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파 선배의 옛날이야기

[리뷰] 86세대 민주주의-민주화운동과 주사파 권력의 기원

이환희 승인 2021.10.07 13:58 | 최종 수정 2021.10.07 14:13 의견 0

옛날이야기를 좋아한다. 양편 할아버지 모두 일찍 작고하셔서 할머니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옛날이야기에 입문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 떠났던 이야기, 해방 후 남편을 잃고 살기 위해 용산, 이태원, 창신동, 남대문 등지에서 미제 장사를 했던 이야기며 내 어릴 적 이야기도 흥미롭다.

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도 좋았다. 드물게 60년대 브라스 밴드의 마스터로 일하셨던 터라 용산 미8군에서 연주하고 오디션을 봤던 이야기(화양흥업 등지에서  늘 AA만 받으셨다는 자랑), 워커힐 호텔이 건립되고 축하 공연에 세션으로 참여했는데 헤드라이너(!)가 루이 암스트롱이었다는 이야기, 정동 MBC 경음악단(당시는 실용음악을 경음악이라고 불렀다고 들었다)단원으로 일하며 임택근 당시 전무, 박근형 배우와 마작을 하셨단 이야기까지.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빈 공백은 2차 자료를 뒤져감으로써 메운다. 창신동에서 왜 미제 물건이 많이 팔렸는지를 찾아봤다. 창신동에서 고급 여성 화장품이 많이 팔리고, 양주가 많이 팔렸던 이유는 인근에 당대 국내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사창가가 있어서였다.

총학생회나 학생운동 활동을 했던 선배들의 옛이야기도 즐거운 소재였다. 여러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데, ‘백골단’ 이야기가 우선 떠오른다. 한 선배에 따르면 청(바지)청(자켓) 패션에 하얀 하이바 뒤집어쓰고 손에 곤봉과 방패로 무장한 백골단이 집회 때 떴다고 하면 무조건 피하고 봐야 했다. 평소 마른 몸에 상당한 전투력과 포효(?)를 보여주는 선배가 돌연 진지하게 들려준 이야기라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머릿속 메모장에 적어둔다. ‘백골단, 도망’.

하지만, 그 시절 ‘사수대’였다면 다른 제언을 해주었을 듯싶다. ‘사수대’는 횡적 형태로 데모대에 짓쳐들어오는 백골단을 상대하기 위해 학생 자치 차원으로 양성된 일종의 전투 전문 데모대이다. 학생운동에 심대한 타격이 있던 연세대 사태, 한양대 사태 등에서 학생운동 지도부의 혈로를 뚫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곤봉에 맞아 뚝배기 깨지는 일도 비일비재했고, 백골단에 잡혀 구치소 신세를 졌던 일화도 적지 않단다.

대표적인 사수대론 전남대의 ‘오월대’, 조선대의 ‘녹두대’로 한총련의 호남 계보(?)인 ‘남총련’에 속한 일종의 흑풍회(아시죠, 열혈강호) 같은 존재들이다. 얼마 전 우연히 사회평론사에서 펴냈던 〈길〉지를 보게 되었는데, 90년대 YS 정권을 대하는 오월대와 녹두대, 전남지역 대학 총학 간부진들의 고민과 난감함을 적은 기사였다.

3당 합당이라는 정치공학으로 탄생한 정권이지만 엄연히 국민의 선거를 치러 집권을 했고, 광주의 한을 쓰다듬기 위해 망월동을 방문하기까지 했는데 남총련 선배들은 문민정부를 인정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투석에 화염병에, 맞짱까지(아니 근데 전, 의경은 무슨 죄냐고) 당시 5월 행사는 파행으로 치달았던 모양이다. 우리는 그런 시대를 건너왔다.

86세대 민주주의-민주화운동과 주사파 권력의 기원(민경우 지음/ 인문공간 출판)
86세대 민주주의-민주화운동과 주사파 권력의 기원(민경우 지음/ 인문공간 출판)

민경우 미래대안행동 공동대표가 쓴 <86세대 민주주의-민주화운동과 주사파 권력의 기원>을 읽었다. 저자는 84학번으로 당시 소속 단과대 학생회장을 시작으로 학생운동판의 고인물처럼 살다 통일운동에 경도되고 김일성과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지경에 이르다 한국사회의 역동성과 체제의 성숙성에 품은 마음을 버리게 된다. 그는 소위 통일운동을 한다는 명분으로 2차례에 걸쳐 수인 생활을 하는데, 석방될 때마다 제련된 강철 같은 운동가가 돼 그 바닥에서 명망을 쌓는다.

어디서 많이 보았던 장면 아닌가. 조직폭력배의 꼬마 정도 되는 행동대원이 상대편 행동대장쯤 되는 인물에 칼을 놓고 감옥에 갔다 나올 즈음이면 조직의 들보라며 환영을 받는. 물론 강호의 도리가 땅바닥에 떨어진 근자 조폭 세계에선 칼을 놓기보단 소장(訴狀)을 건네는 식이고 설사 칼을 놓는다고 해도 그건 그냥 그 치의 독자 행동으로 회사에선 모르쇠하는. 주사파들의 운동 방식도 이와 비슷했나. 어땠을까.

