 알고 있어야 서로의 민낯이 천하에 드러나는 일이라 피 튀기는 전쟁인 겁니다. 벌겋게 물든 흔적은 씻겨 지워지지도 않아 두고두고 상처로 남아요. 승자 없는 싸움인 거죠.

찰리와 니콜의 이혼 과정도 같아요. 당사자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법안에 기초한 변호사들의 전략에 휘말려 서로를 할퀴게 되죠. 모욕과 비방이 오가며 서로를 위해, 그리고 아들 헨리를 위해 원만하게 대화로 합의하고자 했던 첫 마음도 어느덧 변해가기 시작해요. 끝까지 간 지점에서 두 사람은 어쩌면 처음으로 진지하게 서로를 마주합니다.

내가 왜 LA에 살고 싶은지 이해해? (중략) 바로 그게 문제 아니야? 난 당신 아내였는데 내 행복에도 신경 썼어야지.

이해하고자 시작한 솔직한 대화가 서로의 피부에 생채기를 내더니 돌이킬 수 없는 말로 서로의 영혼에 상처를 남깁니다.

당신은 내 뒤통수를 치고 지옥에 빠뜨렸어!

당신 때문에 난 결혼 내내 지옥이었어.

이 정돈 약과에요. 선을 넘는 서로의 가족사, 지난 결혼생활에서 서로에게 느꼈던 불만, 무의식에 잠재해 있을 트라우마를 마구 헤집어냅니다.

당신은 이기적인데 너무 익숙해져서 이젠 당신이 이기적인지도 모르고 있어! 진짜 재수 없다고!

난 매일 눈뜰 때마다 당신이 죽길 바래! 헨리가 괜찮다는 보장만 있으면 당신이 병에 걸려 차에 치여 죽었으면 좋겠다고!

서로의 급소를 찌르는 날카로운 말들이 이토록 섬뜩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상대방을 향한 공격이 결국 자신을 다치게 한다는 것을 잘 아는 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나약함, 인간으로서의 한계, 지난 사랑에 대한 아쉬움, 서로에 대한 죄의식과 연민들까지.

사랑하는 시절을 통과했던 모든 연인이 가질 수밖에 없는 이 복합적인 감정의 면면들을 뼛속 깊이 느끼며 두 사람은 오열하고 절규합니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변호사들이 내내 집착했고 두 사람도 그럴 거라 오해했던 LA에서의 생활, 찰리의 바람, 니콜의 커리어와 같은 사유들은 사실문제의 핵심이 아니었어요. 그들에게 정말 필요했던 건 서로를 마주 보는 시선, 상대의 삶을 존중해주는 마음, 사랑하고 사랑받는 욕망의 실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결혼 이야기(출처 넷플릭스)
결혼 이야기(출처 넷플릭스)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에는 두 사람이 이혼조정과정 중에 서로의 장점을 쓴 글을 읽는 장면이 나와요. 니콜의 거절로 알 수 없었던 서로의 글을 엔딩에선 찰리가 직접 읽게 되는데 아리고 아름다운 한 문장을 소개하고 싶네요.

난 평생 그를 사랑할 거다. 이제 말이 안 되긴 하지만...

내가 아닌 한 사람을 목숨처럼 받아들이고 함께 사는 동안 스스로를 잊고 버렸다가 급기야 잃고 다시 찾기까지 몸서리치게 발버둥 치는 이 모든 과정은 인간이 얼마나 모순되고 불완벽한지를 보여줍니다.

절실히 필요로하는 누군가를 감히 사랑이라 믿고 그 하나에 모든 것을 걸 만큼 용감했다가 서서히 빛을 잃는 내 자신과 그렇게 만든 그를 처절히 증오하게 되면서 결국 헤어짐이라는 마지막 선택을 하지만 영원히 헤어질 수는 없어요. 이미 그 사람을 알고 있는걸요. 어떻게든 그 사람이 내게 남아있는걸요.

서류에 사인하고 도장 찍고 완벽하게 남이 되고도 여전히 헤어지고 있는 동시에 정말 말이 안 되긴 하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중인 거죠.

완벽한 사랑이 없어서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듯이, 완벽한 이별도 없어서 헤어지고 나서도 사랑하는 거죠. 잠든 헨리를 안고 돌아가는 찰리를 불러 세워 풀린 신발 끈을 묶어주는 니콜의 마음처럼.

사랑하지만, 사람이고 삶인 지라 변하지 않을 수는 없어요. 헨리가 변심하며 이 친구가 좋았다가 저 친구가 좋았다가 하듯이. 아이라서 쉽게 그럴 수도 있지만 살아있다는 것의 속성 자체가 그런걸요. 변하는 것이 꼭 나쁜 것만도 아니고요.

그 변화를 함께 맞춰갈,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도 일관할 수 있고 안정을 찾을 단 하나의 곳이 가족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흔들리면서도 함께 갈 수 있어요. 그것을 잊는다면 삶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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