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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1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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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가 최근 게재한 만평으로 때아닌 홍역을 치르고 있다. 최근 연달아 터진 문화계 성폭력 폭로 사건들을 염두에 둔 듯 여러 남성이 단체로 바지를 내리고 있는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 그림 속에 문재인 대통령이 등장한다는 논란이다.
이에 해당 만평을 그린 권범철 화백은 이같은 주장을 부인하며 자신은 그저 “나이 든 기득권 남성”을 풍자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문화계 성폭력 폭로사건을 풍자한 <한겨레> 20일자 만평이 주장을 사실이라고 전제하더라도 의문은 남는다. 문제의 만평처럼 남성집단의 추악함을 풍자할 때 바지를 내리는 식의 성적 조롱이 들어가는 것이 과연 괜찮은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한겨레>을 위시한 평소의 진보언론들은 여성 정치인의 추악과 위선에 대한 풍자에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언론과 유명인사들은 적어도 공식 석상에서 여성의 성에 대해 발언할 때 지극히 조심스럽다.
반면 남성의 성을 희화화하는 표현에 대해서는 사석에서든 공석에서든, 지면에서든 방송에서든 이렇다 할 브레이크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도 분명 기울어진 운동장 내지는 인식의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한편 여성의 성에 대한 풍자를 금기시하는 윤리적 잣대와 관련해서 과거 표창원 의원(더불어민주당)도 큰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박근혜의 얼굴을 여성의 나체와 합성시킨 그림 <더러운 잠>을 국회에 전시되도록 방치했다는 이유로 큰 비난을 받았다.
사진=더러운 잠지난 탄핵정국 당시 ‘세뇨리땅’, ‘얼굴빵빵’ 등의 가사로 박근혜의 성형시술 의혹을 풍자한 DJ DOC의 노래 <수취인불명>(심지어 이는 박근혜에 대한 노골적인 성적 비하와 거리가 멀다)도 비판의 표적이 됐다.
이때 진보언론의 지배적인 시각은 ‘꼭 성적인 대상화나 비하의 코드가 있어야만 풍자를 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제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되물을 필요가 있다. 이 말이 어렵게 들린다면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최근 일부 간호사 사이의 ‘태움(집단 괴롭힘)’과 같은 음성적 문화가 한 피해자의 자살을 통해 수면 위에 드러나 사회적 논란이 된 적 있다. 또한, 3심 판결이 나오기까지 한 독립영화 여성 감독의 성폭행 혐의에 대해 여성 영화계가 침묵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공분을 사기도 했다.
독립영화 여성 감독 이현주, 청룡영화상 신인 감독상 수상(출처 SBS)이때 문제가 된 여성집단을 단체로 아랫도리를 내린 이미지로 풍자한다면 대체 어떤 논란이 일지 상상해보라. 많은 이들은 풍자의 대상이 된 여성집단이 관련 사건에서 가해자(강자) 내지는 공범자의 위치에 있음에도 우리는 이를 대단히 부적절한 묘사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처럼 사안에 대한 비판적 시각 자체는 정당하지만, 방향성과 품위를 잃은 풍자는 사건을 선정적으로 소비하도록 만들고 도리어 사람들의 불쾌한 감정만 자극한다는 것이 지금까지 <한겨레>와 일부 언론이 정립해온 가치 기준이자 논조였다. 이번 문제의 만평이 데스크를 통과하는 순간 <한겨레>는 스스로 정립한 기준을 위반한 셈이다.
이때 남들에게 노력하길 요구하는 기준을 자기 자신도 지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혹여나 평소의 논리대로 ‘여성은 약자이고 남성은 강자이기 때문에 남성에 대해서는 성적 비하와 조롱을 폭주시켜도 상관없다’는 주장을 내세우지는 않을까 걱정스럽기만 하다.
애초에 약자와 강자를 나누는 사회적 권력 관계가 성별을 가로지르는 지점에 대한 고민 없이 ‘약자·소수자의 상처 입은 감정이 우선’이라는 주장을 일방적으로 내세우는 행태가 진보언론에서 유행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여전히 이 주장 속에도 약자와 소수자도 동일한 인권 규범과 존중의 문화 속에 통합되어야 한다는 모종의 ‘보편성’에 대한 요청이 녹아 들어가 있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보편적 지평을 스스로 훼손하면서까지 자신의 윤리적 정당성을 강변하는 퇴행적인 언론의 모습에 이미 많은 독자가 질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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