책은 1980~90년대 낡은 방식의 운동권이 쓰던 ‘택’(tactic)을 회고하는 선에서만 그치지는 않는다. 저자도 짚었지만, 현재 우리 정치의 주류는 당시 운동 판에서 한 자락 했다는 자들이 차지했고, 이들은 당시의 순수성(을 담지했는지도 의문이다)을 잊은 채 권력, 돈, 세습, 비리 같은 데에 서슴없이 공적 권력과 자원을 이용한다. 조국이 그랬고, 송영길, 이인영, 임종석, 오영식 같은 치들을 꼽을 수 있다.

조국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저자는 운동권 발치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조국의 80년대 동정을 소개한다. 본래 진짜 운동권은 자신의 운동했던 일을 이야기하는데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있는데 조국은 노골적으로 자신의 의혈과 공적 소명을 운위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선배들에 따르면 조국이 활동했다고 알려진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 부설 연구소 지도위원이었다는 데 찐 사노맹 맹원들은 그를 본 적이 없다. 키가 크고 훤칠한 외모에 눈에 안 띄는 게 이상하지 않나. 영문과에 다니던 정 아무개 선배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조국을 찍었다던 전설도 있는데 말이다.

이야기가 샛길로 빠졌는데, 1980~90년대 운동권이 세상을 보다 지속적으로 지배하려고 하는 근자의 시도를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책은 읽을 만하다. 지금 그들의 순정은 눈에 들지 않는다. 3기 전대협 의장님이 등극(!)하시고 그들이 보였던 영웅놀이, 병정놀이, 왕게임 등이 21세기 돈과 아파트, 권력, 감투 등의 현실 아이템을 장착하고 복마전처럼 펼쳐지는 현재와 미래가 보인다.

저자는 2000년대 이후 학생운동의 전개 과정도 향후 책으로 발간한다고 예고해뒀는데, 나는 사실 이 부분이 더 기대된다. 2005년도 학부 1학년 때 전남대에 편지 하나 띄워놓고 5.18을 체험한다고 광주에 간 적이 있었다. 총학생회실에 들어가자 아주 극진히 나를 맞이하는 선배들을 생각하면 기꺼운 추억이다. 그러던 중, 학생회 창고 같은 곳에 가림막을 친 채 고단한 잠을 자고 있는 사람 하나가 있었는데 뒤에 알고 보니 한총련 수배 간부였다.

저자는 90년대 한국 고도성장기의 과실을 누릴 시기였던 이른바 ‘마이카 시대’, ‘X세대’를 지날 때도 관성으로 통일운동에 매진 중이었는데 TV에서 ‘룰라 김지현’이 화려하게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며 ‘아, 이건 뭔가 아닌데’ 하며 지향점과 현재와의 간극을 느꼈다고 한다. 주사파들의 대남한 인식은 미제의 식민지였기 때문인데, 1987년 6월 이래로 우리는 투표로 지도자를 뽑고 자신의 재산권을 양껏 발휘하는 자유와 민주, 평등, 평화의 오늘과 까끌거리는 공존을 하게 된다.

나도 유사한 감정을 느꼈다. 역시 2005년 광주였다. 당시는 한창 삼성공화국 담론이 전파되던 시기로 광고를 통한 언론 길들이기, 검찰을 비롯한 우리 사회 전방위 로비로 떠들썩하던 무렵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관련 자료를 공부하고 스터디까지 했던 나에게 전대 총학 선배 하나는(03학번이었다),

“아무튼, 미국 아니 미국제국주의가 문제예요. 손님(나를 두고 손님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 이 사회의 근본적인 제 문제는 남한 땅이 미국의 식민지라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거죠.”라고 말했다. 그때 내가 느꼈던바, 광주는 80년 5월, 90년 분신 정국 등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구나. 당시 내게 그런 정세 분석을 들려주었던 선배는 지금쯤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저자가 살아온 궤적을 보건대, 책의 서술이 재미없다는 데엔 이해가 간다. 국립대 의대를 입학한 뒤 자퇴하고 같은 학교 국사학과에 입학해 평생을 두고 통일운동과 정세 분석, 성명서, 기자회견문 등을 썼던 사람이다. 현재는 수학연구소를 운영 중이라니 소재가 분명 재미있음에도 책 읽는 속도가 붙지는 않았다.

향후 출간될 2000년대는 내가 학부시절을 보낸 시절이니 보다 즐겁고 재밌게 읽을 수 있으려나. 비단 재미에 머무르는 책은 아니고 현재 이 사회를 좌우하는 사람들의 특징과 과거 행적을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읽어봄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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