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선 효과’와 총여학생회의 ‘시대착오성’

리얼뉴스 승인 2018.06.20 13:07 의견 0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총여학생회

연세대 총여학생회(이하 총여)가 5월경 ‘다리 사이에 덜렁거리는 살덩이’, ‘남성사회에는 강간을 가르치는 문화가 있다’ 등 남성혐오 발언 논란을 일으킨 은하선을 ‘인권 강사’ 자격으로 초청해 강연을 열었다가 큰 반발에 부딪혔다. 결국 총여는 학생사회의 반발을 무시하고 강연을 강행했다.

강간문화를 언급하는 은하선(출처 EBS 까칠남녀)

이후 강연을 반대한 학생을 중심으로 총여의 명칭을 학생인권위원회로 바꾸는 등의 ‘구조개편안’이 발의돼 학생 총투표에 부치게 됐다. 이에 대해 연세대 내 페미니즘 진영은 투표를 보이콧하자는 선전을 벌였지만 지난 15일 투표율이 50%를 넘기게 되면서 결국 효력을 가지게 됐다.

투표 결과 총여 개편안에 대해 연세대 학생들은 찬성 1만1748명, 반대 2137명이라는 압도적인 찬성률(82.74%)을 보였다. ‘페미니즘만’이 아닌 ‘보편적 인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조직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압도적인 공감을 얻은 것이다.

한편 예상대로 남학생은 찬성 8632명, 반대 456명, 기권 180명을 기록하는 높은 찬성률을 보였는데, 여학생의 경우에도 의외로 찬성표가 반대표를 크게 웃돌았다. 여학생 찬성표는 3116명인 반면 반대표는 1681명에 기권이 220표로 나왔다(찬성률 62.1%). 물론 여학생의 투표 참여율이 남학생보다 저조하지만, 상당수 여학생 또한 총여의 무리한 행동에 공감하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총여학생회의 정당성 상실 배경

자신이 판매하는 딜도 등의 성행위 기구 홍보를 ‘인권운동’으로 포장해오며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향한 조롱마저 서슴지 않았던 은하선의 행동이 이번 학생투표의 가장 큰 일등공신(이른바 은하선 효과)이었다. 하지만 그 배후에도 총여의 정당성 상실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기적인 섹스' 저자 은하선(출처 SBS)

본래 총여는 과거 여성의 낮은 사회적 지위와 낮은 대학진학률을 배경으로 출발했다. 80~90년대만 해도 상당수 대학 캠퍼스에서 여학생이 절대적인 소수였기 때문에 일종의 소수자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의 차원에서 여학생을 별도로 대의하는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수용됐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조치의 역사적 유효성이 상실됐다. 2000년대 후반부터 여학생의 대학진학률이 남학생의 대학진학률을 앞지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2009년에 이미 여학생의 대학진학률이 남성을 넘은 이래로 2018년 현재 비교적 큰 격차(남학생 65.3%, 여학생 72.7%)를 유지하고 있다.

즉 20대 후반 이하부터는 유사 이래 처음으로 ‘여성의 가방끈이 남성보다 긴’ 하나의 세대집단이 형성된 셈이다. 현재 유행하는 페미니즘 담론도 역사상 유례 없는 여성 고학력 집단의 등장과 더불어 고학력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취업전망이 비관적인 사회경제적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여학생이 더 이상 캠퍼스 내의 소수자가 아닌 이상, 학생사회의 대의기구를 성별로 중복해서 운용해야 할 당위성이 희박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상황에서 총여가 학생사회 내에서 정당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남학생에게도 호소력이 있는 인권담론에 호소하거나 학생회비를 분리해서 운영하는 등의 자구책을 마련해야 하나 그러지 못하는 경우 논란을 피해갈 수 없다.

연세대 총여학생회 학생총투표 서명 ⓒ뉴스1

또한 고 경희대 서정범 교수 무고사건의 사례에서처럼 무고한 희생자를 성폭력범으로 몰아붙인 뒤 후일 민주노동당 당직선거에 출마한 총여 간부의 사례에서처럼 ‘일부’ 총여가 ‘유사 사법기구화’, ‘과격 정치세력화’됐다는 비난을 받은 바 있다.

실제로 이런저런 논란 끝에 성균관대, 건국대, 홍익대, 숭실대, 중앙대 등에서 잇달아 총여가 폐지되거나 인권위원회로 개편되는 수순을 밟게 됐다. 일부 학교에서는 투표나 후보출마가 무산되면서 자리가 공석으로 남거나 비상대책위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이처럼 일부 대학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총여가 표방하는 페미니즘·소수자운동이 학생회 산하기구의 형태로도 충분히 보장될 수 있다는 사정도 총여의 축소 바람에 작용한다.

물론 여학생이 다수여도 여학생이 캠퍼스 내 권력관계에서 심각한 열위에 있기 때문에 여전히 총여가 존립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총여 개편 반대론을 펼친 이들도 바로 이러한 논리에 호소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연세대 사회과학대 학생회 단톡방에서 은하선 강연 반대시위를 벌인 남학생을 공공연히 조롱한 사회과학대 부학생회장(여성)의 발언에서 엿볼 수 있듯이 설득력이 떨어진다. 대부분 캠퍼스에서 여학생과 남학생의 발언권의 격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은하선 강연 반대 학생을 ‘한남충’으로 조롱한 연세대 사회과학대 부학생회장

더 큰 권력에는 더 큰 책임이

역설적이게도 캠퍼스 내에서 자생적으로 이는 페미니즘 담론에 대한 열풍이야말로 총여학생회의 존립 기반을 더더욱 위태롭게 하고 있다. 과거 총여는 우리 사회에서 주류가 될 수 없는 담론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온실’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대학가에서의 각종 여성주의 관련 활동과 논의는 총여학생회의 후견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공중파 방송으로까지 페미니즘 담론이 진출한 이상 더더욱 그러한 후견인주의가 필요한지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페미니즘이 대중화될수록 페미니즘에 대한 반론과 항의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 큰 권력에는 더 큰 책임에 따른다. 중앙정부에서 지방정부까지 그리고 각종 공공기관에서 대학가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은 메인스트림의 권력과 각종 지원금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을 차지하고 있지만, 시종일관 자신을 ‘희생자’와 ‘피해자’의 위치에 놓는 관행에 사로잡혀 있다.

-은하선 강연에 대한 학생들의 반발을 ‘백래시’로 몰아붙이는 중앙일보 기사
대학가에 번지는 ‘페미니즘 백래시’

총여 개편안에 대한 학생들의 ‘당연하고 상식적인’ 지지마저도 ‘백래시(반동)’로 몰아붙이는 일부 언론의 몰상식한 행태가 이를 잘 보여준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제 그러한 화법은 앞으로는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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