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의 비전
블록체인 기술에 기초한 가상화폐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열광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블록체인 기술이 가지고 있는 산업 창출 능력, 공공서비스의 효율화 및 투명화,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 등 여러 잠재력에 주목하는 기사, 칼럼, 단행본, 보고서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중에서 대중의 눈길을 가장 강하게 사로잡은 것은 가상화폐가 제시하는 일종의 ‘사회비판적’ 혹은 ‘평등주의적’ 비전이었다. 가상화폐가 우리에게 권력과 독점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수평적이고 분권적인 경제질서를 가져올 것이라는 비전이었다. 그 비전이 없었다면 가상화폐에 대한 일종의 ‘종교적’인 열광을 설명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가상화폐가 등장한 시점은 금융위기 직후였다. 익명의 개발자 나카모토 사토시는 비트코인을 설계한 기념비적 논문에서 “P2P 버전의 전자화폐는 금융기관의 중개 없이도 온라인 결제수단이 거래 당사자에게 직접 전달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고 적은 바 있다. 이 건조한 문장 배후에는 2008년 금융위기를 일으킨 주범으로 지목된 대형은행, 투자기관, 중앙은행에 대한 비판이 숨어 있다.
케이시와 비냐의 저서 <비트코인 현상, 블록체인 2.0>은 선지자 나카모토가 제시한 비전을 보다 명확하게 해설한다. 암호화된 P2P 분산장부에 기초한 가상화폐는 “어떤 기관의 통제에도 놓여 있지 않은 분권화된 신용 시스템을 창출(17p)”하며 “중앙집권화된 신용 시스템”에 대한 급진적 대안을 추구한다.
이 기술의 핵심은 화폐와 정보의 지배력을 소수의 강력한 엘리트층으로부터 그 네트워크에 속한 모든 이들에게 이양하며, 그들의 자산과 능력을 되찾게 할 수 있다는 데 있다(18p).
비트코인을 위시한 투기 열풍이 지나간 이 시점에서 블록체인 가상화폐가 제시한 이 비전이 여전히 유효한지 냉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비트코인은 확실히 그 가격 상승세에 힘입어, 신종 알트코인, ICO, 거래소, 가격예측 시장, 채굴산업 등 새로운 관련 경제영역을 창출했다. 하지만 현실의 화폐시스템에 존재하는 (은행과 소수 대기업으로의) ‘경제력 집중’이 비트코인이 창출한 시장 및 산업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면 어떨까. 이는 초기 비트코인이 제시한 사회적 비전이 좌초했다는 방증 아닐까.
소수 거래소에 집중된 가상화폐 거래
코인 관련 사이트인 코인힐(coingills.com)은 세계 각국의 가상화폐 거래소 현황을 집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현재 166개의 거래소에서 1692개의 가상화폐를 거래하고 있다. 이곳에 집계되는 주요 가상화폐 거래소의 지난 24시간 동안의 가상화폐 거래량(9월 13일 BTC 기준) 점유율 현황을 살펴보면 상위 5개 거래소가 전체 61.55%의 코인 거래량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7년 말의 가격 폭등기가 지난 이후에도 소수 거래소에 거래가 집중되는 현상이 여전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에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거래소의 규모가 클수록 거래 수수료에 관한 ‘규모의 경제’가 나타난다는 점, 그리고 거래 이력이 축적될수록 거래소를 둘러싼 보안 이슈에 대한 신뢰도가 상승한다는 점이 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예금 계좌를 틀 때 소수의 대형은행을 신뢰하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과점화된 채굴산업
비트코인은 일련의 수학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장부(블록체인)를 유지하고 또한 신규 비트코인을 보상한다. 이는 ‘채굴’이라고도 불린다. 웹사이트 블록체인인포(blockchain.info)는 주요 채굴 풀(mining pool)의 채굴 점유율을 공개하고 있다. 여기서 채굴 풀이란 비트코인 전문 채굴업자들의 채굴조합을 의미한다.
블록체인인포에 따르면 9월 13일 현재 상위 5개 채굴 풀이 67.4%의 채굴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왔다. 채굴산업에도 경제력 집중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비트코인 공급이 끝나는 시점이 도래한 이후에도 이들 소수 채굴자가 (만일 이들이 비트코인의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떠나지 않는다면) 비트코인 거래 수수료를 독점할 가능성이 높다.
알다시피, 현재에도 1 비트코인당 6000달러를 유지하는 비트코인 시장에서 비트코인 채굴은 여전히 강력한 수익 창출 수단이다. 그러나 일반인은 이러한 산업에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비트코인은 공급 스케줄이 알고리즘에 의해 정해져 있어(현재 10분당 12.5개) 채굴자 간의 경쟁이 치열할수록 채굴 난이도는 상승하고 채굴의 채산성은 하락한다. 실제로 최근 2년간 비트코인의 수요와 가격이 폭등함에 따라 채굴자들이 몰려 채굴 난이도 역시 지수적인 성장 곡선을 그린 바 있다.
