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계의 몰락’ 지식인의 책임과 알베르 카뮈

모든 폭력에 반대한 파리 지성계의 아웃사이더

오세라비 승인 2020.05.02 13:35 | 최종 수정 2020.05.05 19:27 의견 0

우리가 사는 시대를 ‘지성계의 몰락 아니면 암흑시대’라 진단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지성인의 도덕적 책임과 윤리 그리고 용기에 대해 묻는다면 어떤 말로 설명을 해야 할까. 독립된 파수꾼으로 지성인의 책임을 기꺼이 짊어진 인물은 존재하는가. 현재 우리 사회 지식인들의 도덕적 무책임, 지적으로 무책임한 행태가 지성계 전체에 암흑을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지적 혼수상태에 가까운 시대를 살아가면서 유독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지식인이 알베르 카뮈(1913~1960년)다. 필자에게는 전 세계를 바이러스 공포로 몰아넣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사태가 카뮈가 발표한 소설 <페스트>(1947)를 다시 되살린 점도 있다. <이방인>(1942), <시지프 신화>(1942)의 저자로서 30대 초반에 프랑스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해 명성을 얻은 카뮈는 1957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이방인(알베르 카뮈 지음/민음사 출판)
이방인(알베르 카뮈 지음/민음사 출판)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 태생의 카뮈는 20대 후반 무렵 파리로 이주해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살았다. 카뮈라는 인물의 이해는 약전 형식으로 탁월하게 그의 삶과 정치적 교차점을 담아낸 저작이 있다. 바로 저명한 역사학자 토니 주트 <지식인의 책임>(1998)이다. 카뮈의 문학 작품에 대한 명철한 해석과 당시 마르크스-레닌-스탈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찬양하던 프랑스 지성계 풍토에서 좌절과 대립, 반목했던 쟁점들을 다룬다.

<지식인의 책임>은 동시대를 관통하며 살았던 세 사람의 지식인 알베르 카뮈, 레옹 블룸, 레몽 아롱에 대해 예리한 통찰로 조명한다. 이들이 살았던 프랑스는 이데올로기의 양극화가 극심한 대립 속에서, 세 사람은 지식인의 책임윤리와 신념윤리를 균형을 지켰다.

또한 볼셰비키 혁명 이후 스탈린주의가 프랑스 지성계를 물들일 때 세 사람은 일관되게 반공주의를 고수했던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토니 주트의 평가대로 고립되고 시대와 불화한 외로운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의 지혜는 마치 미네르바의 올빼미처럼 황혼녘이 되어서야 지성계에 이성을 깨닫게 했다.

카뮈가 1940년에 파리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 지성계는 좌파 사상이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혁명 사상이 프랑스 지식인들의 주류 이데올로기였다. 카뮈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한 시기와 종전 직후까지 레지스탕스 언론 활동을 하며 저명인사가 됐다. 이미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를 출판해 카뮈의 문학은 카리스마적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카뮈는 파리 지성계의 이방인이었다. 나치에 저항하며 활동할 무렵, 카뮈의 살아생전 최대 적수였던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느 보부아르와 비공식 모임을 유지했다. 하지만 파리 좌파 지식인 공동체 왕좌는 마르크스주의자 사르트르를 중심으로 한 대중 철학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프랑스 문학의 찬란한 금자탑을 쌓은 빅토르 위고, 발자크, 스탕달, 플로베르 등 정통 문학가의 시대는 지났던 것이다.

사르트르를 위시한 지식인 패거리들은 혁명 신화에 젖은 정치 철학을 신봉했다. 이런 상황은 알제리 출신의 카뮈를 그가 죽을 때까지 아웃사이더로 만들었다. 카뮈가 혁명의 폭력성을 비판한 <반항하는 인간>(1951)을 출판한 후 사르트르의 잔인한 비판과 공격으로 그를 좌절시켰던 것이다. 사르트르와 사실혼 관계인 보부아르도 카뮈의 작품들을 혹평하며 파리 지성계로부터 추방하는 데 동조했다.

한편, 토니 주트는 자신의 마지막 저서 <20세기를 생각한다>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보부아르는 알베르 카뮈에 매혹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며, 사르트르가 그 젊은이를 그토록 질시했던 한 가지 이유였을 것이다.

