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고개를 숙였다. 이걸로 자신의 소임은 끝났다고 했다. 거대 양당을 오가며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던 두 당을 기사회생시켰던 그였다. 김종인. 가인 김병로의 손자, 경제민주화의 창안자, 선거의 달인, 국민건강보험과 재형저축의 저작자.
불리는 말이 많고 언제든 현역 최일선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선거 참패 기자회견을 하는 그의 모습은 신산스러워 보였다. 제21대 총선에서 제1야당의 선거를 책임진 그는 국회 1당 결과를 자신했다. 하지만 결과는 여당 압승이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많은 사람에게 충격이었다.
선거가 치러지던 날 마침 김종인의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를 다 읽은 참이었다. 부인하는 이도 있겠으나 요 몇 년 선거 판세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사람은 김종인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이자 일제강점기 시기 민족변호사, 이 나라 야당의 시작자리와 법조 삼성(三聖) 가장 첫 자리에 그의 조부 김병로가 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손에 키워지다시피 한 김종인은 자연스레 정치와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조부의 비서로서 당대 정객들과 5·16 쿠데타 후 군인들에 이르기까지 곁에서 지켜보며 정치의 생리를 배우고 익혔다. 정치인의 말과 각서를 믿지 않는다는 원칙은 그때부터 비롯됐다.
조부가 작고하자 독일에서 재정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대학 강단에 선 그가 다시 정치와 마주하게 된 계기는 유신 몰락의 한 동기가 됐던 ‘부가가치세’였다. 1973년 재정독립(책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독자적으로 예산을 운용하게 된 원년은 73년이다. 그전까지는 미국 국제개발처(USOM)이라는 곳에 의탁해 예산을 짜고 집행하는 수순이었다고 한다)으로 추가 세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박정희 정부가 짜낸 묘안이었으나 우리 현실과 경제 수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김종인은 반대했다.
이를 무시하고 도입해 국민 여론이 바닥부터 돌아섰다는 역사적 사실과 배경이 책에는 상세하게 서술돼있다. 그는 당대 서민들과 중소상공인, 자영업자들이 정부에 반감이 있거나 정책에 저항하면 선거 등으로 몰락하게 돼 있다고 적었다. 21대 총선은 어떨까. 그는 어떻게 이 시절을 회고할까.
‘부가가치세’ 도입 과정에서 중재했던 이가 뒷날 5공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이른바 ‘전두환의 경제교사’라 불린 김재익 수석이다. 세간에는 뛰어난 역량에 인자한 인품까지 갖춘 김재익을 기리지만(고승철, 이완배 <김재익 평전>) 김종인의 책에선 조금 다른 평가를 한다. 이상적인 이론을 현실 경제에 과도하게 적용하는 유형의 사람으로 그리는데 5공 때 이미 금융실명제를 도입하려 했던 김재익의 판단이 틀린 것이었다며 그의 정책 역량을 비판한다.
책에는 김재익뿐만 아니라 당대를 수놓았던 정·재계 인사들에 대한 저자의 비평이 나온다. 인신공격을 위함이 아니라 실명을 적시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검색을 하면 전부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 그걸 맞히는 재미도 있다. 독일 뮌스터대학 동문이었던 김수환 추기경, 같은 대학에서 강의를 맡은 전 교황 베네딕토 14세와의 인연도 눈길이 간다.
흔히 김종인을 경제민주화의 대부라고 부른다. 책에는 이 별명의 기원인 1987년 헌법 개정 과정도 설명돼있다. 헌법 개정 위원으로 경제민주화 조항문구(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를 반드시 삽입한다는 마음이었던 그를 두고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었던 한 재벌 총수와 홍보위원장이었던 또 다른 재벌 총수가 벌인 회유 작업이 그려진다.
악연은 이어져 1990년 5대 재벌을 두고 비업무용 부동산을 매각하라는 방침을 밝혔을 때 일화도 재밌게 읽을 수 있다. 금융실명제를 반대하는 반개혁론자에서 경제민주화 조항, 재벌을 향한 강경한 방침의 공산주의자라는 비난까지 김종인은 시대적 상황과 시절에 따라 유연하고 탄력 있되 옳다고 생각하는 바는 반드시 추진하고 돌파하고야 마는 모습을 보여준다.
책은 우리가 역사책에서 기계적으로 읽고 익히는 사실 이면에 이야기도 들려준다. 이를테면 5공 3저 호황의 그늘 같은 것이다. 3저(저금리, 저환율, 저유가)라는 초유의 외부요인으로 고속성장과 안정 재정을 이상하던 5공 청와대는 그를 위해 물가를 강하게 움켜쥔다(중심에 역시 김재익 수석이 있었다고 전한다). 재정 역시 전해에 맞춰 동결하는 식인데 이 폐단이 6공화국으로 이어져 물가가 하염없이 오르는 결과로 나타난다.
책은 해박하고 문장은 단정하고 내용은 실팍하다. 노인의 서술임에도 이 시절의 문체와 어색함이 없고 겉돌지 않는다. 그 같은 감각과 의식의 비결의 무엇인지 직접 찾아 묻고 싶은 마음이다. 아마 그 연배에는 김종인과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 정도가, 그 위로는 김형석 교수, 김동길 교수 정도가 꼽힐 만하다. 듣기에 그들은 요즘도 신간을 가까이하고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고 한다.
김종인은 박근혜, 문재인 정부 집권에 관여했다. 이 과정의 막전막후도 회고한다. 이미 여러 언론에서는 말초적으로 이 대목만 따다 보도해 주목을 끌기도 했다. 김종인의 증언에 전적으로 기대자면 두 후보와 관계자들이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고 그를 찾아왔다. 대통령을 만들어 달라, 당을 구해주시라는 부탁이었다. 집권 후 그들의 표변하는 모습도 집중해서 읽어볼 대목이다.
이번 21대 총선에서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미래통합당 선대위원장을 맡은 데는 현 대통령을 만드는 데 제일 기여했고 이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추궁이 있었다고 한다. 독대가 일반적인 정치인의 대면 상황에서 늘 배석자와 함께 자신을 찾고 집권하면 어느 세력이 정권을 휘두를지 내심 예측했다는 현 대통령에 대한 인상 비평도 눈길이 간다.
이 책은 잘 쓰인 회고록의 새로운 전형이 될 듯하다. 만들어놓고 가족, 친지들만 나눠보는 식이 아니라 대중 독자까지 흡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두툼한 양장도 아니고, 자화자찬과 주례사실 서술도 아니다. 아닌 건 아니고 맞는 건 그때와 다른 지금도 맞다고 하는 노인의 꼿꼿한 결기가 보인다. 김종인은 늘 최고 권력자에게 이렇게 말해왔다.
되는 걸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없고, 안 되는 걸 된다고 말할 마음도 없다.
뉴스를 일별하니 궤멸 수준의 제1야당 재건 책임자로 다시 그가 거론된다. 선거철에 그가 뱉었던 말들 하나하나가 유권자들의 많은 공감을 얻기도 했다. 저자가 단순히 시늉과 치레만 가득한 사람이 아니고 어떤 기획력과 추진력이 있어 여든 나이에도 가장 뜨거운 정치 현장에 끊임없이 소환되는지 책을 읽으며 납득할 수 있었다.
김종인은 제1야당의 부활을 다시 이끌 수 있을까. 그는 요청에 수락할까. 역대 가장 큰 이변인 21대 선거 결과 후 그의 행보에 많은 사람이 주목한다. 김종인은 아마 영원한 현역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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