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글 쓰는 ‘서연’입니다.
무겁게 내리는 비가 늦가을의 저녁을 더욱더 스산하고 어둡게 만드는 시간, 스탠드 불만을 켜놓은 방 안에 파란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고 있자니 자꾸 내면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감정들이 느껴졌습니다.
파란 화면이 꺼지면 손가락으로 터치, 다시 켜고 꺼지면 다시 켜는 반복된 행동을 거듭하는 사이, 그 잠깐의 찰나에 깊은 바다의 바닥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깊고 푸른 바다를 헤엄치는 깊고 무한한 마음의 감정들이요.
정신분석학자인 융이 말했던 무의식의 세계는 종종 물결치는 바다에 비유되곤 하는데 아마도 시공간이 주는 분위기, 그 안에 빠졌던 감성과 감정들이 그런 이미지를 비춰줬던 것 같습니다. 다들 그렇듯 스무 살 무렵의 말도 안 되는 연애, 그때 그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늦가을, 비 오는 저녁, 옛사랑의 추억과 어울리는 영화 한 편을 함께 나누기에 좋은 오늘인 것 같습니다. <더 딥 블루 씨>입니다.
성직자 아버지 아래에서 절제와 규칙이 몸에 밴 삶을 살아가던 헤스터는 꼭 그런 남편을 만나 늘 답답하게 여겼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데요. 그런 내적 결핍과 해방을 향한 갈증을 안고 있는 그녀 앞에 탈출구이자 이상향이 되어줄 남자, 프레디가 나타납니다.
그는 공군 파일럿으로 전장에서 영웅이 된 경험을 기억 속에 품고 살아가는 인물인데 열정적이고 자유분방한 기질을 가진 반면, 그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죽음에의 공포를 체험한 아픔이 있습니다. 헤스터는 자신이 느끼던 답답함과 정 반대 느낌을 가진 남자에게 첫눈에 빠져요. 프레디 역시 헤스터에게 반하지만, 사랑했던 이유가 헤어지는 이유가 되는 전형적인 모습이 그려집니다.
왜냐하면 프레디의 자유분방함, 충동, 격정은 사랑이라고 예외적이진 않거든요. 헤스터가 사랑한 그는 자신의 아픔과 감정만이 중요한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던 데다가 헤스터의 과도한 사랑은 집착과 자기 파괴를 담고 있는 것이었기에 그는 그녀로부터 부담과 위험을 느낄 수밖에 없죠. 프레디가 헤스터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자 그녀는 자살을 시도하려 합니다. 그 하나에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걸었던 그녀로서는 살아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너무 달랐던 두 사람인 만큼 그 사랑은 순간의 불꽃처럼 활활 타올랐으나 서로를 향한 사랑의 방식마저 확연히 달랐습니다.
잭하고 질이 있어. 잭은 질을 사랑해. 질도 잭을 사랑하지. 하지만 잭과 질은 다른 방식으로 사랑해. 잭은 사랑받고 싶다고 안 해.
프레디의 모진 말과 외면에도 헤스터는 매달립니다. 잡지 않겠다고 그러니 함께 있자고 부탁하지만, 그녀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프레디는 냉정합니다. 두 사람은 결국 이별하게 됩니다.
한편 그녀의 남편인 윌리엄은 그런 그녀조차 받아들이려고 애씁니다. 사랑이 아닌 욕정, 안정이 아닌 충동이라며 그녀에게 마음을 돌리라고 말하지만, 그녀는 비참함을 느끼는 와중에도 사랑을 비 온 후의 햇살처럼 편안한 것이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모든 걸 바꿔놓죠. 누구도 계속해서 예전처럼 살 수 없어요. 다른 걸 알게 되면요. (중략) 욕정은 삶의 전부가 아니지만, 프레디는 제게··· 삶의 전부에요.
헤스터의 사랑은 좌절되지만, 한편으론 그녀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를, 비로소 시작되는 새로운 그녀의 삶을 느꼈는데요. 그녀는 프레디를 만나 생에 처음으로 자유로워진 것이거든요.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자신의 틀을, 평생에 걸려 세워진 벽을 스스로 깨고 넘어온 것이거든요.
그건 생각보다 더 두려운 고통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는 용기입니다.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상대를 만난 것, 그를 사랑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체면을 세우지 않았던 것, 욕정이랄 수도 있겠지만 순간일지언정 활활 타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는 것, 그 뒤로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고 살아갈 힘을 키웠다는 것이 헤스터가 했던 사랑의 결과입니다. 폭풍이 모든 것을 휩쓸어가듯 모두가 곁을 떠났지만, 전혀 사라지지 않은 것이죠. 그녀 안에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사랑의 흔적도, 사랑이 가져다준 삶의 의지도.
영화의 시작과 끝은 창가에 선 헤스터의 모습이에요. 처음 아침이 오는 장소, 햇살이 닿는 곳입니다. 그 창을 열면 새날, 새 풍경이 그녀 앞에 펼쳐지는 것이고요. 그 길로 나서면 새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왜 영화의 제목이 깊고 푸른 바다일까 생각해보았는데, 그 심연의 깊이는 아무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하지만 언제나 신비롭고 파닥이는 생명이 살아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죠.
그래서 그곳을 항상 궁금해하고 상상의 날개를 폅니다. 파멸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가장 근원적인 인간의 감정인 사랑이 피어나는 곳인 우리의 마음과 닮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삶은 삶이 아닐 거라고, 그 두렵고 어려운, 그러나 놀랍고 신비한 사랑의 힘으로 우리는 하루를 살고, 하루씩 한 해를, 인생 전체를 살고, 비로소 나를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깊고 푸른 사랑, 그리고 사람에 기대어 삶을 살아가고픈, 여전히 두렵고 어렵지만 깊고 푸른 바다와 같은 인생을 헤엄쳐 나를 찾아가고픈 서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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