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여대립’을 부정하는 것의 의미
예전에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회자 됐었다. 물론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과거에 비하면 그다지 공감되지는 않는다. 물론 그것은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생겨난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는 하다. ‘여여대립’을 강조하는 게 여성에 대한 차별이라는 생각이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사회에 나아가 여성 자신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만은 아니다. 대립이나 대결에는 나름의 이유와 원인이 있고 그것을 제대로 분석해야 좋은 해법이 나올 수 있다.
그런데 팩트가 아니라 어떤 이념이나 당위성의 논리로 사실을 왜곡하여 결과적으로 원인이나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면 그런 대립에 의한 희생이나 피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여성의 사회활동 증가와 새로운 형태의 ‘여여대립’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새로운 형태로 여성들끼리 대립해야 할 일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여성동료 여성상사 여성부하 등등의 형태로 직장 내에서 여성들의 관계가 복잡해지면서 당연히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로 인해 갈등이 생기고 그것이 대립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이것은 결코 특이한 현상이 아니다. 이미 남성들은 그러한 형태로 ‘남남대립’을 오랫동안 겪어 왔고 그것이 여성들에게도 확대된 것에 불과하니까.
과거의 ‘여여대립’은 남성을 둘러싼 여성들의 경쟁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회의 대부분의 자원을 남성들이 장악한 상태에서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 사회에서 ‘여여대립’은 권력자인 남성에게 ‘총애’를 받기 위한 대립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남성들이 상사에게 더 신뢰받기 위한 경쟁으로 대립했던 것의 여성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이 둘은 유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여여대립’은 남성과는 별개로 진행되는 순수한 여성들의 경쟁으로 인한 대립이 대부분이다. 남성들의 조직에 ‘남남대립’이 일반적인 것처럼 여성들의 사이에 ‘여여대립’이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럼 의미에서 새로운 ‘여여대립’은 과거의 ‘여여대립’과 달리 여성의 사회적 지위상승으로 인한 긍정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대립 자체를 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여성들이 남성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삶을 살게 됐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여대립’은 여성이라는 특징을 전제로 해결해야
문제는 이러한 ‘여여대립’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이 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여여대립’, 즉 “여자의 적은 여자다”라는 생각이 갖는 여성차별적인 의미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도 ‘여여대립’을 강조하면 과거의 남성을 둘러싼 여성들의 대립을 연상하는 것 같다. “언니 저 마음에 들지 않으시죠”라는 대사가 나온 드라마는 여성차별이라는 이유로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새로운 형태의 ‘여여대립’의 존재의 부정은 여러 방면에서 문제 해결을 방해한다는 것이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간호사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태움’이라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도 그중의 하나다.
물리적 폭력을 휘두르기 어려운 여성들의 세계에서는 언어폭력이나 왕따 같은 형태의 폭력이 자행되기 쉽다. 그런 의미에서 ‘여여대립’은 그것이 새로운 형태이든 과거의 형태이든 여성이라는 당사자의 특징에 맞춰 분석되고 해법이 제시돼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움’에 대한 해법을 과도한 업무부담이나 스트레스라는 보편적인 문제로부터 찾는 것은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들 뿐이다. 만일 그런 것이 원인이라면 (물론 전혀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유사한 상황에 놓인 다른 직장에서 ‘태움’이라는 문제가 발생해야 하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여학생 기숙사에서 일어나는 왕따나 언어폭력 등에 의한 괴롭힘처럼 이것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여성임을 감안해 그에 대한 보다 특별한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여성은 하나라는 ’여성동일체‘론의 함정
이런 당연한 주장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여성은 하나라는 ‘여성동일체’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여성은 대립할 수도 해서도 안 된다는 일종의 이념적인 사고라 할 수 있다. 남성들을 적으로 여기는 마당에 여성들끼리의 대립은 적전분열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입에 담는 것은 여성들의 분열을 획책하는 음모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남성들의 ‘남남대립’도 현실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너무나 당연시되는 것은 남성들의 대립을 일반적인 현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즉 남성의 대립은 정상이니 문제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이는 지극히 남성중심적 사고라고 할 수 있지만 ‘여성동일체’론은 여성들까지 이러한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한다.
그런데도 왜 여성들끼리의 대립을 부정하는지 묻고 싶다. 계급적으로도 재벌의 아내와 여성비정규직 노동자는 하나가 될 수 없다. 여성들만의 직장에서 노동착취를 하는 여성 경영인에게 여성 노동자가 시위하면 죄악일까. 왜 여여대립을 부추기냐고 비난할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그런데 왜 새로운 형태의 ‘여여대립’을 부정하는가? 이것은 당위성에 의해 현실이 무시되는 전형적인 사례다.
결국 피해는 ‘여여대립’의 피해자들이 입게 된다. 그들은 피해자나 희생자가 돼서는 안 된다고 여겨진다. 여성들은 가해자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여성 가해자들에 의한 여성 피해자나 희생자란 있을 수 없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가해자의 자리에도 여성은 존재하고 있다.
얼마 전 여자배구선수 고유민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에서도 이러한 현실부인이 가져오는 문제점을 보았다. 만일 그녀가 남성이 많은 직장에서 괴롭힘과 왕따를 당했다면 그래서 목숨을 끊었다면 많은 여성단체가 들고 일어나 이 문제에 매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배구팀이니 당연히 가해자도 여성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그러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고 사건은 피해자가족의 호소로 겨우 해결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유족들은 팀과 회사를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고 여성인권문제임에도 그들을 지원해 주는 여성단체는 보이지 않는다.
여성 가해자의 존재를 인정해야
‘여성동일체’의 원칙은 이제 청산돼야 한다.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압도적인 약자일 때는 여성 간에 계급적 차이나 노동자로서의 이해관계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상사는 남성 여성은 남성을 보조하는 자라는 시절에나 통하던 시대착오적 생각을 언제까지 관철해 피해여성들을 방치할 것인가?
고유민의 눈물이 간호사들의 아픔이 그대로 묻혀도 되는 것일까. 여성이 가해자가 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향상이라는 긍정적인 모습의 그림자라는 점에서 무조건 부정할 사실은 아니라고 본다.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남녀의 성이 더 이상 단결이나 투쟁의 단위가 되지 않는 사회일 것이다. 여성끼리 뭉쳐야 한다는 사실은 아직도 여성의 지위가 낮음을 의미한다. 여성 대신 인간이 단위가 되는 세상이 와야 할 것이다.
실제로 여성남성이라는 구분이 사라지고 있으며 ‘여여대립’은 새로운 형태로 자연스럽게 전개되고 있다. ‘여여대립’은 이제 여성인 인간의 대립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무시하고 ‘여성동일체’라는 낡은 프레임에 매달려 여성 가해자들을 방치하는 동안 제2, 3의 고유민같은 ‘여여대립’의 여성 피해자들이 소중한 생명을 던져버리는 비극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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