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으니 이따금 들리는 소리가 있다.
나도 이제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안한 말이지만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관객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사랑은 얼핏 모든 것이 아름답고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정작 당사자가 되면 사소한 것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실천 속에 나타나며, 아무리 허울 좋은 말조차도 이론에 불과할 뿐이다. 현장에서 주고받는 사랑의 과정은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로서의 사랑’이 아닌, 이 세계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역동적인 게임이다.
성숙한 사랑은 무엇이며 성숙한 관계 맺기란 또 무엇일까. 얼핏 간단해 보이는 문장이지만 필자는 이 질문에 대한 그럴싸한 대답을 들어본 적이 없다. 대부분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중하는’ 따위의 다소 해묵은 이야기만을 할 뿐이다.
그렇다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중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또한 이것이 성숙한 사랑의 전제임을 알고 있는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가? 적어도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 현대의 우리에게 성숙한 사랑이 무엇인지 전달하는 책이 있다. 바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이다. 60년도 더 된 책이지만 사랑에 대한 그의 통찰은 필자가 낡은 관념을 갖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굉장히 세련되면서도 날카로웠다.
현대사회에는 사랑에 대한 갈망과 예찬, 그리고 이별과 이뤄지지 않은 애절한 사랑을 표현한 무수한 영화와 노래가 존재한다. 그러나 사랑을 예찬하고 그 감정에 도취되는 사람들의 수만큼, 정작 사랑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 사람은 사랑이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생각할 뿐 노력과 지식이 필요하다는 가정을 하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태도의 이유로 3가지를 꼽는다.
첫째,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할 줄 아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는 것.
둘째, 사랑을 ‘능력’이 아닌 ‘대상’의 문제로 생각하며 자신이 생각한 짝을 찾기만 하면 저절로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
셋째, 사랑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의 지속적 상태를 혼동하는 것으로 열정적인 사랑을 하는 처음의 두근거림을 사랑의 전부로 안다는 오류.
꽤 많은 사람이 사랑에 실패한 원인이 상대를 잘못 만나서, 혹은 아직 자신의 진정한 ‘이상형’을 만나지 못해서라고 말한다.
하지만 결코 자기 존재의 크기를 넘는 사랑은 할 수가 없다. 내 안에 결핍된 무언가를 상대방을 통해 채우려는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사랑을 통해 상대방에게서 이득을 취하려 했다면 이득을 보지 못한 것에 분노하고, 허기진 마음을 달래려 했다면 마음을 달래지 못한 것에 실패했다고 좌절한다. 이 지점에서 <사랑의 기술>은 동시에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기 자신을 먼저 채워라.
내 몸 한구석을 비워 상대방으로 가득 채우려 하는 시도는 얼핏 보면 로맨틱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상대방이 나를 충족시켜주길 바라는 사랑은 상처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사랑도 에너지이기 때문에 대부분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은 사람이 더 큰 상처를 입게 되곤 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주로 “나는 너를 이만큼 사랑하는데, 왜 너는 그만큼 사랑을 주지 않느냐”라고 따지게 된다. 그것은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결핍을 채워주는 대상으로서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나 이론이 아닌 활동 그 자체에 가깝다. 더군다나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다. 현대사회의 교환 원리 때문인지 많은 사람이 주는 것을 가난해지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랑을 주는 것에서는 전혀 반대의 의미가 있다. 사랑을 주는 과정에서는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소비하고 생동하는 자로 경험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당신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대를 사랑한다’라고 생각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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