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코르셋의 진실을 들여다본다.
여성에게만 가해지는 사회적 억압을 벗어나자는 탈코르셋은 현재 한국에서 불고 있는 급진페미니즘 열풍과 관계가 깊다. 서구 특히 미국도 급진페미니즘 물결이 일어나던 1970년대 탈코르셋 운동이 불었다.
브래지어를 벗어 술통에 던져 넣고, 가짜 속눈썹을 떼어내 쓰레기통에 버리는 퍼포먼스가 이어졌다. 누구 좋으라고(바로 남성) 브래지어를 하고, 화장하며, 예쁜 옷을 입냐는 식의 페미니즘적 발상이었다.
사진 1. 1968년 NYRW(뉴욕의 급진 여성들)의 미스아메리카 반대 시위. 애틀란틱시티 컨벤션센터 광장에서 거들과 브레지어를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사진 2. 1968년 NYRW(뉴욕의 급진 여성들)의 미스아메리카 반대 시위. 애틀란틱시티 컨벤션센터 광장에서 거들과 브레지어를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는 퍼포먼스를 벌였다이처럼 페미니스트는 가부장적 코르셋, 여성 외모 코르셋, 여성 억압 코르셋 등을 남성 권력이 여성에게 씌운 억압이라 강변한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과 달리 패션의 발전은 여성들 간의 미의 경쟁에서 발전해 왔다.
예컨대 프랑스 루이 14세 시대의 문화 사조인 로코코 양식은 전 유럽 여성들의 화려한 미를 뽐내는 경연장이었다. 여성들은 앞다투어 허리를 최대한 가늘게 보이도록 보정 속옷인 코르셋으로 조여 드레스의 자태를 살렸다. 궁중 연회장에서 여성들의 미의 경쟁은 불꽃을 튀겼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화려함은 전 유럽 여성들의 선망과 질투의 대상이었다. 유럽 여성들의 미의 경쟁은 패션, 액세서리, 화장품, 헤어스타일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처럼 여성들은 경쟁을 통해 미모와 부를 과시했고, 자기 만족감을 충족시켰다.
코르셋의 역사는 르네상스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당시 코르셋은 여성만 착용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유용한 보정 속옷이었다고 한다. 최초로 코르셋을 입은 사람은 (왕족·귀족) 남성이었다는 설도 존재한다.
현대로 넘어와 미국의 전설적인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는 30대 후반부터 급격히 체중이 늘어 무대 공연에 나설 때는 남성용 코르셋을 입었다고 한다. 비단 엘비스 프레슬리뿐만이 아니다.
이같이 코르셋은 시대의 사조에 따라 변천해왔고,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시대의 의상에 따라 필요하면 입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사진=코코 샤넬서구 여성복식사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이는 샤넬 스타일로 유명한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다. 코코 샤넬은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보육원에서 자랐다. 스무 살에 의상실 점원으로부터 시작해 재능을 발휘한 코코 샤넬은 유행을 선도하는 디자이너가 됐다.
최초로 여성용 바지를 만든 코코 샤넬은 당시 복식인 코르셋을 입고 드레스를 입는 스타일을 단번에 바꿔버렸다. 단순하고 우아한 라인과 실루엣을 살린 투피스는 여성들의 의상에 획기적인 변화를 이끌며 새로운 유행과 스타일을 창조해 샤넬룩을 완성했다.
코코 샤넬의 미의 도전은 71살에 패션계를 다시 평정할 정도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거듭됐다. 코르셋으로 몸을 조이고 드레스를 걸친 여성 의상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최초로 여성용 바지를 만든 바로 위대한 여성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다.
이어 크리스티앙 디오르, 피에르 가르뎅 등 유명 디자이너의 출현이 이어지며 패션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왔다.
미를 향한 추구와 염원은 여성들이 가진 고유의 본능이며, 여성들 간의 은밀한 미의 경쟁 속에서 발전해왔다. 만약
여성들의 미의 경쟁이 없었다면, 패션은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탈코르셋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서구 페미니스트들이 반세기 전에 행했던 탈코르셋 퍼포먼스가 이제야 상륙해서, 화장품을 버린다, 머리를 짧게 자른다, 겨드랑이털을 기른다, 안경을 쓴다,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다, 옷은 내키는 대로 입고 다니겠다는 선언하는 국내 페미니스트들.
페미니스트가 탈코르셋을 하든 말든 그건 그들의 자유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남성들이 만든 족쇄로부터 해방이라는 탈코르셋 운동은 실패로 끝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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