휴머니스트이자 모럴리스트였던 카뮈

카뮈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혁명세력에 공감하는 프랑스 지식인들의 세계에서 멸시와 조롱을 당했다. 알제리 전쟁(1954~1962년) 발발은 그를 더욱 고립시켰다. 파리 지식인들은 알제리 독립을 지지했으나 알제리 태생의 카뮈는 침묵했다.

카뮈의 알제리 딜레마다. 이유는 카뮈가 가진 태생적 뿌리와 연관이 깊다. 그는 알제리 민족이 아니며 부친은 프랑스에서 이주한 프랑스인, 모친은 스페인계다. 카뮈는 알제리에서 성장해 알제리 대학을 졸업했다. 파리 엘리트들과는 신분의 증표가 달랐다. 파리 지성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학력의 소유자였다.

사르트르와 동창생으로 그의 최대 정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명저 <지식인의 아편>을 쓴 레몽 아롱 역시 최고 엘리트 교육기관인 ‘파리고등교육기관’ 출신이다. 파리 엘리트 지식인들이 가진 사회적 배경과 권위와는 섞일 수 없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했다.

카뮈는 왜 알제리 독립 지지를 거부했을까. 분명한 사실은 카뮈는 프랑스의 식민지 행위는 명확히 반대했다. 카뮈는 반공주의자였다. 파리에 오기 전 알제리 공산당을 이미 경험했던 이유로 공산주의의 폭력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 공산주의와 스탈린의 강제수용소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알제리의 아랍근본주의자들의 호전성은 자신의 조국이 독립 후 더 혼란해질 것을 정확히 예측했다. 알제리의 독립은 카뮈 사망 후 2년 뒤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알제리는 독립 후 35년이 흘러도 아랍 근본주의자들의 분열과 내전으로 인한 유혈사태는 끊이지 않았다.

카뮈의 이런 태도는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로부터 매장을 당했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알제리가 프랑스의 자치령으로 남기를 원했던 카뮈는 자신의 조국을 너무나 사랑했다. 카뮈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썼던 미완성 작품이 <최초의 인간>이다.

이 소설은 카뮈의 자전적 소설 형식으로 알제리에서 성장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편모슬하의 비참할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 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던 시절이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지중해의 풍경과 펼쳐진다. 카뮈가 대학을 갈 수 있게 성심을 다해 지도했던 초등학교 은사에 대한 감사의 일화가 담겨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필자는 카뮈의 <최초의 인간>을 가장 좋아한다. 그의 어느 문학작품보다 이 작품을 읽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따뜻해짐과 동시에 지중해의 꽃 부겐베리아가 하늘거리는 지중해의 햇살을 느끼게 했다. 카뮈가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당시 그의 품 안에서 <최초의 인간>의 미완성 원고가 발견됐다. 하지만 이 작품은 미완성이라도 좋았다.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파리의 엘리트도 아니었고, 그들과 어울릴 수도 없었던 카뮈는 동시대의 지성인들이 휩쓸린 스탈린주의, 혁명의 신화와는 거리가 먼 온건한 개혁주의자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무엇보다 사적인 가치, 개인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던 휴머니스트였다.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부르짖은 사르트르는 틀렸고, 인류애를 강조하던 카뮈가 옳았다.

토니 주트는 <지식인의 책임>에서 카뮈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했다.

카뮈는 철학자도, 참여적 지식인도, 파리인도 결코 아니었다. 카뮈는 모럴리스트였다.

 

카뮈는 암흑의 시대에 살았고, 시대와도, 장소와도 불화했다. 카뮈의 비극은 시대 탓이다.

 

카뮈의 독특한 정직성, 가품이 판치는 곳에서 진품 같은 매력을 가진 너무나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면모를 지녔다.

 

카뮈가 살았던 시대 많은 사람이 길을 잃었던 곳에서 올바른 길을 찾았던 사람은 카뮈였다. 살아생전 외부인이었던 알베르 카뮈는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던 것이다.

참고

ㆍ토니 주트 <지식인의 책임> 오월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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