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이슈에 대해 주류 여성계에 이의를 제기하면, ‘안티페미니스트’라는 낙인이 금세 따라붙게 되어 있다.
물론 필자가 혐오하는 대상은 페미니즘보다는 다른 곳(광의의 불평등과 빈곤 등)에 있으므로 스스로 적극적으로 페미니즘을 ‘적’으로 설정하며 안티페미니스트라 규정하고 싶지 않으며, 그러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본격 페미니즘 담론 비판서인 <포비아 페미니즘> 출간을 앞둔 상황에서 저들 일각으로부터 그렇게 불린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것이, 페미니즘의 주된 조류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성평등에 반대한다는 의미와 절대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굳이 길게 변명하지 않아도 자명한 사실이다. 내친김에 말하면, 페미니즘의 조류에 이의 제기를 반여성이나 반성평등주의로 규정하는 행위는 요즘 탈냉전 시대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적 협박(ex 체제에 반대하면 용공분자나 반동분자)에 불과하다.
이미 필자는 오래전부터 단어의 의미를 자신들이 독점하고 남용할 수 있다는 페미니스트 상당수의 오만한 태도에 질려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이 ‘그 자체로’ 성평등을 의미한다든가, 여성혐오는 존재하지만 남성혐오는 존재하지 않는다처럼 <1984> 식 궤변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페미니즘은 성평등의 개념에 접근하는 하나의 특이한 방식일 뿐이고, 위례초 교사의 ‘한남’ 발언이나 그가 교육현장에서 남자아이를 대했다고 전해지는 태도(‘특이하고 별난 아이들은 다 남자’)는 분명 남성혐오 사상의 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위례별초등학교 최현희 교사의 한남 발언 트위(출처 MLBPARK)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들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처럼 단어의 의미를 제멋대로 바꾸는 방식으로 자신의 어젠다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남성혐오는 정당한 저항일 뿐 진짜 혐오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페미니스트들이 혐오를 매우 특이한 의미로 사용할 뿐이다.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감각에만 호소하는 그러한 언어를 ‘사적 언어’라고 비판한 바 있다.
물론 급진 페미니스트들이 미소지니=여성혐오라는 단어를 단지 ‘여자를 증오하는 남자들이 있다’는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진짜로 말하고 싶은 의미는 ‘사회 구조적으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증오를 부추기고 확대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이 보편적으로 존재한다’이다.
물론 우리가 익히 알듯이 일베와 같은 여성혐오 신드롬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것은 사회적인 병리 현상이자 증후군(신드롬)이며, 그러한 증상은 그 배후에 있는 진짜 사회문화적 구조(사회경제적 불안정성, 현실의 또래문화를 대체하고 잠식해나는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 성적관계에 대한 문화적 규범의 부재 등등)와는 별개의 층위에 놓여 있다.
분명한 것은 여성혐오를 체계적으로 규범화하고 학습시키는 사회문화적 구조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구조가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담론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일베와 같은 하위문화의 비뚤어진 전복과 정반대로 여성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주류 사회적 문화적 규범의 사례가 더 풍부하고 강력하다. 그것은 법과 제도에서부터 어린이 학습만화 그리고 대중문화가 여성을 배려해야 할 존재로 표상하는 방식에까지 다양한 차원에 걸쳐 있다.
게다가 현재 넷상에서 전개되는 젠더논쟁의 조류는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여성혐오가 아니라 (앞으로도 보겠지만) 또래 여성을 상대로 문화적 인정 투쟁을 하는 젊은 남성의 출현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들은 과거 가부장제 남성들에게 보이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다. 진짜 가부장제 규범을 내면화한, 예컨대 40~50대 이상의 남성들은 여성을 상대로 집단적인 인정 투쟁을 벌이지 않는다. 이것은 오히려 가부장제가 붕괴하고 있다는 신호이다.
어떻게 본다면 현재 여성계가 추구하는 여성혐오 어젠다 및 이슈는 가부장제 억압가설로 설명할 수 없는 사회현상을 적절히 포착할 수 없는 무능력을 은폐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여성계가 제기하는 여성혐오 이슈는 가부장제의 물적 토대와 사회문화적 토대가 실질적으로 붕괴한(정규 노동시장의 가족임금제 해체와 1~2인 가구의 확산 등) 이후에 다시금 성별대립적인 가부장제 억압모델을 부활시키려는 절박한 시도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남성이 ‘보편적으로’ 잠재적인 여성혐오 성향을 갖거나, 그것을 부추기는 구조에 사로잡혀 있다는 서사를 확산시키려 노력한다. 그 결과 다들 알다시피 성별대립 구도와 낙인 프레임이 확산됐다.
요사이 저널리즘에서 다수의 페미니스트는 남성이 잠재적인 폭력과 범죄성향을 갖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으며, 이에 따라 남성 대상의 특별교육과 사회적 관리가 필요하다는 낙인 프레임을 정착시키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한겨레 은하선 칼럼필자가 이러한 본질적으로 반동적인 조류와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안티페미니스트라는 칭호를 얻는다면 오히려 영광이다.
그런데 필자가 뭐라 불리는 것보다 더 주요한 문제는, 우리가 비슷한 관행을 ‘이미’ 겪었다는 것이다. 진보좌파 진영은 현실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적절하게 개념화하거나 그 이슈를 제대로 여론화지 못할 때마다 조야하고 손쉬운 계급투쟁론의 표상과 대체물을 어디선가 찾으려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
마르크스조차 혐오할 손쉬운 계급투쟁론은 자연과 인간, 남성과 여성, 혹은 젊은이와 늙은이 같은 생태적 서사, 페미니즘 서사, 88만원 세대 서사로 변주되곤 했다. 특히, 해외에서도 대중과 노동계급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진보진영은 계급투쟁론의 손쉬운 대체물을 이러한 정체성 정치에서 찾곤 했다. 이제는 그것이 한반도에서 성별대립 서사로 재변주되고 있다.
현재의 페미니즘 조류를 비롯한 각종 정체성 정치는 불평등에 대한 진지한 분석이 아니라 불평등에 대한 하나의 징후, 표상, 내지는 서사(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요사이 공식적인 진보언론과 관련 인터넷언론 일각을 보면 사회문제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이른바 ‘한남(충)’과 ‘개저씨’에 대한 개인적 서사가 범람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겪은 사회문제를 김치녀(?)에 대한 개인적 원한의 차원으로 축소하는 우파적 서사와 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분석과 진단 그리고 처방의 집단적 실행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SNS를 통해 소비되는 우파적인 3류 문학이 (위례초 교사 논란에 대한 대응에서 엿보이는 것처럼) 진보진영의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것은 이제는 새로운 문제가 아니므로, 이 정신 나간 ‘정체성 정치의 폭주’와 그 짝패인 ‘포비아 페미니즘 조류’에 어떻게 대응하는지가 진보진영이 보유한 정치적 학습능력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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