채굴 난이도가 상승하면 채굴자들은 컴퓨터의 연산력을 집중시켜 채굴 성공 확률을 높일 유인이 발생한다. 개인 컴퓨터로 비트코인을 채굴할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대량의 전문 채굴 장비를 도입한 공장식 업체만이 채굴을 통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기업의 시장 독점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독점화된 비트코인 소유구조
비트코인의 보유 현황 그 자체에서 독점이 두드러진다.비트코인 이용자는 전자지갑을 다운 받은 후 공개키를 이용해 (은행 계좌에 해당하는) 주소를 생성하고 다른 주소와 송금을 주고받을 수 있다. 비트코인 블록체인상에서 이러한 주소는 공개돼 주소별 비트코인 보유현황 역시 파악할 수 있다. 이를 응용해 비트인포차트(bitinfocharts.com)는 주소별 비트코인 보유현황의 (누적) 분포를 공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상위 11.14%의 주소가 99.15%의 비트코인을 보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비트코인과 유사한 블록체인 기술에 기반한 라이트코인과 비트캐시도 유사한 소유의 집중 구조(상위 10% 주소가 95% 이상의 가상화폐 소유)를 보인다. 이같은 극단적인 소유의 집중은 가상화폐의 절대다수가 소수의 ‘큰손 투자자’ 혹은 ‘거래소’ 지갑에 묶여 있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이는 주요 가상화폐를 실생활의 재화와 용역의 거래에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노구치 유키오 같은 논자는 비트코인의 가격상승(버블)에 대해 우려하면서도 비트코인의 가격 거품이 진정되면 실생활의 쓸모가 많아지리라 전망하고 있다<가상통화 혁명>. 하지만 2018년 1분기 이후 각종 가상화폐의 가격이 상당 폭 떨어졌음에도 비트코인의 경우 여전히 1BTC당 6000달러의 가격 지지선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도 앞서 본 비트코인의 소유의 집중이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대부분 투기적 목적의) 소유의 집중은 거래소 시장에서의 가격 거품을 유지하는 동시에 실생활의 거래에 제약을 주고 있다. 많은 가상화폐 예찬론자가 대기업과 소수 금융기관의 독점을 비판하면서 가상화폐가 다수 이용자 간의 수평적·분권적 교환질서를 가져올 것이라 평가했지만 실은 가상화폐야말로 그들이 비판했던 현실과 닮아가고 있다.
일각에서는 비트코인을 둘러싼 가격조작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2018년 저명한 화폐경제학 저널에 발표된 한 논문은 2013년 하반기 두 달 동안의 비트코인 가격 상승 배후에 가격조작의 정황이 포착됐다는 내용을 공개한 바 있다. 이러한 가격조작은 물론 비트코인의 극단적인 소유의 집중 없이는 불가능하다.
비트코인이 봉착한 아이러니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비트코인을 중심으로 살펴볼 때 가상화폐가 많은 이들이 예측했던 것과 달리 ‘대안화폐’ 혹은 ‘신용 시스템’의 역할보다는 기존의 법정화폐와의 환금 가능성에 기댄 투기성 자산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비트코인의 대안이 되는 여러 가상화폐가 출시됐지만, 올해 초의 가격 폭락 이후에도 대부분의 거래소 시장에서 이들 알트코인과 비트코인 사이의 가격 동조성은 여전히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나름의 성능과 기능을 개선한 알트코인조차 일상의 쓸모에 의해 그 가치가 평가되지 않고 오히려 시장 전반의 투기 심리에 휩쓸린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가상화폐가 창출한 시장 곳곳에서는 앞서 보았듯, 대형 채굴 조합, 대형 거래소, 큰손 투자자(일명 ‘고래’) 등이 나타나고 있다. 비트코인의 경우 비트코인의 채굴과 거래를 독점하는 기관들이 존재하고 이용자들은 이들 기관에 의존하면서 각종 수수료를 내야 한다. 이것은 현실의 금융 질서에서 일어나는 사태와 전혀 다를 게 없다.
비트코인이 대형 은행과 금융기관이 화폐와 신용을 독점한 현실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기획이었다는 점에 비춰보면 가상화폐 시장 및 관련 산업에서 나타난 이러한 ‘경제력의 집중’은 아이러니하다. 가상화폐에서 현실 비판적 대안을 추구했던 것이 어쩌면 환상이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가 온 것이다. 블록체인이라는 신기술을 매개로 새로운 사회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환상 말이다.
경제학 박사. 프리랜서 작가. '그 페미니즘이 당신을 불행하게 하는 이유'(2019, 공저), '포비아 페미니즘'(2017), '혐오의 미러링'(2016),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2014), '일베의 사상'(2013) 출간. '2014년 변신하는 리바이어던과 감정의 정치'로 창작과 비평 사회인문평론상 수상과 2016년 일본 '겐론'지 번역.
박가분
paxwoni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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