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곽정은의 이정재를 두고 한 다소 부적절한 발언이 뒤늦게 밝혀져 논란이 된 바 있다.
관련 기사곽정은, 과거 인터뷰서 이정재 성희롱“당시 스무 살 언저리에 있던 나와 그리고 내 또래들에게, 당신은 말하자면 처음으로 섹스라는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 남자였어요”라는 발언이 문제였다.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여성’으로서의 발언이기 때문에 성희롱이라기보다는 주체적이고 당찬 발언이라고 해석하는 듯하다.
그러나 만일 남성이 여성을 두고 비슷한 발언을 했다면 사회적 매장감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섹스칼럼니스티이건 아니건 실제 인격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은 확실히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서인영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린 곽정은(출처 jtbc 마녀사냥)다른 이야기지만, 발언에 대해 논란을 떠나서 유명인들의 공개적인 성적발화에 대한 진보진영의 이중적인 반응을 보면 진보진영이 마이너티리티와 메이저리티에 대한 구분에 집착하며 각각에 대해 별개의 윤리적 잣대를 가져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마이너티리티(일상에서 성적인 발언을 제약당하는 여성)라면 어떠한 방약무인한 언행을 해도 변명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이중잣대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발상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이중잣대는 다수파라고 불리는 측에서의 문제 제기와 항의를 봉쇄하며 일종의 자기검열과 자학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비윤리적이기까지 하다.
진보진영의 담론을 가만히 보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다수파’나 ‘메이저리티’가 되는 것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미안하지만, 이것은 비유하자면 일종의 마음의 병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이것이 마음의 병인 이유는 다수에게 죄악감을 강요하는 멘털리티는(종교적인 고행으로는 긍정할 수 있으나) 자신이 다수를 점해서 상대를 소수로 만드는 것이 게임의 기본법칙인 정치사회에서 스스로 자멸적이고 자학적인 행동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출처 시사인정치에서는 다수파나 메이저리티라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치가 추구해야 할 기본적인 법칙이기까지 하다.
예를 들면 내가 이성을 좋아하는 남성이라고 치자. 이 경우 내가 진보진영에서 섬세한 감수성을 가졌다며 혹자로부터 윤리적 점수를 손쉽게 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헤테로 시스젠더 스트레이트 남성’이라는 외계어로 자기를 소개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옹알이’는 물론 진보진영 내에서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일종의 뒤틀린 자기과시이다. 그것은 나의 남성이자 이성애자로서의 다수적 정체성을 일부러 상대화하는 태도이며, 이 다수적 정체성이 그 자체로 평소 여성과 성 소수자에게 억압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겸손한 자기 시인과 자기부정의 태도를 어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이 현재 누리고 있는 성적·인종적·문화적 정체성이 사회의 다수라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또한, 나와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 통계적으로 다수라는 사실이 딱히 자랑스러워 할 일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자신이 메이저리티라는 것에 대한 죄악감과 콤플렉스가 마음의 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한 콤플렉스에 대한 반동이 오히려 다른 편에서는 자신의 남성성과 남성 됨에 대한 더욱 극렬한 긍정을 낳기 때문이다.
아무튼, 설사 진보좌파라 해도 그런 바보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보가 자신의 마음의 병에서 벗어나는 그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이 성적취항이나 어떤 문화적·인종적 정체성에서 자신이 다수라는 사실 자체에 대해 이상한 변명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어떤 이상한 이름을 붙일 일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의 다수적 정체성이 소수자에게 억압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설파하는 죄악감의 사제들에게는 ‘오히려 당신들이야말로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응수할 필요가 있다.
출처 한겨레 토요판미셸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정체성에 대한 자기 고백을 유도하는 것은 근대적인 권력과 규율의 모태가 되었다. 미셸 푸코는 좌파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는 탈근대 학자이지만 그의 말 자체는 그다지 경청 되지 않는 듯하다.
이것은 성 소수자나 여성이나 사회적 약자를 주변화하거나 멸시해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자신이 소수파이며 약자이며 피해자라는 사실을 어필하며 손쉽게 점수를 따는 것은 종교나 윤리의 영역일 수는 있으나 ‘정치’와는 무관하다는 단순한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다. 오히려 소수자나 여성성 혹은 이런저런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강렬한 집착은 탈정치화의 징후이기까지 하다.
본래 진보좌파의 이념은 ‘소수가 단결해서 다수가 된다’와 ‘약자가 연대해서 강자가 된다’는 강령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강령 아래서는 다수와 소수 그리고 강자와 약자의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할 수 있는 것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예컨대 곽정은은 여성이기 이전에 섹스 칼럼니스트로서 지면과 방송상에서 담론적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러한 영향력은 보통의 남성도 보통의 여성도 갖고 있지 않은 성질의 것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억압받는 ‘약자’를 대변한다는 경직된 도식은 자칫 칼럼니스트로서의 자신의 영향력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가리는 빌미가 될 수 있으며 오히려 여성은 약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책임에 둔감하다는 사회적 편견을 강화할 수 있다.
허지웅의 사이다 발언이처럼 강자와 약자, 다수와 소수, 메이저리티와 마이너리티 등 위계화된 정체성의 구분에 집착하는 것은 본래는 약자들이 단결해서 강자가 되며 강자다운 강함은 물론 그에 수반되는 책임감과 고상함을 추구해왔던 진보진영이 건강한 권력의지를 상실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약자와 소수자가 차별받고 착취 받지 않으며 해방되는, 이른바 진보좌파가 ‘지향하는’ 보편적 세계 혹은 해방된 세계에서 여성이나 성 소수자 그리고 장애인 등의 정체성은 말 그대로 하나의 정체성일 뿐이며 그것이 아무런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 세계이다.
이는 쉽게 말해 모 대학의 학생회장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 딱히 칭찬 거리도 비난거리도 되지 않는 세계를 의미한다. 과거의 진보는 그러한 세계를 획득하기 위해 싸워왔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현재의 진보좌파는 누가 누가 더 가련하고 사연이 많은 소수자이고 약자인가, 누가 누가 더 불쌍한 피해자인가, 더 고상하게 말해서 누가 ‘호모 사케르’인가를 경쟁적으로 과시하는 절차에 집착하고 있다. 그런 식의 경쟁이라면 진보좌파는 절대 보수를 이길 수 없다.
한국일보 5월 19일자 <페미사이드 쇼크> 극단 치닫는 女 혐오… “무섭지만 굴하지 않겠다” 기사 갈무리진짜로 불쌍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보수세력을 지지하는 소위 경멸적으로 일컬어지는 빈곤층 ‘틀딱’이기 때문이다.
그들이야말로 자신의 곤경을 제대로 언어화할 수 있는 사회적 수단과 교양 그리고 연결망을 박탈당한 궁극의 소수자 아닐까? 이들은 심지어 자신이 소수자이고 약자라는 것을 경쟁적으로 어필하는 인문사회적 교양과 언어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현재 진보진영이 일종의 자신들의 ‘교양’으로 과시하는 정치적 올바름의 언어는 그 외부에서는 기껏해야 ‘옹알이’에 불과하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옹알이’로는 다수의 사람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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