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N%를 위한 민주주의의 땅따먹기가 아닐까.
원래 독재란 상위 0.001%가 세상 만민을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해보자. 반면 민주주의는 ‘상위 N%’라는 개념 자체를 삭제해버린 체제다. 상위 100%가 모두 함께 우리의 미래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본이다. 그러니 나머지는 민주주의를 사실상 부정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성장과정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을 보면, 암묵적으로 절대적인 민주주의가 아닌, ‘그 사이 어디쯤의 민주주의’가 추구되는 건 아닌가 한다. 그것이 매우 잘못되기만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가만 보면, 지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지지해왔으나 이 이상의 민주주의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라고 비하하는 사람들은 정확히 ‘자기까지만 민주주의’가 작용하기를 바라는 거에 불과하다.
오피니언 리더, 엘리트의 기준에서의 평등주의와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옛 시대의 자본가, 언론인, 정치인 모두 딱 자기의 원래 출신 계급까지만 민주화가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니었을까. 자신에겐 소중한 일이니까.
예컨대 투쟁의 역사는
나는 상위 5%인데 최소한 상위 5~6% 계층까지는 민주적 절차에 권리가 열려야 되는 것 아냐?
또는
아니지 나는 상위 20%인데 최소한 상위 20%까지는 권리가 열려야 되는 것 아냐?
또는
아니지 나는 상위 30%인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억울해 나까지는 포함해야지
같이 암묵적으로 하위 몇 %는 이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 최소한 나는 포함되었으면 좋겠다는 타협적 민주주의 내의 투쟁이 아니었을까.
여기서 ‘민주’의 개념이 아직까진 100%의 국민 모두를 포함한 개념은 아니라고 본다. ‘지적 능력이 있고 지각이 있는 나 같은 사람’이라 흔히들 생각하는 개념이 상위 몇 %에 해당됐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런 식으로 상위 계층, 차상위 계층을 나누고 그 윗선에서 권력을 나눠야 하는 싸움이 아니었는가 한다.
좋다, 100%의 민주주의는 시기상조라고 치자. 100%라는 것은 제법 배타적인 개념이어서, ‘그렇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로 결론이 나야 한다. 필자는 ‘아니거나’가 현재로선 더 유연한 사고라 생각하고, ‘그렇거나’로 가기 위한 진정성 있는 노력이나 고찰은 있어야 한다.
만약 100%의 민주주의가 아니라면, 상위 몇 %까지가 이 민주적 절차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일까에 대한 정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대략적으로라도 말이다.
어설픈 체제화로 하위 N%의 참여권을 배제하는 담론이 되어서도 큰일이지만, 사실 상위 계층의 사람이 알아서 다 결정하는 사회에서 굳이 100%의 민주주의인 척하고 지내는 것도 지나친 위선과 가식이라 사회적 비용이 만만치 않다.
필자는 위선이 위악보다 나쁘다고 생각한다. 진실에서 더 멀어지게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고, 거짓이 더 횡재하는 환경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상위 1%가 의사결정 하는 것은 현시대에 맞지 않는다. 상위 5% 정도가 현실적으로 국가의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 오피니언 리더들일 것이지만 그마저도 현시대엔 맞지 않는다. 상위 10%? 20%? 그 기준은 무엇으로 둘 것이며, 어떻게 그들의 참여권을 강화하고 고무시킬 것인가. 언젠가 상위 50%, 상위 90%가 참여하게 하려면 무슨 제도가 있어야 할까.
결국 최다의 국민이 스스로의 운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참 맛이다. 이 말에 부정한다면, 더 얇은 상위층의 독재 체제를 지지해야 하고, 이 말을 긍정한다면 더 넓은 상위층의 집단 의사결정을 장려해야 하지 않을까.
N%를 어디에 둘지에 대한 싸움이다. 이대로, ‘우리는 100% 민주주의야’라고 주장하면서도 뒤돌아서 ‘어리석은 국민이 뭘 알겠나’라고 지껄이는 행위는 기만이다.
물론 누구나, ‘딱 나까지만 민주화’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위 1~10%의 계급에서 온 사람에겐 상위 99%가 모두 참여권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나까지’의 영역일 수도 있다. 더이상 그 ‘나까지’의 땅따먹기 싸움이 아니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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