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조던 피터슨 ‘12가지 인생의 법칙’

박가분 승인 2019.01.22 14:30 | 최종 수정 2020.07.07 14:57 의견 0

조던 피터슨의 <12가지 인생의 법칙>을 읽었다. 그의 철학이나 소박한 정치관에는 동의할 수 없어도 독자에게 그가 말을 거는 방식이나 호소력 있는 문체는 분명 배울만한 것이었다. 특히 조던 피터슨은 영미권 (남성) 청년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이끌고 있다.

12가지 인생의 법칙 / 조던 B. 피터슨 지음
12가지 인생의 법칙 / 조던 B. 피터슨 지음

피터슨은 페미니즘이나 정체성 정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가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이 책에는 간접적인 암시를 제외하면 직설적인 비판을 찾을 수 없다. 그 대신 그는 자기계발의 원칙을 솔직하고 직설적인 화법으로 말하고 있다. 칼 융학파 아니랄까봐 종교와 신화에 대한 해박한 인용도 글의 재미를 더한다. 자신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설득력 있는 인생론 중 몇 가지 원칙에는 동의하게 됐다.

그의 메시지는 한 마디로 ‘스스로의 삶에 책임감을 가지고 당당해져라’다. 오늘날 이를 말해주는 어떠한 권위도 사라진 지금 이 시대에 역설적으로 그의 조언은 상당한 호소력을 갖는다. 그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 한 가지 원칙만 거론하자.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정리하라.

이것은 당장 보면 최악의 꼰대 발언처럼 들리지만 요점은 매우 설득력 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보상에 이끌리는 존재다. 따라서 자신이 직접 성취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과업을 수행하고 그런 자신에게 작은 보상을 행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는 작은 성취감들이 자존감을 높이고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강한 힘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서구식으로 말하는 셈이다. 어떻게 보면 유교적인 자기도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금언도 피터슨식 ‘강한 개인주의’와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어 보인다.

HAVANA,CUBA - MAY 20,2015 : Young cuban man walks by a colorful Che Guevara portrait painted on a shabby old wall in Old Havana
HAVANA,CUBA - MAY 20,2015 : Young cuban man walks by a colorful Che Guevara portrait painted on a shabby old wall in Old Havana

잠시 화제를 전환하면 필자에게는 과거 체 게바라가 영웅이었다. 게릴라 무장투쟁에 대한 낭만 같은 것은 딱히 없었지만 그가 불가능한 목표를 위해 스스로 끊임없이 공부하고 수련한 것뿐만 아니라 이를 집합적 행동으로 연결시킨 게 멋지다고 생각한다. 사실 삼국지나 수호지의 영웅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동안 필자에게 영웅의 모습은 이런 민중주의적 요소를 극대화한 혁명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자기계발서에 대한 말이 나온 김에 말하자면 필자는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도 일종의 자기계발서였다고 생각한다. 그 책의 내용은 별 것 없고 한 마디로 ‘어떻게 하면 (정치)신문을 잘 만들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전부다. 오늘날 레닌이었다면 ‘어떤 어플을 만들 것인가’ 같은 문제로 비슷한 책을 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오쩌둥의 금언들도 바울 서신 못지않은 훈계와 권면들로 가득 차 있다. 체 게바라부터 시작해서 이들의 공통적인 메시지는 ‘너 자신은 충분히 (민중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과거 신좌파의 물결 속에서 청년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존 레논이 노래했듯 ‘Working class hero is something to be’이다.

이런 혁명가들의 자기계발서와 요사이 출판가를 점령한 자기계발서의 차이점은 한 마디로 말해 ‘집합적 행동의 효능’을 강조하냐 아니냐에 있다. 경쟁이 만연한 지금 사회에서 청년에게 문제는 ‘어떻게 하면 당당한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가 급선무로 보인다.

실제로 인터넷 경험담을 보면 모멸을 당한 개인이 어떻게 성공적인 방식으로 이를 만회했는지를 ‘사이다 썰’로 풀어내는 사례를 쉽게 볼 수 있다. 이것은 역으로 자신이 얻은 모멸감에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전전긍긍하는 심리적 콤플렉스를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 시대는 어떻게 보면 상처받기 쉬운 개인을 방기해버린 것이 근본적인 문제일 수 있다. 애초에 집합적 행동도 강한 개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 ‘세상을 바꿔라’, 혹은 박권일 식으로 ‘짱돌을 던져라’라고 말하는 것보다 ‘너의 방을 치우고 저 자신을 칭찬하라’는 금언에 더 이끌릴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좌파 영웅주의가 몰락하고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는 법을 조언하는 조언자가 득세한 것이다. 가치관도 변하고 롤모델도 변한 것.

자식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집합적 행동의 효능’과 이를 가능케 하는 ‘집단적 규율’을 가르치기보다는 ‘이념적·정치적 올바름’과 ‘상처주지 않기’를 강조한 일부 386세대 부모도 비슷한 딜레마에 빠졌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역으로 386들이 신봉하는 민중적 영웅주의에 대한 신망을 붕괴시켰다.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성장한 오늘날 10~20대는 (필요하다면 중대한 희생을 감수하면서 선을 위해 싸우는) 그런 종류의 도덕적 영웅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도 망설이지 않는다. 이는 일베와 워마드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피터슨은 이러한 현상이 근본적으로 교육문제라고 보며 “아이를 키우려면 처벌을 망설이지 말아라”고 일갈하고 있다. 이는 사실상 서구의 68세대를 겨냥한 언급처럼 보인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기책임과 성취의 경험을 통해 자유의 의미를 배우는 게 중요하지, 그들의 면전에 인권헌장을 들이댄다고 그들이 실제로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 피터슨식 비판의 요점이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조던 피터슨 심리학과 교수의 강연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조던 피터슨 심리학과 교수의 강연

여기서 필자는 그가 왜 PC를 진심으로 혐오하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 나아가 “자유로운 정신은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 대한 경험에서 나온다”는 헤겔식 금언도 피터슨의 책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된다. 자립하는 개인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규칙을 부과하는 훈련의 과정을 겪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수평적·자율적 조직문화’를 육성한다는 미명 아래 ‘쌤’이라는 명칭을 공식화하라는 공문을 보내는 등 지극히 ‘타율적’인 형식에 집착하는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에게도 필요한 비판이다.

또한 필자는 어느 때보다 부모의 간섭과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10·20대가 자주 이용하는 트위터에서 자살과 우울증 같은 자기 파괴적 주제에 집착하는 것을 보면 피터슨의 지적이 실제로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가치관의 재정립이다. 위선적인 PC충(忠)들처럼 ‘꼰대’라는 소리가 두려워서 다가오는 미래세대의 도덕적·윤리적 욕구를 놓치면 진보는 실패할 것이다. 물론 황교익처럼 핀트를 놓치고 꼰대 소리를 해도 실패할 것이다. 여러 모로 위태로운 사회 속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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