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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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0 17:30 | 최종 수정 2020.06.25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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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람에게서 서로 기운을 받고 그 안에서 공부하며 성장한다.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사람 공부를 하는 것이다. 중국의 격언 중에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라는 말이 있는데, 도통의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 길을 여행하라는 뜻이다.
독서 공부도 재미있지만 여행 공부는 직접 찾아가서 라이브로 보는 살아있는 생생한 체험 공부다. 이러한 여행이야말로 사람 만나는 공부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얼마 전 필리핀 남섬을 한 달간 여행했다. 평소에 친분이 있던 현지 신부의 초대로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섬 동남부에 있는 항구도시 다바오와 마티, 히나투안을 둘러보고 휴양도시 세부와 천상의 해변 보라카이도 들려 휴식도 취했다.
약 7000여개 섬으로 이루어진 필리핀은 언어와 인종 등 다양한 문화권이 형성돼 있다. 그중에서도 해양관광의 대국답게 자연환경이 뛰어났다. 여행의 재미는 자연환경을 보고 즐기는 데에 있지만 최고의 묘미는 역시 사람 만나는 재미다. 여행 내내 다바오 최고 부자와 정치인도 만나보고 일반 서민들의 삶도 들여다봤다.
개발도상국 필리핀은 정치 부패가 OECD 중 최하위고 경제적 부도 상위 1%가 독점해 빈부 격차가 매우 심각한데도 불구하고 필리핀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한국인들보다 훨씬 높다고 한다. 자살률과 살인 같은 흉악 범죄도 한국보다는 적다.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그렇다면 필리핀이 한국보다 행복한 이유는 무엇일까를 고민하던 중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바로 ‘가족 중심’이라는 것이다. 물론 16세기 스페인 침략 당시 가톨릭이 유입되면서 필리핀 사람들의 80%가 가톨릭 신자이고 이들의 신앙심은 내세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연결돼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할 만큼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한몫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 행복의 가장 큰 요인은 역시 가족 중심에 있다고 본다. 이들의 중심은 항상 가족이며 여행을 가도 모든 가족이 함께 가고 또 온 가족이 함께 사는 집들이 많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서 많은 것을 듣고 배워 인성교육이 저절로 된다.
행복의 근본은 가족간의 사랑이며 자아 형성의 기본도 가정에서의 사랑이 밑바탕이 된다. 우리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을 어려서부터 듣고 자랐다. <대학>에서는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중략) 집안이 가지런해진 뒤에 나라가 다스려진다(欲治其國者, 先齊其家, (중략) 家齊而后, 國治).”고 했다. 먼저 가정이 화목해야 나라가 평안해진다는 것이다.
<논어> ‘자로’ 편에서는 “붕우간에는 정성을 다하여 권면하고, 형제간에는 화열하게 해야 한다(朋友, 切切, 兄弟, 怡怡).”고 했는데, 친구간의 허물은 냉정하게 지적하고 형제간의 허물은 책망보다는 사랑으로 감싸주라는 말이다. 즉 가족간에는 사리사욕이 아닌 사랑이 먼저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이야말로 가족 중심의 사회였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대가족이 한데 모여 살았다. 그러나 산업화를 거치면서 핵가족이 늘어나고 지금은 1인 가구 시대를 살고 있다. 싱글라이프가 편하고 자유로울 수는 있어도 외롭고 고독하다. 무엇보다 밖에서 받은 고통을 함께 나눌 가족이 없다면 그 고통은 두 배가 되고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 시킨다.
얼마 전 연쇄살인을 주제로 모 프로그램에서 인터뷰한 프로파일러가 연쇄살인범들의 공통점은 어려서부터 가정환경이 안 좋았고 부모로부터 사랑을 못 받았다고 말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애정 결핍이 사이코패스들을 양산하는 한 원인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는 빠르게 성장했던 것만큼 정신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런데 요즘 필자가 자주 시청하는 집을 구해주고 또 건축을 탐구하는 프로그램들에서 3대가 같이 살 집을 구하고 가족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집들을 짓는 것을 보면 조금씩 가족 중심의 문화로 다시 회귀하는 것 같아 조금 마음이 놓인다.
사람한테서 받은 상처는 결국 사람한테서 치유 받는다고 했다. 그 중심에는 가족이 있다. 가족의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위안이다. 가족간의 사랑이 충만하고 건강한 대한민국이 되기를 인문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고민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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